수상한 시

[스크랩] 2018, 시와 표현 작품상-중고가전 수거 차량처럼 (외 1편)/ 신용목

시치 2019. 1. 18. 23:36

중고가전 수거 차량처럼 (1)

 

    신용목

 

 

 

 

   비온 뒤 지구는 커다란 비눗방울 속에 갇힌 것 같다. 울고 난 뒤 너는 너만큼의 비눗방울 속에 갇힌 것 같다.

  차 마실래?
  아니,
  아무도 저어주지 않아서
  물고기는 어항 속을 저 혼자 빙빙 돈다.

   물고기는 녹지 않는다.
  아픈 사람의 입술에 물려주는 젖은 헝겊처럼 빨래가 널려 있다. 빨래는 어항 같다. 아무도 마시지 않는다.

  소리가 들린다. 차들이 왔던 길을 가는 소리.
  물속처럼,
  너는 오후를 조용히 보낸다.
  후후, 불며 졸음이 졸음을 마시는 동안에도 옷은 조금씩 빨랫감이 되어간다.

  책을 펼치고 어떤 문장도 읽지 않는다.
  그래도

   책 속에는 사랑이 있다. 이야기는 사막이거나 바다.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기 위해 폭풍우를 건너는 낙타가 있고, 죽어버릴 거야. 문을 쾅, 닫고 나가서는 어느 모퉁이 식당에서 국수를 삼키는 순간이 있고
   책 속에도,
  책처럼 조용한 사람이 있다.
  .

  창문을 닫으려고 창가로 간다.

  너머엔 학교가 있다. 여름이 운동장에 물길을 만들고 사라진 뒤 아이들은 다시 빗방울처럼 돌아올 것이다. , , , , 전화번호를 크게 알리며 중고가전 수거 차량이 지나간다.

  어항은 식었다.

 

 

 

  눈사람의 시체를 찾아 바다를 헤매는 자의 지느러미가

 

 

  

   선로 위를 미끄러지며 기차가 도착하자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문이 열리고


   몸은, 수많은 발자국을 껴입고 있어서 가는 곳마다 발자국을 벗어놓는다.

   역장은 알린다.

   이 역을 떠나는 손님께서는 자신의 발자국을 다 가져가시기 바랍니다.


   몸이 발자국인

   눈,

   이 얼어붙은 빗방울은 어느 모퉁이에서 흔들리는 연인들의 눈빛 같다.

   기차와 플랫폼을 가르며 떨어지는 빗방울을 조금만 더 늦춰보려고,

   마음의 바퀴를 굴리며 걷는 바람의

   발.


   아무도 떠날 수 없어서

   자리를 깔고 신발을 벗고 텔레비전을 켠다. 눈은 내리고, 울다가 웃다가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른다. 눈은 내리고, 계란을 깨고 소금을 치고 기다린다. 흰자위가 흰자위가 되는 동안 봄이 와

   둘둘 발자국을 말아 가방에 넣는다.

   역장이


   창구에 걸어놓은 잠바에서 한꺼번에 터져나온 하얀 털처럼,


   언젠가는 물이었던

   밤,

   발자국은 떠난다는 말을 모르지만 

   눈사람의 시체를 찾아 바다를 헤매는 자의 지느러미가 바람 속에는 있다.

 


              ⸺월간 시와 표현2018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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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목 / 1974년 경남 거창 출생. 2000작가세계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바람의 백만 번째 어금니』『아무 날의 도시』『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면 내가 돌아보았다.

 


출처 : 푸른 시의 방
글쓴이 : 강인한 원글보기
메모 : 2018, 시와 표현 작품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