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사에 원고를 보낸 후 아내에게 말했다. 무조건 내가 하는 말을 그대로 반복해달라고 했다. 아내는 이유를 먼저 묻는 평소의 대화방식과 다르게 “조경환 신춘문예 당선”이라고 내 말을 반복해 말해주었다. 당신 입으로 말해주면 그렇게 될 것 같다고 나는 말했다. 늦은 동지죽을 쑤었다며 이웃 아주머니께서 보내주신 따듯한 동지죽을 막 먹으려는 차에 신문사에서 전화가 왔다. 엄마 손을 잡고 입학식에 갈 때처럼 떨림 반 설렘 반으로 전화를 받았다. 아니 떨림이 더 컸다.
처음 시를 쓰겠다고 마음먹었을 때는, 훗날 한 권의 자작시집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수없이 망설이다가 결국 묵은 습작시를 책상 위에 출력해 놓았다. 모두 왜소해 보이고 보잘것없어 보였다. 습작의 시간도 제대로 갖지 않은 20년 가까운 공백은 컸다. 쌓인 먼지를 닦아내고 못도 치고 흙도 덧발라보았다. 그러나 상태는 나아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집을 낼 욕심으로, 처음 시 쓰기의 기초를 놓아주신 전원범 교수님께 보따리를 싸들고 갔다. 책으로 내고 싶으니 눈 한번 맞춰주시라는 부탁을 드렸다. 그런데 교수님께서는, 근본 없는 자식처럼 아무데도 이름을 올리지 않고 책만 내면 되겠느냐고 책하셨다. 그래서 더 지도해주시기를 부탁드렸다. 그리고 여러 문을 두드렸다.
시를 쓰면서 내면 깊은 곳을 건드리지 않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생에 대한 감사 또한 상처 일부라도 용광로 안에서 녹아 섞이지 않으면 공허하다. 깊이깊이 숨어버린 상처를 찾아 꺼내놓기도 해야 하고 내 주변의 상처들까지도 건드리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출생하는 날보다 나은 날’이라는 마음의 작은 집 하나를 지어두고 살면서 외출도 하고 그리움이나 연민 등을 초대도 하며 살았다.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면 외박은 하지 않겠다는 묵시적 규율도 정해두었다.
그러나 기왕 시인이라는 이름을 얻었으니 많은 것을 가둬두지 말자. 풀어 놓자. 그것들에게 자유를 부여하자. 그러면 집을 왕래하는 것들이 스스로 치유되고 나 또한 치유되리라 믿기로 했다. 더 크게 집을 짓고 마당도 넓혀 시로 쓰다듬자. 호호 불어서 치유되는 일상들이 내 주위에 몇은 있게 하자. 꿈을 꾸자.
꿈을 갖도록 해주시고 펼칠 수 있도록 부족한 저를 북돋아 한 계단 올려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과 광남일보사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동인활동으로 어깨를 나란히 해주신 여러 문우들과 선배 작가님들께 감사드린다. 특별히, 도전을 망설일 때, 그리고 여러 고비 때마다 본인들의 창작열을 나에게도 아낌없이 나누어주며 응원해주신 두 분의 동화작가 김명희 선생님, 임성규 선생님과도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다.
글쓰기가 어느 때는 실없어 보일 때도 있었겠지만 화병에 물 갈아주고 딴전부리는 아내의 속마음이 더없이 고맙다. 눈 맞추는 것만이라도 잘 해보겠다며 바라보기만 했을 뿐인데 잘 자라준 딸·아들에게도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조경환
△전북 고창 출생
△한국방송통신대 국어국문학과 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