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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현대시학》 신인상 당선작 _ 안소랑, 강상헌

시치 2018. 12. 11. 20:06

2018년 현대시학》 신인상 당선작 안소랑, 강상헌

                                 심사위원 김상미우대식

 

                                                                                      

                                                                   

포도알 (외 4)

 

   안소랑

 

  

제비꽃 속에서 얼굴 하나를 꺼낸다

 

잘 빚어졌구나무지개의 무표정과 안개의 또렷한 눈빛으로

보랏빛 머리칼을 가진 아이야

 

착각을 가르치는 바보들과

온종일 봄꽃들이 내뱉는 과격한 기침 소리가 이곳에는 가득하다

 

마지막 변명처럼 포도알이 익어가는 계절

화끈거리는 콧잔등 위로 또르르

추락하는 이름들,

 

투명해지는 비명과 광기 어린 화분들

마비된 밤과 하늘 사이에서 떨고 있는 조약돌을 마주한다면

두려워하지 마밤하늘을 꿰어 만든 이불과 반짝이는 무덤 속으로 모든 고개들을 초대해

 

너무 많은 밤들을 마셔버린 나의 배꼽과

흐릿한 구름들이 잔뜩 낀 너의 태명이 연결되어 있다면

우리는 애타게 소리치지 않아도 서로의 실패를 알아챌 수 있겠지

 

너에게는 피가 흐르고 있구나나에게는 없는 것

비틀거리는 몸짓과 서툰 의욕들이 가득하구나

 

제비꽃 빻고 태어난 너의 가슴팍에

커다란 흉터처럼 자라난 포도알 하나

 

짓누르는 대신 오래오래 입을 맞춰야지

 

여백 위로 떨어진 한 방울의 아찔한 물감처럼

보랏빛,

의도된 실수처럼 짙게 번져가는 우리의 생

 

너의 소속은 저 타들어 가는 계절의 한복판

곧 폭우가 내릴 거야싱그러운 우연들이 우리의 머리 위를 맴돌고 있으니까

 

네가 나를 돌봐줄 때까지

 

휘몰아치는 보랏빛

 

 

투모로우

 

 

젊은 나의 고뇌는 일곱 개의 그늘이 요일 놀이를 시작할 때

화요일이었던 그늘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뼈를 향기로 착각할 때

 

배는 고프고 나는 또 고프다는 말을 잊어버린다

측백나무가 입가에 거품을 물고 흘러가는 밤

모두가 알고 나만 모르는 시간이 지나간다

내가 나를 보려고 하면 바늘구멍을 통과한 나는 자꾸만 뒤집어진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단지 입술을 깨문다아야,

숲을 떠나면 영혼을 빼앗긴다고 믿는 아야 공주의 동화에 대해 생각한다

모두가 고통을 느끼는자장 완벽한 기승전결을 가진 이야기

나는 아주 사라지지는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실성한 사람들의 자유는 자신이 누구인지 잃어버리는 데에 있는 것

탈영병이 나에게 총구를 들이민다

국자를 닮았군요

아니면 단호하게 피어나는 대나무꽃이나 만족스러운 마침표

 

뒤집어진 존재들이 하늘에 맞닿는다

그것은 너와 나

오래 정든 칼날과 잔디처럼

우리는 비참한 사이

요일 놀이를 하다 보면 우리는

너무나 싱그러운 빛깔과 향기 속에서 결별하는 계절에 와 있고

 

물구나무선 나무의 머리 위에서

소용돌이치는 별들은 우주의 간증일까

 

권총이 필요하다

미뤄둔 결심과 고백을 실행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보다 더 많은 피를 흘린 공주들을 알아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입김을 불고 싶다

안개 속에서 피어오르는 너의 이름을 착각하지 않기 위해서

 

탈영병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반짝이는 햇빛에 손을 내민다

괄호처럼 불분명한 사인과 모자이크 같은 궁금증들을 훨뤌 불어버리자

 

배가 고프다

이 문장은 명료하지만 우울하고 간결하지만 의문스럽지

아아탄알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젊은 고뇌의 소리

먼 하늘 속으로 푸드득 푸드득

거꾸로 선 드레스들이 날아오르고 있다

 

일곱 개의 그늘들이 한꺼번에

월요일이라고 쓴다

 

 

태풍 6

 

 

당신은 하나의 이유가 되기에 불충분하다

 

나를 이루는 변덕들은 조금씩 몸집을 키우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위협적인 피부들을 웅크리는 것

 

바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당신이 이불을 찾는다

 

그건 지느러미야,

 

파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당신이 자위를 한다

 

이건 헤엄이야,

 

우리는 일주일 뒤에 도착한다는 태풍 6호에 대해 이야기한다

당신은 반지하 방은 기압의 영향에 취약하다고 말한다

우리는 가장 먼저 잠겨버릴 거야,

나는 창문을 닫으면 된다고 말한다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수족관을 갖게 될 거야

 

휩쓸린 물고기들을 삼키면 인어가 될 수 있대

끝이 뾰족한 집목이 꺾인 개부둥켜안은 연인기도하는 노인마모된 유리 조각들

우리는 아무것도 구분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인어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갑자기 여섯 번의 이별을 경험하고 싶다고생각했어

변덕에는 이유가 없지

인어가 된 사람은 없지만 맹인이 된 사람은 있으니까

 

태풍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가 우산을 쓴다

 

이건 이불이야,

 

태풍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가 청소를 한다

 

그건 자위야,

 

아침이 되면

우리는 정체 모를 잔해들을 주워 먹을 것이다

여섯 번의 태양이 우리를 건조시킬 때까지

 

당신은 아무런 이유가 되기에 불충분하다

 

 

탈수

 

 

지도를 그려볼까

 

아무리 파문을 그려도 내가 아닌 얼굴이 지워지지 않는 곳에서 우리가 출발했고

모랫바닥 속에 빼앗긴 손과 발이 묻혀 있는 곳에 출구가 있을 거야

 

검은 강물은 최후의 의심처럼 우리를 움켜쥐고

오늘도 담담하게 또 꼬리를 무는 하루가 시작한다

뻗은 온몸이 채 닿지 못하는 곳에 빛이 보이는데

악몽처럼 헛발을 디디면 가라앉은 죄수들은 우리의 발등을 성실하게 닦아낸다

 

버둥거림은 더 깊은 결박으로 굳어간다

막다른 길이 온몸에 끈질기게 달라붙는다

서로를 부둥켜안은 우리에게 이곳의 수심은

빛을 보자마자 시들어버리는 꽃의 무늬를 새긴다

 

언젠가 두꺼운 동앗줄처럼 내리쬐던 무지개 한 줄기를 본 적이 있다

죄수들의 발목에 하나씩 둘러진 무지개빛이

우리의 얼굴을 비춘다아니야,

쳐다보지 마너와 나는 더 이상 이곳에 없는 거잖아

 

헤엄치는 법을 모른 채 검은 감옥 속으로 가라앉던 너와

하루종일 물 냄새가 가시지 않는 두 손을 내려다보던 나

빛에 굶주린 죄수들이 출몰한다는 어귀에서

우리의 시간은 커지지 않는 반달처럼 멈춰버린 걸지도 몰라

 

거품이 이는 너의 까만 머리카락으로 지도를 그려본다

한 잎씩 너의 젖은 몸에 새겨진 꽃잎들을 헤아려본다

온 힘을 다해 꽃눈을 밀어 올리는 겨울나무처럼

내 몸에 옮은 무늬들을 빌어내는 시간

 

미안해

 

벗어나려 할수록 내 발목에 드리우는 무지갯빛

새하얀 죄수들의 손바닥에 조금씩 조여오는데

반달에 가까워질 때까지 나를 놓아주지 않는데

 

숨 막히는 강물의 들썩임을 만져주는 날들

말린 꽃잎에서 꽃나무의 눈빛이 빠져나가듯

너는 여전히 부르튼 아랫배로 모든 물길들을 그러모으고 있을까

 

한 방울씩 내가 스며든다

온몸의 물길들이 잔인한 꽃의 지도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적신호

 

 

빨간색을 구별하게 된 순간부터

아이는 사자

사자는 낙타

 

낙타를 타고 토마토 축제에서 만나요

발바닥이 알록달록해지는 시간

악취 풍기는 거리를 한 입 크게 베어 물면

따뜻함은 비겁함으로,

비참은 거대한 행렬처럼 우리를 쫓아올 거예요

 

붉은 해골 속에 동전들을 차곡차곡 쌓는 소년에게

당신은 구겨진 지폐를 건네고

소년의 뺨에는 꼭깊게 패인 손톱자국

 

무슨 말을 했어요?

 

봄은 눈을 찡그리지 않는다

 

썩은 열매들이 우리의 사막 위로 훨훨

웃음에 대해 생각하면

허벅지가 너무 뜨거워요

토마토처럼 빨갛게

아니 보라색

나는 무언가를 닮아가고 있어요

 

사자의 포효와

광장의 고독에게

 

이곳은 거대한 자궁이에요

 

머지않아 눈이 내릴 거예요

 

토마토 축제에서 만나요

날씨를 구별하게 된 순간부터

우리는 너무나 많은 눈동자 속에 뛰어들었으니

 

그때부터 당신은 포효

포효는 토마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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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소랑 / 1998년 파주 출생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재학 중. 2018년 현대시학》 신인상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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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식 사우나 (외 4)

 

    강상헌

 

 

그 말은 내게 너무 상처라네

자네가 뚱뚱한 만큼 물이 넘치는 것은 사실이 아닌가?

내 뱃속의 잔잔한 물가에는 쪽배 한 척이 떠 있다네 어제는 그걸 타고 크레타섬에 갔지

나는 이만 몸을 닦고 털옷을 구하러 가야겠네 바깥이 춥다고 여기서만 살 수는 없지 않은가 몸에 딱 맞는 옷을 입던 때의 늘씬한 기분이 그립군

그곳의 신전에 오른다는 펭귄을 기다렸다네 해가 지고 눈보라가 몰아칠 때까지 아테네에서 온 이들은 귀가 얼어버린 것도 모르고 술판을 벌이며 떠들더군

자네를 보고 작은 신을 섬기는 작은 인간들의마을에서 왔다고 놀리지는 않던가?

눈이 녹아 다시 눈이 되어 내리는 데엔 사백 년이 걸린다는 나의 말을 듣고 그들은 일제히 눈물을 흘렸다네 눈송이를 뭉쳐 그들의 입속에 일일이 넣어주었지 펭귄이 나타난 건 그때였네 왕관도 봉도 없이

당신들 조상에 비해 당신들이 복 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이들만 남으라는 그의 말을 듣고 우리는 모두 일어나 절을 올렸다네

그러면 자네는 어찌 크레타섬에 남지 않고 돌아왔는가?

뱃속의 세계란 그런 것이네 그가 목청껏 연설하며 튀긴 빨간 침방울이빛나는 루비 결정들로 얼어버린 순간 나는 그것을 모조리 주워 도망쳐야만 했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겠다는 결심이 들었거든

쪽배를 세워둔 물가로 뛰자마자 몸이 너무 무거워 나는 쓰러지고 말았다네 입안에 도는 피 냄새를 맡으며 나도 내 몸집만큼만 살고 싶다고 생각했지

사실 나도 그 자리에 있었다네 뱃속의 자네 혼자만 땀을 뻘뻘 흘리고 있더군 인간들이 연단 앞에서 우글거릴 때 펭귄의 부리 끝에 맺히던 그 마지막무한한 면의 루비가 너무 아름다워 나는 제자리에서 그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네

그렇다면 자네는 어찌 이곳으로 돌아왔는가?

코코레치**를 삼키면 어린 양의 뱃속과 자기 뱃속이 바뀌는 기분이라며 떠들던 자네는 그곳에서 엄청나게 굶주려 보였다네 배고픔의 고통을 잊으려 자넨 뱃속으로 도망갔지만 자네의 몸은 하루 종일 얼음 위를 걸어 크레타섬에 당도했다는 것을……

모두가 떠나도 피를 토하던 펭귄을 수습하며 나는 깨달았다네 벌겋게 물든 그의 가슴에 귀를 대었을 땐 그의 피가 내 귓속으로 흘러드는 소리만 들려왔지

나는 그곳에서 모든 것을 잃었다네 내가 챙긴 루비와 나의 알몸까지도

아테네인들은 온몸이 물살이 되어버린 자네를 주무르며 낄낄거리더군 자네 품속에 가득했던 루비들은 이내 녹아 땅을 멀리 적셔갔다네

마른 나무들에 열매가 열리고 뱃속의 자네는 홀로 씨앗을 모으며 사백 년이 지나기를 기다리고 있다네

무엇을 먹고 살아야 할지 모르겠네 이제 사우나에 앉아 뜨거운 물만 들이키며 이야기들로 배를 채우기에는…… 바깥이 따뜻해지는 데에도 영겁의 시간이 남지 않았는가 혹 지금 자네가 씹고 있는 것이 그 열매라면

나는 자네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음미할 뿐이라네 물속에 물이 흐르듯사우나 안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을 모두 없애버린다면 이 세상에 남는 것도 없을 것이네*** 식전에우리는 어찌 아테네인들을 역겨워하면서 말은 그들과 똑같이 하는가에 대해 이야기해 보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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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안 마요르가비평가에서 변용

** 양의 내장을 요리한 그리스 음식

*** 같은 책에서 변용

 

 

 

동호대교

 

 

지하철 안에 서 있었다

옆에

 

누군가의 품에 안긴 작은 아이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나도 눈을 크게 뜨고

아이의 눈을 바라보다가

 

열차 안이 참 밝구나

 

싶었다

 

열차가 점점 속도를 줄이고

아이와

사람들이

주황빛으로 물들고

 

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열차가 가는 방향으로

강물이 가고

 

건너편 다리

다리들 너머로

해가 떠 있었다

 

눈이 참 부셨다

 

사람들도 같은 풍경을 보고 있었을까

 

열차가 천천히

다리 위에 나를 두고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다리 위에 서서

 

이제

더는 돌아갈 곳이 없겠구나

없구나

 

 

 

나는 집으로 가고 있었다

 

 

보홀*에 가면

 

 

내가 좋아하는 거북이로 태어나야지

 

모래에서 쉬다가

바다에서 쉬다가

 

너는 어디 있을까

너를 찾아야지

 

바나나 모양 도시락 통에

바나나를 넣어 다니는

 

두 발에 오리발을 차고

연두색 바닷속을 거니는

 

산호 숲으로 가득 찬

네 눈앞을 지나가야지

 

물고기

 

한 마리

두 마리

 

내 등에 타고

내가 조금 가라앉고

 

너는 바나나를 꺼내

껍질을 벗기고 있네

바나나가 춤을 추네

 

커다란

작은 물고기 떼가

너를 감싸고 있네

 

나는 숨을 크게 쉬어야지

입을 벌리고

배를 조금 내밀고

 

입에서 흘러나오는

네가 좋아하는

조용한 노래

 

노래 속의

하얀 돌

 

기억나네

 

하얀 라일락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고

숨을 참고 너에게 달려가서

 

너의 코에

코를 대고

숨을 내쉬었던 밤

 

너를 안고

눈을 아주 멀리 감았던

 

꽃들이 하나도 움직이지 않던 밤

 

 

따뜻한 곳에서

따뜻한 곳으로

 

오랫동안 너를 지나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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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에 있는 작은 섬

 

 

돈 레이건

 

 

그는 횟집 앞 수조에 두 손을 집어넣어 연어 한 마리를 잡아 올린다.

그는 올리브 나무 위로 올라가 무언가를 그리워한다.

그는 종종 차에 치인다.

 

나는 화염 앞에서 땀을 흘리고 있다나는 리라를 켠다.

리라가 말한다그는 해바라기가 되어버린 지 오래다해바라기는 밤에도 자란다.

 

나는 봄바람을 일으킨다.

 

승려가 할 일은 다른 게 아니고자기보다 더 좋은 사주를 가진 이를 만나면자기가 처음 찼던 염주를 심어주는 거예요혼자 강릉으로 여행을 가던 날 기차 옆자리에서 그를 만났다.

 

그날 밤 꿈에서 나는 온 친척을 다 보았다강 건너에서 그들은 검은 야상을 입고 춤을 추고 있었다옆에서 엄마가 내 뺨을 갈겼다.

 

꿈에서 깼을 때 내 왼손은 천장을 향하고 있었고손목에는 그가 채워준 염주가 달려있었다.

 

대학교 연극 동아리에서 그와 나는 처음 만났고우리는 동아리의 현학적인 분위기에 염증을 느껴 극단을 차리기 위해 자퇴했다그 이후로 그를 보지 못했다.

 

주차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데 누군가 산으로 가는 길을 물었다나는 버스 정류장을 알려주었고 지나가는 차들 사이에 그가 서 있었다.무언가 아쉽다는 표정이었다.

 

돈 레이건그는 거의 걸어 다니는 예수이다.

 

염주에 아무리 불을 붙여도 갈대밭만 불탈 뿐이다나는 화염 앞에서 땀을 흘리고 있다불타는 갈대밭이 펼쳐진다도망치는 염소들의 눈 속에 파도가 부서진다.

 

극단은 보다 현학적이었으며 분위기를 사랑했다연극만이인간만이나만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걸어온 싸움의 장은 학교 대항 응원전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므로 술자리의 축축하고 정다운 순간 속에 수더분히 녹아들 수 있었다.

 

인간이 웃는 이유는 서로를 아프지 않게 패기 때문이 아니라 웃음이 자신의 아픔을 패는 것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천재란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깨닫는 사람일 뿐이었다고 감가상각의 삶이 술회한다.

 

밤과 바다는 하나가 되어밤이 되어가고 있다.

 

인간만이 달을 만들어 쪽배를 타고 해협을 건넌다중공업에 해박한 공산주의자 입장에서 공화당원은 아주 우습고 사랑스럽다갓 화장한 그의 유골은 아주 뜨거울 것이다허리가 잘록한 이태리식 정장을 입은 그가 물의 빈축을 사며물 위를 걸어가고 있다.

 

걷는다고걷는다고 먹고사는 일이 해결되진 않거든요철의 장막 속으로 화려하게 날아드는 앵무새가 노래한다나는 리라를 켠다리라의 단말마활기찬 이성의 회칼로 아무리 내리쳐도 펄떡일 수 있는 신의 관상용 물고기를 인간은 어느 바다에서 길어 올리는가.

 

 

무주공산無主空山호의 일일

 

 

어찌하여 우리 배는 산으로 가지 못합니까 사공은

불만을 제기한다 돛대에 기대어 조는 그의 사수에게

자신의 세계관을 어필한다 항공모함처럼 원대하지만

바닷길에서 얼쩡거리는 해파리처럼 헐렁하게

사공은 수평선과 나란히 누워 삿대질한다 수평적인

의사결정은 이 배가 내세우는 미덕이고 배에 오른 이들은

확고한 비전의 소유자들 낮에 능력을 증명하기보단

밤에 인성을 인정받는다 술이 서너 배 돌면 사공들의 삿대질에

지구는 네모가 되고 바다는 산이 되고 배는 흥청거리며

뒤집히지만 유일한 현실감각은 격세지감남십자성을 바라보며 그해 봄날

어찌하여 우리 배는 바다에 뜨지 못합니까 산속에서

구름 떠다니는 소리를 들으며 뱃살을 두드리던

사공들이제 네모난 지구의 끝으로 뿔뿔이 흘러가 버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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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상헌/ 1994년 서울 출생고려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재학 중. 2018년 현대시학신인상 당선.




                  ⸺격월간 현대시학》 2018년 11,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