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제4회)전봉건문학상-이승희
물가에서 우리는 (외 2편)
이승희
발을 씻는다
버드나무처럼 길게 발가락을 내어 놓는다
세상의 모든 염려를 품고
울음을 참고 있는 나무들이 있어
오늘 당신과 내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앞이 캄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두 발이 물속에서 한없이 겸손해진다
눈이 없는 물고기처럼 당신의 발등에서 조금 자려고 한다
이제 더는 애쓰면서 살지 말아요
어떻게든 사는 건
하지 말아요
읽지 않아도 되는 세상은 없었으므로
이제 나는 눈 없는 물고기로 살거나 죽거나
당신 옆에 눕고 싶은 것일 뿐
상처 가득한 지느러미가 환해질 때까지
달빛이나 축내면서
어떤 당부도 희미해진 지금
말간 물이 발목에서 뒤척이는 건
마치 어떤 전생같아서
몽유의 날들을 세어 본다
세어 보는 손가락이 붉어져서
물가의 나무들은 속으로만 발가락을 키운다
모든 가구는 거울이다
왜 모든 세간은 나를 바라보는지 생각하는 저녁. 마주 앉아 밥을 먹듯 가구의 물음에 답을 하다 등을 기대면 우린 같은 방향이 되어 전속력으로 내달리는 침묵이 된다. 침묵은 오늘 살아야 했던 이유들을 하나씩 가위표 치며 이런 게 아니라고 말한다.나는 가구들 사이를 오가며 오늘은 어떤 비밀을 풀어 밥을 해 먹나 생각한다. 오늘도 마지막인 것처럼 울었고, 오늘이 마지막이 아니어서 이제 다시 울어야 한다.
가구들이 더 멀리 달아나지 않는 것은 이미 달아나서 여기에 있는 것, 그건 지금 내가 여기 있는 이유와 같은 것. 그것은 마치 물고기가 가만히 멈춰 서서 낯설게 바라보는 어항 같아서 어떤 날은 이야기를 시작하지도 않은 채 잠들었고, 어떤 날은 내게 아예 오지 않았다. 부주의한 날들은 그렇게 흘러간다. 사이는 살면서 생기는 것, 살아서 생기는 것, 가끔 그 사이에 사다리를 가구에게로 건너간다. 그래도 어쨌든 다른 곳으로 가려고 한다. 사이에 또 무수한 사이가 생길 때까지는 말이다.
여름이 나에게 시킨 일
몇 번의 개종 후에 난 더 이상 자라지 않는 발목 속에 짐을 풀었어. 창문 너머로 몇 개의 골목들이 생겨났지만 그건 질문도 대답도 아니었어 지리멸렬이 비로소 자유로워지고 이젠 서로 다른 방향으로 죽어가겠지 보고 싶어 아무도 그립지 않았으므로 여름이잖아 당신에게 주지 못한 머리핀 두 개를 반짝이게 하던 세계는 이제 없지만 누가 지나든 넘어진 채 좀 있어도 되는 슬픔에 대해 천천히 이름을 지어보는 일 녹슬고 멍들어서 이제 좀 자유로워지는 일 내겐 없는 기억들이 되돌아와 내 뺨을 후려칠 때 왜 그래요 라고 말하지 않는 일 다시는 살아나지 않으려 애쓰는 일 그렇게 반짝이는 일 그렇잖아 여름은 울고 나면 친절해지지 수건이 그랬고 책상이 그랬고 폐허조차 그런 걸 그렇게 좀 죽어도 괜찮다면 어떤 눈물이 반쯤 올라오다 멈추어 선 채 몇 개의 계절을 살더라도 그것은 아주 먼 고장에서는 눈이 내린다는 소식을 듣는 것과 같은 것 질문과 대답이 그렇게 여러 해를 떠돌고서야 여름을 기다리곤 했지 그래도 여름이 돌아오지 않으면 기다리는 게 무엇인지 잊으면 되고 눈동자도 없이 손가락도 없이 기린이 되는 노래 바람이 불어서 나는 자꾸만 당신에게 계몽되고 있어 바다 너머로 기린을 보러 가고 싶어 더는 자라지 않는 투명해진 발목이라도 괜찮다면 말이야
⸺제4회 전봉건문학상 수상작
이승희 시집 『여름이 나에게 시킨 일』 (2017. 12)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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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희 / 1965년 경북 상주 출생. 1997년에 《시와 사람》으로, 1999년에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저녁을 굶은 달을 본 적이 있다』『거짓말처럼 맨드라미가』『여름이 나에게 시킨 일』. ‘서쪽’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