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시

강성은 시 보기(4편+12편)

시치 2018. 11. 8. 08:00


강성은 시 보기(4편+12펀)                                                               

           

섣달그믐

 

         

고양이가 책상 위에 잠들어 있다

고양이를 깨우고 싶지 않아

나는 따뜻한 음식을 만들기로 한다

손에 든 감자 자루를 놓치자

작은 감자알이 끝도 없이 굴러 나온다

쏟아지는 감자를

어찌할 수 없어 멍하니 바라보는데

갑자기 라디오가 켜지고

어제 들었던 노래가 흘러나와

밖에선 종말처럼 어두운 눈이 내리고 있고

나는 이제 잠에서 깨버릴 것 같은데

집이 점점 더 깊어지고 있다

고양이가 너무 오래 잔다




 

 

기일(忌日)

 

             

버려야 할 물건이 많다

집 앞은 이미 버려진 물건들로 가득하다

 

죽은 사람의 물건을 버리고 나면 보낼 수 있다

죽지 않았으면 죽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나를 내다 버리고 오는 사람의 마음도 이해할 것만 같다

 

한밤중 누군가 버리고 갔다

한밤중 누군가 다시 쓰레기 더미를 뒤지고 있다

 

창밖 가로등 아래

밤새 부스럭거리는 소리

 





Ghost

 

 

그 여자는

살아 있을 땐 죽은 여자 같더니

죽고 나선 산 여자처럼

 

밤의 정원

이 나무 저 나무를 옮겨 다닌,s 작은 새처럼

밤하늘을 떠다니는 검은 연처럼

 

장갑을 끼면 손가락이 생겨나고

양말을 신으면 발가락이 생겨나고

모자를 쓰면 머리가 생겨난다

 

책을 읽으면 눈이 생겨나고

음악을 들을 땐 귀가 생겨나고

하고 싶은 말이 떠오르면 입술이 생겨나는데

 

그 여자는

살아 있을 때도

죽어서도 입이 있어도

말은 못한다

 

 


카프카의 잠

 

 

 

그는 야근을 하고 있었다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고

 

라고 쓰자 그는 잠이 쏟아졌다

 

그가 책상 위에 쌓인 서류 더미를 뒤적이고 있을 때 누군가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똑똑 이 야심한 시각에 사무실을 방문한 사람이 누굴까 그는 고개를 갸웃하며 걸어가 문을 열어주려 했으나 문은 열리지 않았다 굳게 잠긴 문을 열어보려 애쓰다 이 문은 밖에서 열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곤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유심히 문을 바라보던 그는 조심스럽게 두드려 보았다 똑똑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갇힌 것이다

아무도 없는 밤에

눈 내리는 사무실에

어마어마한 눈이 쏟아지고 쌓이고 있는데

건물이 눈 속에 파묻힐 것 같은데

 

그는 나가지도 못하고

그를 도와주러 올 이 하나 없는 것이다

저 눈을 멈추게도 할 수 없는 것이다

 

흰 눈은 펑펑 쏟아지고

누구도 저 희고 무서운 것을 멈추게 할 수는 없어

 

그가 잠에서 깨어나길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상하게도 그가 삶을 포기하고 나면

죽음을 기다리고 있으면

모든 일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가 잠에서 깨어나는 것이다



추가-12편


겨울밤


 

 

  물레가 돌아간다 투명한 실들이 흘러나온다 구불구불

빛이 흘러나온다 끝을 모르는 실들이 둥글게 감기고 또 감

긴다 물레는 돌아가고 소녀는 비명을 지른다 날카로운 바

늘이 통과한 손끝에선 새빨간 핏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내

몸은 너무 오래 이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밤을 돌리고 달

을 돌리고 죽음을 돌리고 나를 돌려도 창밖은 아직 검고

바람은 성난 개처럼 유리창을 부수네 투명하고 무거운 실

들은 내 발목을 칭칭 감고 놓아주지 않네 물레는 돌아가고

소녀는 비명을 지르고 늙은 여인은 노래 부른다 그녀 몸속

에는 녹슨 바늘이 수천 개 찢기고 너덜너덜해진 그녀 몸속

을 바느질하네 저 무서운 실들은 모두 그녀의 백발이라네

물레는 돌아가고 소녀는 비명을 지르고 늙은 여인은 노래

부르고 창밖에는 눈이 내린다 하얀 머리 위에 또 하얀 머

리칼 하얀 눈 위에 또 하얀 눈송이들 어떤 노래는 백년째

불리워지네 어떤 날개는 백년째 만들어도 완성되지 못하

네 저 보이지 않는 무서운 실들 좀 봐 밤은 탄식하고 어떤

겨울은 백년째 계속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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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딕시대와 낭만주의자들

 

 

뾰족한 첨탑 위에 갇힌 누군가 구름에 편지를 써요

그럴 때 구름은 검은 빗방울을 뚝뚝 떨어뜨리지요

구름의 얼룩진 편지를 읽는 어떤 이들은

울음을 멈추고 검은 강물 속으로 몸을 던집니다

도시엔 무서운 전염병이 돌고

녹색의 박쥐떼가 공중을 날아다닙니다

창백한 입술을 잃은 자들은

곧 두 손과 머리털을 잃고 두 눈알과 심장을 잃었지요

점점 희미해져 우리는 우리를 잃었지요

당신과 나의 비밀 이야기는 입속에서 입속으로

공기와 밤의 중얼거림을 통과하고

얼룩진 편지는 얼룩고양이가 물고 밤의 담장 너머로 사라집니다

우리는 내일의 날씨를 예측할 수 있지만

내일의 악몽을 점칠 수는 없었어요

빗방울은 때로 격렬하게 내립니다

한 방울 뒤에는 수천만 우주의 모든 물방울들이

뾰족하고 오래된 첨탑 위의 편지는

전해오는 이야기 속에서 날마다 더 아름다워져갑니다

우리는 첨탑 위로 답장을 보내는 법을 모르고

얼음이 어는 순간과 얼음이 녹는 순간 슬픔의 음역을

영원히 알 수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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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전야

 

 

자정 너머

TV 속의 성탄절 합창제를 보고 있었다

흑인 남자의 구렁이 같은 입안에서

거룩한 밤이 흘러나왔다

거룩한 밤

아이가 피아노를 치고 있다

멜로디는 아이의 입속에서 굴러나온다

종이피아노는 한번도 소리낸 적이 없다

아이는 피아노 건반을 입속에 구겨넣는다

거룩한 밤

나는 TV 속으로 걸어가 남자의 입을 틀어막았다

내 입속에서 부러진 건반들이 쏟아져나왔다

거룩한 퍼포먼스에 사람들이 기립박수를 쳤다

옆집 아이들과 산타할아버지가 쏟아져나왔다

사람들이 허둥지둥 달아났다

거룩한 밤

거룩한 TV 속에 나 혼자 있었다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건반들이 불협화음을 내며

거룩한 밤을 연주했다

사람들이 눈을 뭉쳐 TV 속으로 던졌다

나는 입속에 손가락을 넣어

검고 하얀 뼈들을 하나씩 뽑아냈다

내 비명이 리듬을 타고 울려퍼졌다

TV 밖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이

거룩한 밤을 합창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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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빛

 

 

등뒤에서 악령들이 내 긴 머리를 땋았다

희고 가녀린 손으로

입속에서 허연 김을 내뿜으며

나는 손가락을 뻗어

뿌연 유리창 위에 밤의 다른 이름들을 써내려갔다

겨울의 다른 이름들을 써내려갔다

나의 다른 이름들을 써내려갔다

창밖으로 몽유병의 신부와 들러리들이 맨발로 흰 드레스를 끌며 나타났다 사라졌다

어두운 거리는 밤새 골목을 만들었다가 숨겼다

어째서 머리칼은 계속해서 자라고 창밖의 폭풍은 멈추지 않는 걸까

등뒤에서 악령들이 내 긴 머리를 땋는다

희고 빛나는 물을 뚝뚝 흘리며

낮은 중얼거림으로

어째서 이 밤에는 저 오래된 거리에는

내 몸속에는 불빛 하나 켜지지 않는 걸까

예감으로 휩싸인 계절은 연속상영되고

새들은 지붕 위에서 오래 잠들어 있다

감기약을 먹고 나는 다시 잠들겠지만

먼지는 밤사이 도시를 또 뒤덮을 것이고

내가 잠들면 시작되는

이 겨울밤의 자막은

내가 쓴 이름들과 기호들과

본 적 없는 빛의 알 수 업는 조합

나는 끝내 읽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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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인은 연애처럼 연애는 살인처럼*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야 누군가 길에 내놓은 의자는 목

이 긴 여자처럼 혼자 서 있다 골목을 돌면 또다른 골목이

나타나고 나는 내 얼굴이 기억나지 않아 상점의 유리를 쳐

다본다 투명하고 희마하게 우리는 닮아 있어 너는 잠든 내

얼굴을 쳐다보기도 하는 것일까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야

창백한 인형들이 줄지어 약국으로 들어간다 검은 새들이

유리문을 쪼아댄다 어둠이 이 거리를 우주 저 먼 시간으로

옮겨놓을 때까지

 

  너를 읽다가 너를 베고 누웠다 눈을 뜨고 감는 사이 어

쩌면 이것은 우아한 카니발리즘의 세계 내가 너를 씹어먹

고 네가 나를 흡수하고 서서히 가늘고 희미해져가고 말라

가고 뼈만 남는다 우리는 가장 가벼운 책이 되고 싶었지

바람이 불면 한 장씩 날아가 침묵에 이르는,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다 낮잠에서 문득 깨어나 팔을 깨물어본다 좀비

가 된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꿈의 어떤 장면에서는 비가 내리고 나는 우산도 없이 달

린다 어떤 사람에게 나는 죽을 때까지 한 가지의 인상으로

존재할 것이다 나는 달린다 뼈들이 부딪혀 경쾌한 소리를

낸다 한밤중에 내리는 빗소리처럼

 

 

* 트뤼포가 히치콕의 영화에 대해 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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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음나라 여자들

 

 

  엄마는 죽은 할머니의 스웨터를 풀어 우리의 스웨터를

짰다 할머니는 이렇게 냄새나는 스웨터를 입고 다녔어 우

리가 이 스웨터를 입지 않으려고 삼년 동안 가출한 걸 할

머니는 알까 비닐옷만 입고 다닌 걸 할머니는 알까 우리는

삼년 동안 빈 칼집만 차고 다니거나 이 빠진 칼로 새를 토

막내는 사람들을 보았다 공원에서 쥐들에게 빵을 나눠주

고 쥐들이 남긴 것을 먹는 사람을 보았다 바람에 날아가는

헐렁한 모자를 쫓느라 우리는 맨발로 눈 쌓인 산을 일곱

개나 넘었다 우리는 추웠어 우리는 따뜻한 털가죽을 갖고

싶었다 엄마는 스웨터만 잔뜩 짜놓고 죽었다 우리는 비닐

위에 냄새나는 스웨터를 입었다 죽은 할머니의 스웨터를

입었지만 일년 내내 동상에 걸렸다 검은 발에서 시퍼런 피

가 뚝뚝 흘러내렸다 우리는 죽은 엄마의 스웨터를 풀어 우

리의 발을 짠다 엄마는 이렇게 냄새나는 스웨터를 입고 다

녔어 엄마도 우리처럼 발이 시렸을까 엄마도 우리처럼 피

를 흘리면서도 뜨개질을 멈추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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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 몽유

 

 

정수리의 태양이 일순간 검게 변해 흘러내리는데

잠든 아이들의 눈꺼풀을 나뭇잎처럼 똑똑 따는데

나쁜 구름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데

잠옷 차림의 나는 운동화 끈을 씹으며 다리 위를 걸어간다

이곳은 마녀의 젖꼭지처럼 추워

잠옷 속으로 얼음 손가락들이 들어왔다 이내 녹아지고

다리 위로 계절들은 달려가고 애인들은 흩어지고

나는 열두살 때 입었던 잠옷을 입은 채로 다리 위를 걸어간다

가로등 아래 반짝이는 동전들

늙은 개가 투명한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 작은 눈 안에서 나는 개와 입맞춘다

청소부의 커다란 빗자루가 내 맨발을 부지런히 쓸어내린다

강물 위로 물고기의 붉은 눈알이 떠오른다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는 자장가를 부르며 나는 다리 위를 걸어간다

바닥에 흘러내린 검은 태양이 자꾸만 내 뒤를 따라온다

다리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다시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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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호주머니 속의 산책

 

 

손이 시려서 너의 호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눈이 펄펄 날리고 있어서

나의 한 손을 거기 넣었다

그 캄캄한 곳에 너의 손이 있어서

나의 한 손을 거기 넣었다

그날 우리는 걸어서 어디로 갔나

 

두근거리는 손 때문에 우리는 걷고 또 걸었다

흰 눈이 내리는데 햇빛이 환한데

낯선 곳에서 길을 잃었는데

심장이 된 손에 이끌려

우리는 쉬지 않고 걸어서 어디로 갔나

 

우리는 발걸음을 멈춘 적이 없는데

우리는 잡은 두 손을 놓은 적이 없는데

호주머니 속에서

불안은 지느러미를 흔들며 헤엄쳐다니고

그림자로 존재하는 식물들이 무서운 속도로 자라났다

우리 두 손은 검게 썩어들어갔다

 

어째서 너의 손은 이토록 비릿하고 아름다운가

우리는 말하지 않았다

검은 피가 흘러나와 우리 발목을 적실 때에도

우리는 이토록 생생한 봄을 상상했다

 

언젠가 우리는 각자 다른 계절을 따라 사라졌지만

호주머니 속에는 아직도 폐허의 공터에

날카로운 손톱으로 서로를 깊숙이 찌른 두 손이

펄펄 날리는 흰 눈을 맞고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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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

 

 

잠든 사이 붉은 가로등이 켜졌다

붉은 가로등이 켜지는 사이 달에 눈이 내렸다

달에 눈이 내리는 사이 까마귀가 울었다

까마귀가 우는 사이 내 몸의 가지들은 몸속으로만 뻗어갔다

몸속에 가지들이 자라는 사이 말[]들은 썩어 버려졌다

말들이 썩어 버려지는 사이 나는 구두 위에 구두를 또 신었다

구두를 신는 사이 겨울이 지나고 여름이 왔다

여름이 오는 사이 도시의 모든 지붕들이 날아갔다

길들이 사라지는 사이 지붕을 찾으러 떠났던 사람들은 집을 잃었다

그사이 빛나던 여름이 죽었다

여름이 죽는 사이 내 몸속에선 검은 꽃들이 피어났다

검은 꽃이 피는 사이 나는 흰 구름을 읽었다

흰 구름을 읽는 사이 투명한 얼음의 냄새가 번져갔다

얼음 냄새가 번지는 사이 나는 구두 위에 구두를 또 신었다

열두 켤레의 구두를 더 신는 사이 계절은 바뀌지 않았다

구두의 계절이 계속되는 사이

나는 구두의 수를 세지 않았다

구두 속에서 나오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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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홉 개의 달이 떠 있는 밤

 

 

  검은 보자기를 풀었다 아홉 개의 달이 풍선처럼 떠올랐

다 수많은 음들이 떠올랐다 음과 음 사이의 미세한 침묵이

뒤이어 떠올랐다 검은 새가 푸드득 날아올랐다 내가 일곱

살 때 잃어버린 꼬리 달린 언어들이 떠올랐다 아름다운 이

름들이 떠올랐다 심장 없는 인형들이 떠올랐다 눈 내리지

않던 그해 겨울이 떠올랐다 네 귀가 펄럭이던 그 겨울의

방이 떠올랐다 가지를 친 푸른 골목들이 떠올랐다 빛나는

그림자들이 새겨진 기왓장들이 떠올랐다 내가 엎지른 물

들이 떠올랐다 물에 빠져죽은 열한번째 어머니가 떠올랐

다 내 뺨을 찰싹 때리고는 멀어져갔다 모두 달에게 끌려올

라가고 있었다 뒤이어 검은 보자기가 떠올랐다 보자기를

손에 꼭 쥐고 있던 나도 떠올랐다 우리는 투명한 줄에 동

여매진 채로 공중으로 한없이 더 깊숙이 떠올랐다

 

 

          +                      +

 

혼자 있는 교실

 

 

나의 노트 속에는 폴라로이드 같은 안개

안개 속에는 사라졌다 나타났다를 반복하는

밤나무 숲과 국도가 있어요

나는 펼쳐진 노트 속으로 들어가 국도를 따라 걸어갑니다

숲에선 사소한 불빛 하나 나타나지 않고

국도는 물속처럼 어둡고

가끔 죽은 고양이가 느낌표처럼 벌떡벌떡 일어서요

나는 흘러가는 노트 속의 산책자

내 기록들의 방관적 수취인

맨발로 일렁이는 국도 속을 걸어가지요

누군가 책장을 넘겨요

바람이겠죠

혼자 있는 교실엔 늘 바람이 불었어요

밤나무 숲이, 국도가, 내가 흔들려요

국도 저 끝에서 환한 전조등 성난 개들처럼 달려와요

수만의 바퀴들이 일제히 나를 밟아요

몸은 유리알처럼 부서져 느리게 어디론가 굴러가요

문득 가로등이 켜지고

지나온 길마다 붉은 융단이 깔려요

아이들이 깔깔깔 웃으며 박수를 쳐요

선생님이 휘파람을 불어요

바람이 나를 읽어요

바람이 나를 정신없이 넘겨요

아직 씌어지지 않은 페이지까지 읽어요

바람이 나를 지워요

나도 나를 자꾸만 지워요

너덜너덜해진 이 노트의 마지막 페이지는 어디 있는 걸까요

혼자 있는 교실엔 바람이 불고 가끔 비가 내렸어요

나는 말랐다 젖었다

써졌다 지워지며

아무 데도 닿지 않아요

 

 

        +                      +

 

 

음악

 

 

어항 속에서 놀다가 그만 숨 쉬는 법을 잊어버렸습니다

목소리만 존재하는 그가

한 편의 유서를 읽으며

내 머리채를 잡고 물속에서 끌어냅니다

 

 

  <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 중에서, 창비, 2009 

강성은  시인


1973년 경북 의성 출생.

2005문학동네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 『단지 조금 이상한Lo-f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