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장옥관 시모음
호수/장옥관
그 귀는 수평이다 너무 큰 귓바퀴다
뭉쳐졌다 풀리는 구름의 뒤척임을 듣는다 여뀌풀씨 터지는 소리를 삼킨다 미끄러지는 물뱀의 간지럼도 새긴다
소리의 무덤이다 콩죽 끓듯 빠져드는 빗방울 깨물며 소리를 쟁인다 소리가 동심원을 그리며 번져나가는 걸 본다 잎새들 입술 비비는 소리가 나이테를 그리듯
모로 누워 베개에 귀 붙이면 부스럭부스럭 뒤척이는 소리 쉰 해 동안 내 몸으로 빠져든 온갖 소리들 속삭이는 소리 숨 몰아쉬는 소리 울부짖는 소리 숨죽여 우는 소리.......
들여다보면 소리들 삭아 부글거리는 검은 뻘
호수가 얼음 문 닫아걸 듯 나 적막에 들면, 빠져든 소리들은 다 어디로 새어나갈까 받아먹은 소리 다 내뱉으면 그게 죽음일까 들이마신 첫 숨 마지막으로 길게 내뱉듯이
鵲巢感想文
화자는 호수를 바라보고 있다. 호수를 바라보며 저것이 아주 큰 귓바퀴 보듯 한다. 호수가 자연의 소리를 다 주워 담듯, 우리의 귀도 그렇다. 오십 년간 들었던 걸 첫 숨 마지막으로 길게 내뱉으면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것인가 하며 이야기한다.
화자는 그간 들었던 소리가 삭아 부글거리는 것이 마치 검은 뻘 같다가고 한다. 비유와 색감을 본다. 그리고 잠잠히 고여있는 호수를 본다. 화자의 귀를 본다.
한 주일, 하루가 갔다. 오늘은 화요일이다. 아침나절 끄무레한 날씨 속에 바람도 좀 불더니만 비가 내린다. 주절주절 가랑비처럼 내린다. 생두가 들어왔다. 저것이 또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다. 콩이 얼마나 많은 사람의 입을 즐겁게 할 것인지,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낳을 것인지는 모르겠다. 하여튼, 저 콩이 곳곳 잘 나갔어 나의 이야기도 잘 풀었으면 좋겠다.
춤 - 장옥관
흰 비닐봉지 하나
담벼락에 달라붙어 춤추고 있다
죽었는가 하면 살아나고
떠올랐는가 싶으면 가라앉는다
사람에게서 떨어져나온 그림자가 따로
춤추는 것 같다
제 그림자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그것이
지금 춤추고 있다 죽도록 얻어맞고
엎어져 있다가 히히 고개 드는 바보
허공에 힘껏 내지르는 발길질 같다
저 혼자서는 저를 드러낼 수 없는
공기가 춤을 추는 것이다
소리가 있어야 드러나는 한숨처럼
돌이 있어야 물살 만드는 시냇물처럼
몸 없는 것들이 서로 기대어
춤추는 것이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나를 할퀴는
사랑이여 불안이여
오, 내 머릿속
헛것의 춤
고등어가 돌아다닌다 - 장옥관
고등어가 공기 속을 유유히 돌아다닌다
부엌에서 굽다가 태운 고등어가
몸을 부풀려
공기의 길을 따라 온 집 구석구석을 돌아다닌다
반갑지도 않은데 불쑥 손목부터 잡는
모주꾼 동창처럼
내 코를 만나 달라붙는다 미끌미끌한
미역줄기 소금기 머금은 물살이 문득 만져진다
고등어가 바다를 데리고 온 것이다
이 공기 속에는
얼마나 많은 죽음이 숨겨져 있는가
화장장 굴뚝에서 뿜어져 나오는
이름과 이름들
황사바람에 섞여 있는 모래와 뼛가루처럼
어딘가에 스며 있는 땀내와 정액,
비명과 신음
내 코는 고등어를 따라
모든 부재를 만난다
부재가 죽음 속에서 머물고픈 모양이다
죽음이 참 깨끗했다 - 장옥관
죽은 매미를 주웠다
죽음이 참 깨끗했다 소리만 없을 뿐 그 모습 그대로 고스란했다 얼마나 머물다 간 걸까 내 귓바퀴 속
소리의 무덤을 만들고 사라진
찰나를 향한 여백뿐인 삶
그래서 그 가파른 울음소리, 짝퉁 비아그라 사서 박카스 아줌마 만나는 노인들처럼 갈급했던 걸까 돌아보니
벚나무 둥치에 소복하게 달라붙은 허물들
벗어놓은 몸이 고스란하다
그 아래 배터리 다 된 시계처럼
초침 멎은 검은 시간들
우듬지엔 아직도 푸른 불길 치솟는 울음소리
저 울음 그치면 울던 그 자세 그대로 툭 굴러떨어질 것이다 플러그 뽑은 티브이처럼 깨끗한 죽음
무밭에 서리 내리듯 녀석의 성(性)은 사그라질 게다
여운도 없이 여음도 없이 칼로 벤 자리
나도 따라 바라본다
녀석이 마지막 눈길 던졌던 그곳을
낮달 - 장옥관
재취 간 엄마 찾아간 철없는 딸처럼, 시누이 몰래 지전 쥐어주고 콧물 닦아주는 어미처럼
나와서는 안 되는 대낮에
물끄러미 떠 있다
떠올라서는 안 되는 얼굴이, 밝아서 보이지 않는 얼굴이, 있어도 없는 듯 지워져야 할
얼굴이 떠 있다
화장 지워진 채, 마스카라가 번진 채
여우비 그친 하늘에
성긴 눈썹처럼, 종일 달인 국솥에
삐죽이 솟은 흰 뼈처럼
고양이 - 장옥관
손가락으로 높이를 가리켰다
내 키를 뛰어넘은 높이에 새겨진 선명한 발톱 자국
베란다 문짝을 긁고 유리창에 머리 부딪치며 밤새 울부짖었던 몸부림을 보여주었다
뻗대는 딸아이 겨울 달래 떠맡긴 고양이
하루 만에 찾아 돌아오는 길
뒷좌석 가방에 든 고양이가, 한 살밖에 안 된 어린 고양이가 오랜 침묵 끝에
순한 울음으로 이야옹…… 소리를 냈을 때
아내와 나는 마침내 나쁜 사람이 되고 말았다
맡을 사람 다시 수소문해 가방째 던져주고 돌아오는 청도 들판
코스모스 꽃포기에 밀린 오줌 밀어내다가
문득 든 생각,
그것이 갈애(渴愛)의 높이였음을
안기고 싶다고, 팔뚝에 매달려 잠들고 싶다고, 제발 문 좀 열어달라고
제 키의 열 길을 뛰어오른
간절함의 높이
보일러 뜨겁게 돌아가는 방 바깥에서 밤새 울부짖었을 추위처럼,
안에서는 결코 알 수 없는
그 시리디시린 외로움의 깊이였음을
북대(北臺)* - 장옥관
그 겨울 나는 북벽에서 살았다
얼어붙은 북극 바다를 깨고 나가는 쇄빙선처럼 깎아지른 바위에 얼굴을 묻고 살았다
밤마다 산돼지 울음소리 깊은 골짜기를 달리고
손마디 꺾으면 뒷산 상수리나무 굵은 가지가 툭, 툭, 부러졌다
잔등에 내리는 싸락눈을 맞으며
여물 씹는 늙은 소
긴 속눈썹에 맺히던 물방울
두터운 외투를 입고 밤은 서둘러 산을 내려오고 며칠째 내리는 폭설에 마을은 갇혀
손발 없는 전봇대만 끊어진 길을 이어냈다
발진처럼 부풀어오른 청춘은 가려움만 더해 종이 위 활자는 절뚝거리며 무릎을 꿇었고
얼어붙은 잉크병을 가스라이터로 녹일 때
파란 불꽃이 너인가도 했다
정신은 더욱 맑아져 온몸 뼈마디 관절마다 찬 샘물이 솟았고 허기 견디다 못해
고드름을 잘라 어둠 깨트리면 이윽고
여명이 핏물처럼 번져나왔지
절벽으로 기어코 기어오른 자작나무, 그가 움켜쥔 북벽의 화강암을 쇄빙선처럼 이마로 깨며 나는
바위의 황홀한 가족이 되고 싶었다
* 오대산 다섯 고봉 중 북쪽 봉오리. 김도연 작가의 소설 「북대」에서 운(韻)을 얻었다.
- 시집 『그 겨울 나는 북벽에서 살았다』(문학동네, 2013) 중에서
* 장옥관 : 1955년 경북 선산 출생. 1987년 『세계의문학』으로 등단했으며, 시집으로 『황금 연못』『바퀴소리를 듣는다』『하늘 우물』『달과 뱀과 짧은 이야기』와 동시집『내 배꼽을 만져보았다』가 있음. 김달진문학상, 일연문학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