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시

[스크랩] 장옥관 시모음

시치 2018. 11. 8. 07:27

 

호수/장옥관



    그 귀는 수평이다 너무 큰 귓바퀴다

    뭉쳐졌다 풀리는 구름의 뒤척임을 듣는다 여뀌풀씨 터지는 소리를 삼킨다 미끄러지는 물뱀의 간지럼도 새긴다

    소리의 무덤이다 콩죽 끓듯 빠져드는 빗방울 깨물며 소리를 쟁인다 소리가 동심원을 그리며 번져나가는 걸 본다 잎새들 입술 비비는 소리가 나이테를 그리듯

    모로 누워 베개에 귀 붙이면 부스럭부스럭 뒤척이는 소리 쉰 해 동안 내 몸으로 빠져든 온갖 소리들 속삭이는 소리 숨 몰아쉬는 소리 울부짖는 소리 숨죽여 우는 소리.......

    들여다보면 소리들 삭아 부글거리는 검은 뻘

    호수가 얼음 문 닫아걸 듯 나 적막에 들면, 빠져든 소리들은 다 어디로 새어나갈까 받아먹은 소리 다 내뱉으면 그게 죽음일까 들이마신 첫 숨 마지막으로 길게 내뱉듯이


鵲巢感想文
    화자는 호수를 바라보고 있다. 호수를 바라보며 저것이 아주 큰 귓바퀴 보듯 한다. 호수가 자연의 소리를 다 주워 담듯, 우리의 귀도 그렇다. 오십 년간 들었던 걸 첫 숨 마지막으로 길게 내뱉으면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것인가 하며 이야기한다.
    화자는 그간 들었던 소리가 삭아 부글거리는 것이 마치 검은 뻘 같다가고 한다. 비유와 색감을 본다. 그리고 잠잠히 고여있는 호수를 본다. 화자의 귀를 본다.

    한 주일, 하루가 갔다. 오늘은 화요일이다. 아침나절 끄무레한 날씨 속에 바람도 좀 불더니만 비가 내린다. 주절주절 가랑비처럼 내린다. 생두가 들어왔다. 저것이 또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다. 콩이 얼마나 많은 사람의 입을 즐겁게 할 것인지,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낳을 것인지는 모르겠다. 하여튼, 저 콩이 곳곳 잘 나갔어 나의 이야기도 잘 풀었으면 좋겠다.

 

 

- 장옥관

 

 

흰 비닐봉지 하나

담벼락에 달라붙어 춤추고 있다

죽었는가 하면 살아나고

떠올랐는가 싶으면 가라앉는다

사람에게서 떨어져나온 그림자가 따로

춤추는 것 같다

제 그림자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그것이

지금 춤추고 있다 죽도록 얻어맞고

엎어져 있다가 히히 고개 드는 바보

허공에 힘껏 내지르는 발길질 같다

저 혼자서는 저를 드러낼 수 없는

공기가 춤을 추는 것이다

소리가 있어야 드러나는 한숨처럼

돌이 있어야 물살 만드는 시냇물처럼

몸 없는 것들이 서로 기대어

춤추는 것이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나를 할퀴는

사랑이여 불안이여

, 내 머릿속

헛것의 춤

 

 

 

 

고등어가 돌아다닌다  - 장옥관

 

 

 

고등어가 공기 속을 유유히 돌아다닌다

부엌에서 굽다가 태운 고등어가

몸을 부풀려

공기의 길을 따라 온 집 구석구석을 돌아다닌다

반갑지도 않은데 불쑥 손목부터 잡는

모주꾼 동창처럼

내 코를 만나 달라붙는다 미끌미끌한

미역줄기 소금기 머금은 물살이 문득 만져진다

고등어가 바다를 데리고 온 것이다

이 공기 속에는

얼마나 많은 죽음이 숨겨져 있는가

화장장 굴뚝에서 뿜어져 나오는

이름과 이름들

황사바람에 섞여 있는 모래와 뼛가루처럼

어딘가에 스며 있는 땀내와 정액,

비명과 신음

내 코는 고등어를 따라

모든 부재를 만난다

부재가 죽음 속에서 머물고픈 모양이다

 

 

죽음이 참 깨끗했다  - 장옥관

 

 

 

죽은 매미를 주웠다

죽음이 참 깨끗했다 소리만 없을 뿐 그 모습 그대로 고스란했다 얼마나 머물다 간 걸까 내 귓바퀴 속

소리의 무덤을 만들고 사라진

찰나를 향한 여백뿐인 삶

그래서 그 가파른 울음소리, 짝퉁 비아그라 사서 박카스 아줌마 만나는 노인들처럼 갈급했던 걸까 돌아보니

벚나무 둥치에 소복하게 달라붙은 허물들

벗어놓은 몸이 고스란하다

그 아래 배터리 다 된 시계처럼

초침 멎은 검은 시간들

우듬지엔 아직도 푸른 불길 치솟는 울음소리

저 울음 그치면 울던 그 자세 그대로 툭 굴러떨어질 것이다 플러그 뽑은 티브이처럼 깨끗한 죽음

무밭에 서리 내리듯 녀석의 성()은 사그라질 게다

여운도 없이 여음도 없이 칼로 벤 자리

나도 따라 바라본다

녀석이 마지막 눈길 던졌던 그곳을

 

 

 

낮달  - 장옥관

 

 

 

재취 간 엄마 찾아간 철없는 딸처럼, 시누이 몰래 지전 쥐어주고 콧물 닦아주는 어미처럼

나와서는 안 되는 대낮에

물끄러미 떠 있다

떠올라서는 안 되는 얼굴이, 밝아서 보이지 않는 얼굴이, 있어도 없는 듯 지워져야 할

얼굴이 떠 있다

화장 지워진 채, 마스카라가 번진 채

여우비 그친 하늘에

성긴 눈썹처럼, 종일 달인 국솥에

삐죽이 솟은 흰 뼈처럼

 

 

 

고양이  - 장옥관

 

 

손가락으로 높이를 가리켰다

내 키를 뛰어넘은 높이에 새겨진 선명한 발톱 자국

베란다 문짝을 긁고 유리창에 머리 부딪치며 밤새 울부짖었던 몸부림을 보여주었다

뻗대는 딸아이 겨울 달래 떠맡긴 고양이

하루 만에 찾아 돌아오는 길

뒷좌석 가방에 든 고양이가, 한 살밖에 안 된 어린 고양이가 오랜 침묵 끝에

순한 울음으로 이야옹…… 소리를 냈을 때

아내와 나는 마침내 나쁜 사람이 되고 말았다

맡을 사람 다시 수소문해 가방째 던져주고 돌아오는 청도 들판

코스모스 꽃포기에 밀린 오줌 밀어내다가

문득 든 생각,

그것이 갈애(渴愛)의 높이였음을

안기고 싶다고, 팔뚝에 매달려 잠들고 싶다고, 제발 문 좀 열어달라고

제 키의 열 길을 뛰어오른

간절함의 높이

보일러 뜨겁게 돌아가는 방 바깥에서 밤새 울부짖었을 추위처럼,

안에서는 결코 알 수 없는

그 시리디시린 외로움의 깊이였음을

 

 

 

북대(北臺) - 장옥관

 

 

그 겨울 나는 북벽에서 살았다

얼어붙은 북극 바다를 깨고 나가는 쇄빙선처럼 깎아지른 바위에 얼굴을 묻고 살았다

밤마다 산돼지 울음소리 깊은 골짜기를 달리고

손마디 꺾으면 뒷산 상수리나무 굵은 가지가 툭, , 부러졌다

잔등에 내리는 싸락눈을 맞으며

여물 씹는 늙은 소

긴 속눈썹에 맺히던 물방울

두터운 외투를 입고 밤은 서둘러 산을 내려오고 며칠째 내리는 폭설에 마을은 갇혀

손발 없는 전봇대만 끊어진 길을 이어냈다

발진처럼 부풀어오른 청춘은 가려움만 더해 종이 위 활자는 절뚝거리며 무릎을 꿇었고

얼어붙은 잉크병을 가스라이터로 녹일 때

파란 불꽃이 너인가도 했다

정신은 더욱 맑아져 온몸 뼈마디 관절마다 찬 샘물이 솟았고 허기 견디다 못해

고드름을 잘라 어둠 깨트리면 이윽고

여명이 핏물처럼 번져나왔지

절벽으로 기어코 기어오른 자작나무, 그가 움켜쥔 북벽의 화강암을 쇄빙선처럼 이마로 깨며 나는

바위의 황홀한 가족이 되고 싶었다

* 오대산 다섯 고봉 중 북쪽 봉오리. 김도연 작가의 소설 북대에서 운()을 얻었다.

 

- 시집 그 겨울 나는 북벽에서 살았다(문학동네, 2013) 중에서

 

 

 

 

 

 

 * 장옥관 : 1955년 경북 선산 출생. 1987세계의문학으로 등단했으며, 시집으로 황금 연못』『바퀴소리를 듣는다』『하늘 우물』『달과 뱀과 짧은 이야기와 동시집내 배꼽을 만져보았다가 있음. 김달진문학상, 일연문학상 등 수상.

 

 

 

 

 

 

 

 

 

 

출처 : Y에게 말걸기
글쓴이 : 지와 사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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