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시

[스크랩] 신용목 시 모음

시치 2017. 11. 15. 22:42

거미줄 / 신용목

 

 

 아무리 들여다봐도 저 지도를 읽을 수 없다


 세월은 잠들면 九天에 가 닿는다
 그 잠을 깨우러 가는 길은 보이는 곳보다 보이지 않는 곳으로 더 많이 향하고
 길 너머를 아는 자 남아 지도를 만든다


 끌린 듯 멈춰 설 때가 있다
 햇살 사방으로 번져 그 끝이 멀고, 걸음이 엉켜 뿌리가 마르듯 내 몸을 공중에 달아놓을 때
 바람이 그곳에서 통째로 쓰러져도 나는
 그 많은 길들을 뿌리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도무지 저 지도를 읽을 수 없다
 작은 것들 날아와 길 잃고 퍼덕일 때, 발이 긴 짐승
 성큼 마지막 길을 가르쳐주는


 나는 너무 큰 짐승으로 태어났다

 


 

저녁에 / 신용목

 


 사선(斜線)으로 떨어지는 저녁, 옆구리에 볕의 장대를 걸치고
 새가 운다
 

 저녁 하늘은, 어둠을 가둔 볕의 철창


 저녁 새소리는,


 허공에 무수히 매달린 자물통을 따느라


 열쇠꾸러미 짤랑대는 소리
 

 저녁 감나무에, 장대높이로 넘어가는 달


 

 

산수유꽃  / 신용목


 
 데인 자리가 아물지 않는다
 시간이 저를 바람 속으로 돌려보내기 전 가끔은 돌이켜 아픈 자국 하나 남기고 가는 저 뜨거움 물집은 몸에 가둔 시간임을 안다


 마당귀에 산수유꽃이 피는 철도 독감이 잦아 옆구리에 화덕을 끼고 자다 나는 停年이 되어 버렸다


 노비의 뜰에나 심었을 산수유나무
 면도날을 씹는 봄햇살에 걸려 잔 물집 노랗게 잡힐 적은 일없이 마루턱에 앉아 동통을 앓고 文書처럼 서러운 기억이 많다


 한 뜨거움의 대를 유배시키기 위해 몸을 키우는 물집 그 수맥을 짚고 산수유가 익는다고 비천하여 나는 어깨의 경사로 비탈을 만들고 물 흐르는 소리를 기다리다 늙은 것이다


 시간의 문장은 흉터이다 둑 위에서 묵은 편지를 태웠던 날은 귀에 걸려 찢어진 고무신처럼 질질 끌려 다녔다 날아간 연기가 남은 재보다 무거웠던가
 사는 일은 산수유꽃빛만큼 아득했으며


 나는 천한 만큼 흉터를 늘리며 왔고 데인 데마다 산수유 한 그루씩이 자랐다

 


 

우물 / 신용목

 

 

 학미산 다녀온 뒤 내려놓지 못한 가시 하나가 발목 부근에 우물을 팠다
찌르면 심장까지 닿을 것 같은
 

 사람에겐 어디를 찔러도 닿게 되는 아픔이 있다 사방 돋아난 가시는 그래서 언제나 중심을 향한다
 

 조금만 건드려도 환해지는 아픔이 물컹한 숨을 여기까지 끌고 왔던가 서둘러 혀를 데인 홍단풍처럼 또한 둘레는 꽃잎처럼 붉다


 헤집을 때마다 목구멍에 닿는 바닥
 눈 없는 마음이 헤어 못 날 깊이로 자진하는 밤은 문자보다 밝다 발목으로는 설 수 없는 길
 

 별은 아니나 별빛을 삼켰으므로 사람은 아니나 사랑을 가졌으므로
 갈피 없는 산책이 까만 바람에 찔려
 

 死火山  헛된 높이에서 방목되는 햇살 그 투명한 입술이 들이켜는 분화구의 깊이처럼
허술한 세월이 삿된 뼈를 씻는 우물
 

 온몸의 피가 회오리쳐 빨려드는 사방의 중심으로 잠결인 듯 파고드는 봄 얼마간
 내 아픔은 뜨겁던 것들의 목마름에 바쳐져 있다 

 


 

갈대 등본 / 신용목

 

 

  무너진 그늘이 건너가는 염부 너머 바람이 부리는 노복들이 있다
  언젠가는 소금이 雪山처럼 일어서던 들


  누추를 입고 저무는 갈대가 있다


  어느 가을 빈 둑을 걷다 나는 그들이 통증처럼 뱉어내는 새떼를 보았다 먼 허공에 부러진 촉 끝처럼 박혀 있었다


  휘어진 몸에다 화살을 걸고 깊은 날은 갔다 모든 謀議가 한 잎 석양빛을 거느렸으니
 

  바람에도 지층이 있다면 그들의 화석에는 저녁만이 남을 것이다
 

  내 각오는 세월의 추를 끄는 흔들림이 아니었다 초승의 낮달이 그리는 흉터처럼
  바람의 목청으로 울다 허리 꺾인 家長
  아버지의 뼈 속에는 바람이 있다 나는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

 

 


사과 고르는 밤 / 신용목

 

 

희디흰 손으로
사과를 고르는 여자 오늘 밤
아이를 가지리
사과 속살같은 애가 서리


청과물상회 앞에 놓인 과일들을
백열등 흰 깃털이 내려와 품어주고 있다
품어 늦도록 부화하고 있다
 

벽에 세워진 리어카 허연
배를 드러내고
헛되이 돌려보는 바퀴처럼


겨울밤 언뜻 눈에 들어온 청과물상회 앞에
그만그만한 무게로 놓여 있다


제 몸으로 무덤을 삼는 영혼들이
무덤을 껴입고 태어나는 아이들이

 

시집 - 그 바람을 다 걸어야한다 (2004년 문학과지성사)

 

 

 

새들의 페루 / 신용목

 


새의 둥지에는 지붕이 없다
죽지에 부리를 묻고
폭우를 받아내는 고독, 젖었다 마르는 깃털의 고요가 날개를 키웠으리라 그리고


순간은 운명을 업고 온다
도심 복판,
느닷없이 솟구쳐오르는 검은 봉지를
꽉 물고 놓지 않는
바람의 위턱과 아래턱,
풍치의 자국으로 박힌


공중의 검은 과녁, 중심은 어디에나 열려 있다


둥지를 휘감아도는 회오리
고독이 뿔처럼 여물었으니


하늘을 향한 단 한 번의 일격을 노리는 것
새들이 급소를 찾아 빙빙 돈다


환한 공중의, 캄캄한 숨통을 보여다오! 바람의 어금니를 지나
그곳을 가격할 수 있다면


일생을 사지 잘린 뿔처럼
나아가는 데 바쳐도 좋아라,
그러니 죽음이여
운명을 방생하라


하늘에 등을 대고 잠드는 짐승, 고독은 하늘이 무덤이다, 느닷없는 검은 봉지가 공중에 묘혈을 파듯
그곳에 가기 위하여


새는 지붕을 이지 않는다


- 현대문학 11월호
―시집 『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
 
 
신자들이 찾아가 영혼을 바치는 인도의 베나레스처럼, 그들은 참으로 먼 곳으로 날아가기 전에 이곳에 와서 그들의 뼈를 버리는 것이다......모든 일에는 과학적인 설명이 있기는 하겠지만 물론 우리는 詩 속에 마음을 묻고 태양과 친구가 되고 바다의 목소리를 듣고 자연의 신비를 믿을 수도 있다. 약간은 시인이 되고 약간은 꿈에 젖고......풍경이란 거의 배반하는 법이 없다. 약간은 시인이 되고 약간은 꿈에......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로맹 가리 作) 중에서

 


 

소사 가는 길, 잠시 / 신용목

 


시흥에서 소사 가는 길, 잠시
신호에 걸려 버스가 멈췄을 때


건너 다방 유리에 내 얼굴이 비쳤다


내 얼굴 속에서 손톱을 다듬는, 앳된 여자
머리 위엔 기원이 있고 그 위엔


한 줄 비행기 지나간 흔적                                       


햇살이 비듬처럼 내리는 오후,
차창에도 다방 풍경이 비쳤을 터이니


나도 그녀의 얼굴 속에 앉아
마른 표정을 다듬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당신과 나는, 겹쳐 있었다


머리 위로 바둑돌이 놓여지고 그 위로
비행기가 지나가는 줄도 모르고


 

 

노을 만 평 / 신용목  

 

 

누가 잡아만 준다면
내 숨 통째 담보 잡혀 노을 만 평쯤 사두고 싶다
다른 데는 말고 꼭 저기 폐염전 옆구리에 걸치는
노을 만 평 갖고 싶다


그러고는 친구를 부르리
노을 만 평에 꽉 차서 날을 만한 철새
한 무리 사둔 친구
노을 만 평의 발치에 흔들려줄 갈대밭
한 뙈기 사둔 친구


내 숨에 끝날까지 사슬 끌려도
노을 만 평 사다가
친구들과 옛 애인 창가에 놀러가고 싶네
 

시집 -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 (2004년 문학과지성사)
 

 

 

화분 / 신용목
             


 어느 날 화분이 배달되었다
 

 나에게도
 땅이 생겼다 부드러운
 흙, 나는
 저기에 묻힐 것이다


 화원 앞을 지나다 보면 유리창 너머
 관짝들이 황홀하게 놓여 있다 아름다운 봉분처럼 자라는 나무들, 꽃들


 스무 평의 적막에도 햇살과 바람이 흠모하듯 스며와
 지금은 저기에 양란이 꽃을 피우고 등 구부린 시간이 신혼처럼 살고 있다


 내 무덤은 향기로울 것이다
 먼 나라의 춤을 푸는 나비처럼은 아니지만, 언젠가 꽃이 진 허공, 그 맑은 높이에 나는
 내 영혼을 띄워둘 것이다


 저 둥�을 안고 기다리면 아프지 않게 늙을 수 있겠다
 수치를 꽃대처럼 비우고 나면
 거친 그리움도 이제는 자연사할 수 있겠다, 있겠다


 어느 날,
 술 취한 발이 화분을 깨뜨리고 갔다


시집  -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 (2004년 문학과지성사)

 

 

 

구름 그림자 / 신용목

 

 

태양이 밤낮 없이 작열한다 해도
바닥이 없으면 생기지 않았을 그림자


초봄 비린 구름이 우금치 한낮을 훑어간다


가죽을 얻지 못해 몸이 자유로운 저 구름
몸을 얻지 못해 영혼이 자유로운 그림자


해방을 포기한 시대의 쓸쓸한 밥때가
 

사랑을 포기한 사람의 눈으로 들어온다
 


 시집 -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 (문학과지성사)

 


 

     화엄사 타종 / 신용목


   
    이 세상 꼴깍 모르고 지나치고 말
    여름 풀꽃들을
    범종 소리가 불러 세워
    산 깊이 하얗게 흩어졌음을
    안다, 이 늦은 시간의 길 끝에
    화엄이 있어 화엄을
    찾는 마음의 그늘맡
    환하게 지우고 가는
    타종, 섬진강 살 같은 그물이 일고
    어머니의 젖꼭지를 떠나온
    입술이 씻겨진다.
    산사는
    산이 품은 그리움.
    자궁으로부터 상속받은 하루하루는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범종의 둘레에 모이는 세월들이며,
    지리산에서
    세속 인연 다 끊고 눈머는
    참나리꽃으로 앉아
    타종의 물결이 만드는 그물에 갇혀
    나 또한 한세상
    모르고 지나갈 걸음
    여기에 머물고 있음을 안다.

 

 시집 -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 (2004년 문학과지성사)
 

 

 

지하철의 노인 / 신용목

 

 

일생을 눈감고 살아 온 사람이
내 앞을 지나간다
그 지팡이 위태로워
잡아주고 싶지만
이미 더는 내려가지 않을만큼
단단하게 바닥에 닿아있었다
보이는 것
너머를
보고 싶어
안으로 깊어졌을
눈, 작은 몸 어디에서 녹아
풍금소리를 만드는지
그가 지날 때마다 노랫소리 떨어져
지팡이가 눌러놓은 자리를 동그랗게 메우고 있었다
계단을 오를 때나
구릉을 지날 때도
나는 발끝을 보지 않았다
가야 할 곳은 언제나 멀리있어
내 속에 노래를 키우지 못했다
폭 크게 서둘던 내 걸음 잠시
찬송가 밑에 세워둘 때
앞발의 뒤꿈치가
뒷발의 앞코를 넘지않으며
나아가는 풍금의 건반이 희다
문득, 세상의 빛이 사라져
모두가 비명을 쏟으며 발을 섞어도
노인은 홀로 유유히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보이는 것
너머를 보면서
노인이 지나간다
사람들은 비명을 안고 잠들어 있다
 

시집 - 그 바람을 다 걸어야한다 (2004년 문학과지성사)
  


    

바닷가 노인 / 신용목

   

 

    할멈의 머리를 감겨주다 한 손 가득 미역을 건져 올렸다
     

    변산 모항서 휴가를 보내던 이틀째 날이었다
     

    두 칸들이 민박을 치는 할멈 거품같이 숨이 가빠 가만  어깨를 잡아준 것인데
    검버섯 목을 긋는 주름에 파도가 살아 뼈마디 암초처럼 만져졌다
     

    죄다 멀리 갔다던 서방들 어디에 수장되었는가 할멈의 몸
    해초가 나고 석화가 피고
    오래 바라본 곳에 수평선이 있다

     
    물때에 바람이 담을 쌓는 마당에 할멈이 미역을 말렸다 머리에 남겨지는 파도의 무늬를 보다

     
    민박의 밤 내내 파선이 되어 가라앉았다
     

    부레처럼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시집 -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 (2004년 문학과지성사)

 

 

 

/ 신용목  

 

 

  바람은 먼 곳에서 태어나는 줄 알았다 태풍의 진로를 거스르는 적도의 안개 낀 바다나 계곡의 경사를 단숨에 내리치는 물보라의 폭포  
  혹은 사막의 천정, 그 적막의 장엄  
  아랫목에 죽은 당신을 누이고 윗목까지 밀려나 방문 틈에 코를 대고 잔 날 알았다  
  달 뜬 밖은 감잎 한 장도 박힌 듯 멈춘 수묵의 밤 소지 한 장도 밀어넣지 못할 문 틈에서 살아나고 있었다 고 고 고 좁은 틈에서 달빛과 섞이느라 바람을 만들고 있었다  
  육체의 틈 혹은 마음의 금  
  그 날부터 한 길 복판에서 간절한 이름 크게 한 번 외쳐보지도 못한 몸에서도 쿵쿵 바람이 쏟아져 나왔다 나와 나 아닌 것 삶과 삶 아닌 것이 섞이느라 명치끝이 가늘게

 

 


다비식 / 신용목

 

 

바위 위에 바위보다 한 발은 더 바다로 나가 석양볕에 늙은 뼈를 태우는 해송을 본다


서해 변산
물 위에,
하늘의 다비식


가지 저 끝에서 타올랐으니 그래서 어두웠으니
휘어진 허리 감고 사리 같은 달과 별 더러 나오리


날마다, 그러나 파도 끝 붉게 젖은 때


또 한 줄 바람을 긋고 갈라지는 채석강

 

 


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 / 신용목


 
  나는 천년을 묵었다 그러나 여우의 아홉 꼬리도 이무기의 검은 날개도 달지 못했다
  천년의 혀는 돌이 되었다 그러므로


  塔을 말하는 일은 塔을 세우는 일보다 딱딱하다


  다만 돌 속을 헤엄치는 물고기
  비린 지느러미가 캄캄한 탑신을 돌아 젖은 아가미 치통처럼 끔뻑일 때


  숨은 별밭을 지나며 바람은 묵은 이빨을 쏟아내린다 잠시 구름을 입었다 벗은 것처럼
  허공의 연못인 塔의 골짜기


  대가 자랐다 바람의 이빨자국이다
  새가 앉았다 바람의 이빨자국이다
 

  천년은 가지 않고 묵은 것이니 옛 명부전 해 비치는 초석 이마가 물속인 듯 어른거릴 때
  목탁의 둥근 입질로 저무는 저녁을
 

  한 번의 부름으로 어둡고 싶었으나
  중의 목청은 남지 않았다 염불은 돌의 어장에 뿌려지는 유일한 사료이므로


  치통 속에는 물을 잃은 물고기가 파닥인다


  허공을 쳐 연못을 판 塔의 골짜기
  나는 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에 물려 있다 천년의 꼬리로 휘어지고 천년의 날개로 무너진다
 

 

 

/ 신용목

 

 

 밤의 입천장에 박힌 잔 이빨들, 뾰족하다


저 아귀에 물리면 모든 罪가 아름답겠다


독사의 혓바닥처럼 날름거리는, 별의 갈퀴


하얀 독으로 스미는 罪가 나를 씻어주겠다

 

 

 

 

 

출처 : 호랑가시 나무를 엿보다
글쓴이 : 과메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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