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시

김해자 시 보기(7편)

시치 2017. 9. 20. 21:35

김해자 시 보기(7편)   



축제/김해자 

 

물길 뚫고 전진하는 어린 정어리 떼를 보았는가

고만고만한 것들이 어떻게 말도 없이 서로 알아서

제각각 한 자리를 잡아 어떤 놈은 머리가 되고

어떤 놈은 허리가 되고 꼬리도 되면서 한몸 이루어

물길 헤쳐 나아가는 늠름한 정어리 떼를 보았는가

난바다 물너울 헤치고 인도양 지나 남아프리카까지

가다가 어떤 놈은 가오리 떼 입 속으로 삼켜지고

가다가 어떤 놈은 군함새의 부리에 찢겨지고

가다가 어떤 놈은 거대한 고래 상어의 먹이가 되지만

죽음이 삼키는 마지막 순간까지 빙글빙글 춤추듯

나아가는 수십만 정어리 떼,

끝내는 살아남아 다음 생을 낳고야 마는

푸른 목숨들의 일렁이는 춤사위를 보았는가

수많은 하나가 모여 하나를 이루었다면

하나가 가고 하나가 태어난다면

죽음이란 애당초 없는 것

삶이 저리 찬란한 율동이라면

죽음 또한 축제가 아니겠느냐

영원 또한 저기 있지 않겠는가

 

 

 

 

 

무화과(無花果)는 없다/김해자

   

 

장대비 속 후줄근한 시위는 끝나고

누군가는 돌아오지 않고 피어나지 못한 채

시들어가는 부용산, 노래 같은 떨거지끼리

미라가 되어버린 생강이며 무화과

안주삼아 술을 마시다 문득

떠오른 남녘 땅 무화과 수

 

어릴 적 마당가 돌담에 단단히 서 있었지

크낙한 잎을 따면 하얀 수액 방울방울 흐르고

퍼렇다 못해 어두운 그늘 깊던,

산수유며 해당화 다 피고 지도록

벌 나비도 찾지 않아 늘 외로워 보이던,

 

꽃 없는 과실이 어디 있으리

조금 늦게 피는지 몰라 수술 그득 채우느라

꽃잎이며 꽃받침 밀어 올릴 틈이 없는지

조금 더 기다려야 하는지도 몰라

꽉 찬 살이 터지며 꽃잎을 터트릴 때까지

과육의 껍질이 꽃을 숨기고 있었던 거라구

 

보아, 십자로 벌어진 과육이 터트린 네 잎의 꽃

열린 꽃잎 사이로 반짝이는 수백의 꽃술을

그러니까 기다림이 꽃잎을 틔우는 거야

천천히 보아, 진한 자홍색의 향기를

裡花果의 속살을

 

 

 

 

 

넝쿨장미/김해자

 

너를 기다리다 동글동글 뭉쳐놓은

주먹밥 같은 하얀 넝쿨 장미 본다

의료보험증 들고 상처 동여맨

종주먹 같은 붉은 넝쿨 장미 본다

미싱사 십오 년에 의료보험도 안 되는

마찌고바 지하공장 드륵드륵 미싱소리 듣다

누런 가시 바짝 세우고 철조망 기어오르는 너를 본다

회충약 털어넣은 것처럼 자꾸 어지러워,

갑작스레 쏟아지는 햇빛에 찡그리며

웃는 너를 본다

 

이 땅에 여자로 산다는 것

저리 하얀 눈물 방울방울 꽃 피우는 것이야

이 땅에 가난한 여자로 산다는 것

저리 붉은 상처 종주먹으로 꽃 틔우는 것이야

제 한몸 못 가누어 담벼락에 기대는 거 아냐

땅을 버리고 싶지 않아서여

봐, 올라서잖아 아무도 모르게

담벼락 넘어 하얀 송이 피워올리잖아

봐, 저렇게 넘어서잖아 한눈 파는 사이

철조망 넘어 붉은 송이 밀어올리잖아

 

 

 

 

 

승천/김해자

 

한 집 건너 지하공장

미싱 소리 드르륵대던 곳

사철 시꺼먼 하늘만 내려앉던 청천동

십자약국 골목 파란 대문

빨간 닭장집 안 녹색 부엌문

방문 벽에 걸린 푸른 작업복

왼편에 하얀 명찰 생산2과 김정례

앉은뱅이 책상 앞에 「해고무효소송 승소판결문」

옆에 방송통신고등학교 교재, 안에 쓰다만 편지

“공부 열심히 해. 돈 걱정 말고 누나만 믿어라”

방문턱에 걸린 두 발

부엌 바닥에 늘어뜨린 긴 머리칼

아궁이에 타다 만 연탄

잠긴 문 바라보다 멈춘

반쯤 열린 눈

밖에 하얀 눈

 

 

 

 

어진내에 두고 온 나/김해자

 

 

지금도 청천동 콘크리트 건물 밖에는 플러그 뽑힌 채 장대비에 젖고 있는 도요타 미파 브라더

싱가 미싱들이 있다 나오다 안 나오다 끝내 끊긴 황달 든 월급봉투들 무짠지와 미역냉국으로

빈 봉지를 우적우적 채우고 있다

 


얼어붙은 시래기 걸려 있는 담 끼고 굽이도는 골목 끝, 아득하고 고운 옛날 어진내,라 불리던

인천 갈산동 그 쪽방에는 연탄보다 번개탄을 더 많이 사는 어린 소녀가 살고 있다 야근 마치고

돌아오면 늘 먼저 잠들어 있는 연탄불과 활활 타오르기 전 곯아떨어지는 등 굽은 한뎃잠이 있

 


삼산동 논 가장자리에 앉혀진 그 붉은 벽돌집에는 아직도 비틀대는 깨진 유리창과 미친 칼을

피해 옆방으로 도망친 늙은 아버지 피 묻은 런닝구와 선홍색 유리조각들이 장롱 속에서 오들

오들 떨고 있다

 


배추밭에 배추나비 한가로이 노닐던 가정동 스레트 집 문간방에는 사흘 걸러 쥐어터지던 젊은

해당화가 살고 있다 지금도 들리는 어린아이 울음소리 듣지 않으려 귀 막고 이불 속에 숨다 저

도 몰래 뛰쳐나가 패대기쳐진 여인과 아이와 한 덩어리 된 어린 여자 눈물방울이 아직도 흙바

닥에 뒹굴고 있을까


교도소가 마주 보이던 학익동 모퉁이 키 낮은 그 집 흙벽과 아궁이가 있던 옛 부엌에서는 전단

지 속 휘어 갈긴 어린 해고자의 메모처럼 ‘배가 고파요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어요’ 호박 몇 쪽

둥둥 떠다니는 밀가루 죽이 아직도 부글부글 끓고 있다

 


효성동 송현동 송림동 바람 몰아치던 주안 언덕빼기 그 작고 낮은 닭장 집 창문마다 한밤중이

면 하나둘 새어 나오는 그 쓸쓸하고 따스한 불빛

 

이상하기도 하지 20년 동안 도망쳐왔는데 아직도 거기에 있다니

내가 떠나온 그곳에 다른 내가 살고 있다니

나 대신 어린 내가 그 자리에 붙박혀 있다니

푸른 작업복에 떨어지는 핏방울

아직도 머리채 잡혀 끌려가는 내가 있다니

앞으로 달려온 줄만 알았는데 뛰어도 제자리

러닝머신 위에서 뜀박질이었다니

숨고 싶어도 숨어 살아도 어진내, 수많은 나,

산속까지 스며들어 끝내 놓아주지 않는다니

 

 

 

 

귀가 심장 옆에 붙어 있었다면/김해자

 

 

말들이 토해지고 있다

머리에 귀를 두 개씩이나 달고서도

들리지 않는 콘크리트 같은 거리에 선 지 오백 날

내 입에선 붉디붉은 말들이 흘러내리고 있다

질러대는 말들이 노을 속으로 곤두박질치고 있다

 

심장 옆에 귀가 붙어 있었다면

쫓기는 말발굽의 말은 아니었으리

멀리서 들리는 신열에 들뜬 신음 소리에도 심장이 팔딱팔딱

문 박차고 너에게 날아갔을 테니

아무도 들어주는 이 없는 컴컴한 방안에서

혼자 울지 않았어도 되리

빈 창자 속을 흐르는 물소리 천둥처럼 울렸겠으니

몇 번씩 찾아갔다 차마 말 못하고 돌아서던 내 등에

눈물 방울져 내리는 소리 들을 수 있었겠으니

고프다 아프다,

말은 필요 없었으리

입 없는 것들의 말도 들을 수 있었겠으니

뽀루룩 뽀루루룩 지렁이 우는 소리

연분홍 치맛자락을 놓친 꽃받침이 암수술 꼭 잡고

눈시울 붉게 흩날리는 소리도 들을 수 있었겠으니

 

저 멀리서 말이 스멀스멀 새어 나온다

첩첩이 서로 포개고 기대고 앉은 먼 산

안개와 구름 속에서 푸른 입들이 딸싹딸싹

깎아지른 벼랑을 지우며 말이 태어나고 있다

입 없는 말

저 희푸른 산의 말속에 들고 싶다

 

 

 

 

니가 좋으면 / 김해자

 

 

시방도 가끔 찾아와 나를 물들이는 말이 있다

두레박 만난 우물처럼 빙그레 퍼져나가는 말

니가 좋으면 나도 좋아,

전생만큼이나 아득한 옛날

푸른 이파리 위에 붉은 돌 찧어 뿌리고

토끼풀꽃 몇 송이 얹어 머시마가 공손히 차려준

손바닥만한 돌 밥상 앞에서

이뻐, 맛있어, 좋아,

안 먹고도 냠냠 먹던 소꿉장난처럼

이 세상 것이 아닌 말

덜 자란 토끼풀 붉게 물들이던

덩달아 사금파리도 반짝 빛나게 하던

니가 좋은면 나도 좋아,

그게 다인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말

나만 먹고 되돌려주지 못한

붉은 돌에 오소록 새겨진 말이 있다



 

 

김해자

*1961년 목포에서 출생.

*1998년 《내일을 여는 작가》를 통해 등단.

* 시집『무화과는 없다』,『축제』


*제8회 '전태일문학상'과 2008년 '백석문학상' 수상.

*현재 진보생활문예지 「삶이 보이는 창」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