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파주에게 (외 2편) / 공광규
파주에게 (외 2편)
공광규
파주, 너를 생각하니까
임진강변 군대 간 아들 면회하고 오던 길이 생각나는군
논바닥에서 모이를 줍던 철새들이 일제히 날아올라
나를 비웃듯 철책선을 훌쩍 넘어가 버리던
그러더니 나를 놀리듯 철책선을 훌쩍 넘어오던 새떼들이
새떼들은 파주에서 일산도 와보고 개성도 가보겠지
거기만 가겠어
전라도 경상도를 거쳐 일본과 지나반도까지 가겠지
거기만 가겠어
황해도 평안도를 거쳐 중국과 러시아를 거쳐 유럽도 가겠지
그러면서 비웃겠지 놀리겠지
저 한심한 바보들
자기 국토에 수십 년 가시 철책을 두르고 있는 바보들
얼마나 아픈지 자기 허리에 가시 철책을 두르고 있어 보라지
이러면서 새떼들은 세계만방에 소문 내겠지
한반도에는 바보 정말 바보들이 모여 산다고
파주, 너를 생각하니까
철책선 주변 들판에 철새들이 유난히 많은 이유를 알겠군
자유를 보여주려는 단군할아버지의 기획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자꾸 드는군
모텔에서 울다
시골집을 지척에 두고 읍내 모텔에서 울었습니다
젊어서 폐암 진단을 받은 아버지처럼
첫사랑을 잃은 칠순의 시인처럼
이젠 고향이 여행지라는 생각을 하면서
얼굴을 베개에 묻지도 않고 울었습니다
오래전 보일러가 터지고 수도가 끊긴
텅 빈 시골집 같은 몸을 거울에 비춰보다가
폭설에 지붕이 내려앉고
눅눅하고 벌레가 들끓어 사람이 살 수 없는
쭈그러진 몸을 내려보다가
아, 내가 이 세상에 온 것도
수십 년을 가방에 구겨 넣고 온 여행이라는 생각을 하다가
이런 생각을 지우려고
자정이 넘도록 텔레비전 화면을 뒤적거리다가
체온 없는 침대 위에서 울었습니다
어지럽게 내리는 창밖 흰 눈을 생각하다가
사랑이 빠져나간 늙은 유곽 같은 몸을 후회하다가
불 땐 기억이 오래된
컴컴한 아궁이에 걸린 녹슨 솥의 몸을
침대 위에 던져놓고 울었습니다
곤줄박이 심사위원
소백산 구인사 법당에서
어린이 사생대회와 백일장 심사를 하는데
곤줄박이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천장에 매달린 선풍기 덮개 철사를
가는 발가락이 꼭 붙잡고 있다
나는 새 발가락이
깃털이 다칠까 봐 선풍기 스위치를 얼른 끄고 다가가
팔을 저으며 밖으로 내보내려고 하나
꿈쩍하지 않는 새
우리는 그냥 더위를 견디기로 합의했다
법당에 펼쳐 놓은 아이들 그림과 원고지들을 내려다보며
쫑알쫑알 심사하는 새
새는 왕년에 이 절에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쓴
스님일지도 모르겠다
심사위원이 한 명 더 늘어 심사가 잘 끝났다
—시집『파주에게』(2017. 7)에서
-------------
공광규 / 1960년 서울 출생, 충남 청양에서 성장. 1986년 월간 《동서문학》신인문학상과 1987년 《실천문학》복간호에 현장시들을 약력 미상으로 발표. 시집 『대학일기』『마른 잎 다시 살아나』『지독한 불륜』『소주병』『말똥 한 덩이』『담장을 허물다』『파주에게』와 산문집 『맑은 슬픔』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