必死 筆寫
하얀/ 임솔아
시치
2016. 12. 17. 09:07
하얀/ 임솔아
불을 끄니
불을 켜고 있을 때의 내 생각을 누군가
훤히 읽기 시작한다.
낮에 만난 이야기들은 햇빛에 닿아
타버렸다.
베란다의 토끼는
귀가 커다랬고 털이 하얬고 나날이
뚱뚱해졌다.
내가 없는 한낮에
벽지를 뜯고 책상을 갉고 내 운동화를 핥다가 어느 날
죽어버렸다.
나는 입술을 뜯어 먹다가 내 입술에서 배어나오는 피를
빨아 먹었는데 왜 그랬습니까?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살인자는
대답한다. 나는 다른 죽음을 향해
채널을 바꾼다.
불 꺼진 방에
나는 앉아 있다. 아픈 사람처럼 누군가
앓는 소리를 내고 있다.
토끼를 씻어주었던 날 토끼는 죽었다. 나는 두 손으로
누군가의 까만 그림자를 씻어준다.
기억나지 않던 것들이 기억나기 시작한다고
살인자가 대답한다.
불을 켜니
불을 끄고 있었을 때 누군가가 하던 생각을 나는
이어서 하게 되고
우리 건물이
흰 안개에 싸여 있단 걸 나가서야
알게 되었다.
—《현대시학》2017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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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솔아 / 1987년 대전 출생. 한국예술종합학교 서사창작과 재학중. 2013년 〈중앙일보〉신인문학상 「옆구리를 긁다」로 시 당선. 2015년 <문학동네> 제4회 대학소설상 「최선의 삶」 당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