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시

김태정 시 보기(7편)

시치 2016. 11. 7. 13:55

김태정 시 보기(7편)


물푸레나무

 

물푸레나무는

물에 담근 가지가

그 물, 파르스름하게 물들인다고 해서

물푸레나무라지요

가지가 물을 파르스름 물들이는 건지

물이 가지를 파르스름 물올리는 건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어스름

어쩌면 물푸레나무는 저 푸른 어스름을

닮았을지 몰라 나이 마흔이 다 되도록

부끄럽게도 아직 한번도 본 적 없는

물푸레나무, 그 파르스름한 빛은 어디서 오는 건지

물 속에서 물이 오른 물푸레나무

그 파르스름한 빛깔이 보고 싶습니다

물푸레나무빛이 스며든 물

그 파르스름한 빛깔이 보고 싶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빛깔일 것만 같고

또 어쩌면

이 세상에서 내가 갖지 못할 빛깔일 것만 같아

어쩌면 나에겐

아주 슬픈 빛깔일지도 모르겠지만

가지가 물을 파르스름 물들이며 잔잔히

물이 가지를 파르스름 물올리며 찬찬히

가난한 연인들이

서로에게 밥을 덜어주듯 다정히

체하지 않게 등도 다독거려주면서

묵언정진하듯 물빛에 스며든 물푸레나무

그들의 사랑이 부럽습니다

 

 

미황사(美黃寺)


열이레 달이 힘겹게 산기슭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사랑도 나를 가득하게 하지 못하여

고통과 결핍으로 충만하던 때

나는 쫒기듯 땅끝 작은 절에 짐을 부렸습니다

 

세심당 마루 끝 방문을 열면

그 안에 가득하던 나무기둥 냄새

창호지 냄새, 다 타버린 향 냄새

흙벽에 기댄 몸은 살붙이처럼

아랫배 깊숙이 그 냄새들을 보듬었습니다

 

열이레 달이 힘겹게 산기슭을 오르고 있었고

잃어버린 사람들을 그리며 나는

아물지 못한 상실감으로 한 시절을

오래, 휘청였습니다

 

……색즉시고옹공즉시새액수사앙행식역부우여시이 사리자아아시이제법공상불생불며얼…… 불생불멸……불생불멸…… 불생불멸……

 

꽃살문 너머

반야심경이 물결처럼 출렁이면

나는 언제나 이 대목에서 목이 메곤 하였는데

 

그리운 이의 한 생애가

잠시 내 손등에 앉았다가 포르르,

새처럼 날아간 거라고

땅끝 바다 시린 파도가 잠시

가슴을 철썩이다 가버린 거라고……

스님의 목소리는 어쩐지

발밑에 바스라지는 낙엽처럼 자꾸만

자꾸만 서걱이는 것이었는데

  

차마 다 터뜨리지 못한 울음처럼

늙은 달이 온몸을 밀어올리고 있었습니다

그의 필생의 호흡이 빛이 되어

대웅전 주춧돌이 환해지는 밤

오리, 다람쥐가 돌 속에서 합장하고

게와 물고기가 땅끝 파도를 부르는

생의 한때가 잠시 슬픈 듯 즐거웠습니다

열반을 기다리는 달이여

그의 필생의 울음이 빛이 되어

미황사는 빛과 어둠의 경계에서 홀로 충만했습니다

 

 

 

달마의 뒤란

 

어느 표류하는 영혼이

내생을 꿈꾸는 자궁을 찾아들듯

떠도는 마음이 찾아든 곳은

해남군 송지하고도 달마산 아래

 

장춘이라는 지명이 그닥 낯설지 않은 것은

간장 된장이 우리 살아온 내력처럼 익어가는

윤씨 할머니댁 푸근한 뒤란 때문이리라

 

여덟 남매의 탯줄을 잘랐다는 방에

무거운 배낭을 내려놓고 모처럼 나는

피곤한 몸을 부린다

할머니와 밥상을 마주하는 저녁은 길고 따뜻해

이 세상이 이 세상 같지 않고

 

개밥바라기별이 떴으니

누렁개도 밥 한술 줘야지 뒤란을 돌다

맑은 간장빛 같은 어둠에

나는 가만가만 장독소래기를 덮는다

느리고 나직나직한 할머니의

말맛을 닮은 간장 된장들은 밤 사이

또 그만큼 맛이 익어가겠지

 

여덟 남매를 낳으셨다는 할머니

애기집만큼 헐거워진 뒤란에서

태아처럼

바깥세상을 꿈꾸는 태아처럼 웅크려 앉아

시간도 마음도 놓아버리고 웅크려 앉아

차랍차랍 누렁이 밥 먹는 소릴 듣는

 

해남하고도 송지면 달마산 아래

늙고 헐거워져 편안한 윤씨댁 뒤란은

이 세상이 이 세상 같지 않고

오늘밤이 오늘밤 같지 않고

어제가 어제 같지 않고

내일이 내일 같지 않고 다만

 

개밥바라기별이 뜨고

간장 된장이 익어가고

누렁이 밥 먹는 소리

천지에 꽉 들어차고

 



호마이카상

 

이젠 너를 갈아치울 때가 되었나보다

네가 낡아서가 아니야

싫증 나서는 더더욱 아니야

이십년 가까운 세월을 함께해온

네가 이젠 무거워졌다

무서워졌다 나의 무표정까지도 거뜬히

읽어낼 줄 아는 네가,

반질반질 닳아버린 귀퉁이만큼 노련해진 네가.

너를 펼쳐놓는 순간부터

시를 쓸지 책을 읽을지

아니면 밥을 차려 먹을지

내 행동을 점칠 줄 아는 네가 무서워졌다

네 앞에서 시를 쓴다는 것이,

네 앞에선 거짓말을 못한다는 것이 무서워졌다

이십년 전이나 이십년 후나

변함없이 궁핍한 끼니를 네게 보여야 한다는 것이

불편해졌다

책상도 되고 밥상도 되는 네 앞에서

시도 되지 못하고 밥도 되지 못하는

나의 현재가 문득 초라해졌다

시가 밥을 속이는지

밥이 시를 속이는지

죽도 밥도 아닌 세월이 문득 쓸쓸해졌다

이 초라함이,

이 쓸쓸함이 무서워졌다

네 앞에서 발바닥이 되어버린 자존심

아무래도 이 시시한 자존심 때문에

너를 버려야 할까보다

그래 이젠 너를 갈아치울 때가 되었나보다

 

 

 

겨울산

 

한시절 붉고 노란 단풍으로

내 마음 끝없이 일렁이게 하더니

끝없이 일렁여 솔미치광이버섯처럼

내가 네 속을 헤매며

네가 내 속을 할퀴며 피

흘리게 하더니

이제 산은 겨울산이다

너는 먼빛으로도 겨울산이다

 

어느결에 소스라치게 단풍 들어

네 피에 내가 취해 가을이 가고

풍성했던 열애가 가고

이제 우린 겨울산이다
마침내 헐벗은 사랑이다

추운 애인아

누더기라도 벗어주랴

목도리라도 둘러주랴

쌀 한줌 두부 한모 사들고 돌아오는 저녁

내 야트막한 골목길에 멈춰서서 바라보면

배고픈 애인아

따뜻한 저녁 한끼 지어주랴

너도 삶이 만만치 않았으리니

내 슬픔에 네가 기대어

네 고독에 내가 기대어

겨울을 살자

이 겨울을 살자

 

 

배추 절이기

 

아침 일찍 다듬고 썰어서

소금을 뿌려놓은 배추가

저녁이 되도록 절여지지 않는다

소금을 덜 뿌렸나

애당초 너무 억센 배추를 골랐나

아니면 저도 무슨 삭이지 못할

시퍼런 상처라도 갖고 있는 걸까

 

점심 먹고 한번

빨래하며 한번

화장실 가며오며 또 한번

골고루 뒤집어도 주고

소금도 가득 뿌려주었는데

 

한 주먹 왕소금에도

상처는 좀체 절여지지 않아

갈수록 빳빳이 고개 쳐드는 슬픔

꼭 내 상처를 확인하는 것 같아

 

소금 한 주먹 더 뿌릴까 망설이다가

그만, 조금만 더 기다리자

제 스스로 제 성깔 잠재울 때까지

제 스스로 편안해질 때까지

 

상처를 헤집듯

배추를 뒤집으며

나는 그 날것의 자존심을

한입 베물어본다

 

 

  

 

궁핌이 나로 하여

 

몇주째 견뎌오던 보릿고개를 박차고 일어나 다시,

밥이 되고 공과금이 되고 월세가 될 글을 쓴다

 

그동안 글이 되지 않는다고 투덜대면서

비가 오면 비가 와서 안된다고

바람 불면 바람 불어 안된다고

이 핑계 저 핑계로 배가 불러

오래 묵혀두었던 원고뭉치를 꺼내

햇빛에 곧 바스라질 것 같은 원고뭉치를 꺼내

먼지도 털어내고

 

나의 밥줄 286 앞에 앉아

빼고 더하고 곱하고 나누고 엮어

봄나물 다듬듯 글발을 다듬으니

 

웬일인가

그토록 안 받던 화장발이

쥐어짜도 안 나와주던 글들이

시원스레 구토를 하고 설사를 한다

 

이것도 보리고개 덕이라면 덕이겠다

궁핍이 나로 하여 글을 쓰게 하니

궁핍이 글로 하여 나를 살게 하니

가난은 어쩔 수 없는 나의 조력자인가

 

 

   -태정

 

1963년~2011년 서울생, 1991사상문예운동에 <雨水> 6편으로 등단  

시집:"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