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관련글

[스크랩] `온다는 말`과 `말없이`, 그리고 `가장`

시치 2016. 1. 9. 17:53

온다는 말 없이 간다는 말 없이

 

  이병률

 

 

늦은 밤 술집에서 나오는데 주인 할머니

꽃다발을 놓고 간다며

마늘 찧던 손으로

꽃다발을 끌어안고 나오신다

 

꽃다발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할머니에게

 

이 꽃다발은 할머니에게 어울리네요

가지세요

 

할머니는 한사코 가져가라고 나를 부르고

나는 애써 돌아보지 않는데

 

또 오기나 하라는 말에

온다는 말 없이 간다는 말 없이

꽃 향은 두고

술 향은 데리고 간다

 

좁은 골목은

식물의 줄기 속 같아서

골목 끝에 할머니를 서 있게 한다

 

다른 데 가지 말고

집에 가라는 할머니의 말

 

신(神)에게 가겠다고 까부는 밤은

술을 몇 잔 부어 주고서야

이토록 환하고 착하게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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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과 향을 품에 안고 마늘 냄새 속에 살아낸 한 해였다.

우리는 마늘을 까는 할머니이고 술에 취해 꽃을 버리고 돌아가는 취객이다. 시대를 언어로 투시하고 가장 정직하게 현실을 노래하려고 했지만 이 땅의 언어는 어느 때보다 오염된 언어, 폭력의 언어가 난무한 해였다. 마치 창문을 열고 숨을 쉬듯이 문학집배원을 읽어주신 분들과 멀리 버클리에서, 모스크바에서, 마드리드에서 집배원을 기다려 주신 분들께 사랑을 전한다. 환하게 착하게 새해를 기다리며…….

 

  문정(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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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다는 말'과 '말없이', 그리고 '가장'

 

 

  컴퓨터의 <한글> 프로그램은 글쓰기에 무척 편리합니다. 맞춤법이나 띄어쓰기가 잘못 되면 지가 알아서 바로 빨간 밑줄이 그어지니까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기계'에 입력된 프로그램이므로 어떤 한계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시의 제목이 꼭 그런 경우에 해당합니다.

   '말없이'를 국어사전에서 보면  <부사>로 쓰며1」아무런 말도 아니하고. 「2」아무 사고나 말썽이 없이. 라는 뜻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 앞에 꾸미는 말이 온다 해도 부사밖에 올 수 없습니다. 꾸미는 말(관형어)을 그 앞에 쓸 수가 없는 말입니다. 주어 다음에 '말없이'를 쓰는 게 보통이겠지요. 가령 "그는 말없이 돌아섰다." 같은 문장처럼.

  그런데 여기서 '온다는'과 '간다는'에 곧바로 이어질 수 있는 낱말이 있다면 그것의 품사는 무얼까요? '온다는 소식, 온다는 이야기, 온다는 말, 온다는 것, 온다는 그, 온다는 사람...' '온다는' 다음에 이어질 수 있는 건 명사나 대명사만(체언) 가능하지 부사나 부사어를 이어 쓰긴 곤란할 겁니다. 온다는 아주, 온다는 빨리... 등 이건 말이 되질 않지요.(요즘 非文을 좋아해서 아방가르드 시를 쓰는 이상한 시인들은 혹시 이런 문법을 발명하여 사용할는지도 모르겠군요.) 그러므로 "온다는 말"과 "간다는 말"이 정상적으로 쓰는 어법인데 그것을 부정하는 표현을 이어서 쓴다면 당연히 '-말' 뒤에 한 자 띄어서 '없다, 없이...'로 표기해야 할 것입니다.

 

        온다는  말없이  간다는  말없이   ( X )

 

   이건 비록 컴퓨터가 착각하여 빨간 밑줄을 치지 않고 어법에 맞는 양 처리하고 있지만 분명히 틀린 표기입니다. 억지를 써서 저걸 "온다는 고요히"라거나 "간다는 무사히"라고 우겨댈 수는 없지요. 시집 원문에 제대로 썼음에도 불구하고 저 시를 옮기는 과정에서 컴퓨터가 도리도리하는 바람에 저 틀린 표기들이 지금 인터넷 상에서 사방팔방 활개치고 다니는 형국입니다.

 

         온다는  말  없이  간다는  말  없이  (ㅇ)

 

   이렇게 써야 상식적인 어법에 맞는 표기입니다.

   졸시 중에 '빈 손의 기억'이라는 제목의 시가 있습니다. 컴퓨터 <한글>에서 '빈 손'이라고 쓰자마자 컴퓨터는 "너 지금 띄어쓰기가 틀렸다" 고 호통치듯 빨간 밑줄이 죽 그어집니다. 붙여서 쓰는 '빈손'이란 단어는 표준국어대사전에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손. ≒공수11(空手). 돈이나 물건 따위를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상태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을 뜻한다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시에서 돌멩이를 손에 쥐었다가 이제 막 물수제비를 뜨고 난 뒤의 '비어있는 손'이란 의미로 '빈 손'을 쓴 것이었습니다. 융통성을 모르는 컴퓨터를 철석같이 믿는 것도 어리석은 일입니다.

 

                                                 *

 

   요즘 너도나도 다들 틀리게 쓰는 표현을 무심히 지나쳐 다같이 묵인 내지 공인한 것처럼 되어버린 경우도 있지요. 영어의 'best'와 우리말 '가장'은 비슷하지만 용법이 전혀 다릅니다. 우리말에서 '가장' 다음에 '밝다' '빠르다'로 쓰는 대상은 단 하나임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영어식으로 'best 10' 이라 하면 정상급의 10을 말하는 표현.  야구에서 "공을 가장 잘 던지는 투수"라고 말하면 그에 해당하는 투수는 오직 한 사람뿐이지요. 가장 잘 던지는 두 번째 투수라는 표현은 아예 말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가장 잘 던지는 투수"라 하면 둘이 있을 수 없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매우 잘 던지는 투수, 대단히 잘 던지는 투수"라고 한다면 여럿을 말할 수 있겠습니다.

   어떤 평론가가 "그이는 환상적인 시를 가장 잘 쓰는 시인 중 하나이다." 이런 식의 문장을 구사한 것을 읽은 적 있는데, 이건 그러므로 말이 안 되는 헛소리입니다.  유일한 사람 중 유일하다? '가장'에서 우리는 최고, 최대와 같이 단 하나를 생각할 수 있을 뿐입니다. 문법이나 어법 등도 모든 사람들이 두루 지켜야 하는 '법'의 한 가지입니다. 일반적으로 법이라는 개념도 상식을 바탕으로 한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_ 강인한

 

출처 : 푸른 시의 방
글쓴이 : 강인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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