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린 방문기/김종미
기린 방문기/김종미
잘못 만든 가구처럼 불편한 기린이
내가 잡혀 온 우리 집으로
한창 동거 중인 슬픔을 관람하러 왔다
이봐, 난 입장료를 내었다구
구름을 뜯어먹어 본 적이 있는 기린은
슬픔을 면밀히 감상하기 위해
목을 구부렸다
목이 스크린처럼 내려왔으므로
활짝 핀 조명이 갑자기 시들었다
어둠 속에서 기린의 눈만 밝게 슬픔을 지켜보고 있다
사과벌레처럼 움츠린 슬픔이 깜빡인다
모니터 속 커서처럼
깜빡이는 조울증, 편집증, 공황장애, 대인기피증
슬픔은 상영되어야 해
손가락을 움직인 기분이 마침내 발가락을 움직일 때까지
슬픔은 가까스로 모자가 되어 내 머리 위로 기어 올라왔다
차라투스트라가 되어 외치다가 나를 태우고
시속 이백 킬로로 달리다가 내 앙상한 늑골에 꽝 부딪쳐
피 묻은 머리통이 되었다가
마침내 우리 동네를 가장 오래 기억하는 빵집
갓 구운 빵이 되었다
빵 냄새를 풍기며 스크린이 올라가고
시든 꽃들이 화들짝 피어났다
잘 만든 가구처럼 미학적인 기린이
빵을 길게 찢어 내 입에 넣어주었다
내 입 속에 빵을 연주하는 하얀 건반
점점 촉촉하게 점점 축축하게
아주 삼켜버리게
끝내 배설해버리게
<시인의 말>
백두 살에 돌아가신 외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머 리맡에 작은 손거울을 두시고 수시로 들여다보았다. 예 전의 기품 있고 아름다웠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미라처 럼 끔찍하게 깡마른 얼굴을 정말 알아보셨을까? 외할머 니가 보신 것은 정말 자기 얼굴이었을까?
김종미
1957년 부산 출생. 1997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새로운 취미』 『가만히 먹 던 밥을 버리네』 등이 있다. 시산맥작품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