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시

함기석 시 보기(4편)

시치 2015. 8. 21. 01:17

모래가 쏟아지는 하늘 (외 3편)/ 함기석

 

 

 

화장터 도로변에 목련 꽃망울들 싱싱하다

누가 꺼내 달아 놓았을까

하얀 심장들

가지 끝 하늘엔 빈 둥지처럼 떠 있는

친구의 마지막 웃음소리

 

메아리처럼 꽃망울이 터진다

꽃의 육체에 갇혀 있던 문자들이 터져 나와

공기 속으로 흩어진다

언젠가 나도 가야 할 공중의 길

바람에 꽃잎들은 흩날려 공기 속을 떠돌고

홀로 남겨진 아이는 운다

 

아빠와 함께 왔다가

혼자서 돌아가야 하는 목련나무 길

<없음>이라는 말의 있음을 아이의 <눈>에서 보고

<있음>이라는 말의 없음을 뒤집힌 <곡>에서 듣는다

꽃망울 하나가 또 내 심장처럼 터진다

 

굴뚝이 내뱉는 검은 숨을 허공이 마시고 있다

연기와 함께 문자들이

허공의 폐 속 깊이 흡입되어 사라진다

언젠가 나도 가야 할 저 연기의 길

오래전 누군가의 아름다운 육체였을 저 형체 없는

연기들 공기들 빛들

 

노란 나비 한 마리

아이의 머리 위를 아물아물 날고

아이는 목련나무 꽃그늘 속에서 계속 운다

하늘에서 우수수 금빛 모래들이 쏟아진다

나는 말없이 하늘 밖 머나먼 우주를 바라보다가

아이의 젖은 뺨을 닦아준다

 

여린 뺨에 붙은 꽃잎 한 장

그 창백한 우주의 지도에 섬처럼 박혀 있는

모래 한 알, 그 무언의 점을 본다

그 순간

나도 봄도 이 목련나무 꽃길도 이미 <없는 말>이어서

하늘도 땅도 지구도 저 광대한 우주도 모두

한 알의 모래

 

내가 껴안자

아이는 두부처럼 부서지고

하늘 가득 아이의 울음만 팽팽히 커지고 있다

 

 

 

오르간

 

 

 

바다 한복판에 오르간이 환하게 떠 있다

누구의 익사체일까

 

새들이 건반에 내려앉을 때마다

밀물과 썰물이 반음 차로 울리고

 

파도가 모래 해변으로 나와

하얀 혓바닥으로

사람 발자국을 지우는 시간

 

게들이 하늘을 본다

북극성 조등(弔燈)에 환하게 불이 켜지고

원을 그리며 도는 별들 음표들 시간들

 

누가 주검을 연주하는 걸까

건반 사이에서 새들이 날아올라

캄캄한 허공으로 흰 쌀알처럼 흩어지고 있다

 

 

 

힐베르트 고양이 제로와 발발이 π

 

 

 

수학과 이교수를 따라 제로와 발발이 π가 캠퍼스를 걷고 있다

연못 중앙엔 가시연꽃, 잉어들은

빨간 비키니 수영복을 입고 폐곡선 놀이에 빠져 있고

나무는 한쪽 발이 없는 불구의 컴퍼스여서

제로는 누구의 고통도 측정하기 싫은 우울한 짐승이다

 

좀 빨리 걸어라 발발아, 나의 말은 지름이 점점 커져서

넓이를 측정할 수 없는 비문이 되고 있다

교수님 말은 비문도 법문도 아니에요 걸어 다니는 성기예요

코를 킁킁거리며 π는 이교수가 뱉는 말을 핥는다

제로의 그림자 원은 각(角)의 나라로 망명하고 싶다

 

발발아, 인간은 누구나 비문이다

너는 먼지와 거품이고

난 진흙과 한숨으로 이루어진 바퀴고 체인이다

연못의 눈동자에 담긴 구름이 무한히 확장되어 없어지고

원은 자기의 생을 사고의 살인에 허비하고 있다

 

고로쇠나무가 흘리는 수액은

고로쇠나무의 피고 사상이고 가설이고 수식이다

수식은 몸속에서 자라는 뼈, 죽음에 뿌리를 내리는 식물이다

발발아, 너는 너의 죽음을 어떤 수식으로 증명할 거니?

원은 자신을 구성한 같은 거리의 점들을 회의한다

 

교수님, 어떤 이론은 대못이에요

눈동자에 박힌 달이 대낮에 예수처럼 울고 있다

교수님, 보세요 못에 박혀 붉은 녹물이 뚝뚝 흘러내리는 세계

말라죽은 오동나무 밑엔 검은 돌이 우는 흰 그늘

원은 구르며 보이지 않는 발발이의 꼬리 끝을 응시한다

 

무한한 하늘 저편에서 거대한 시계초침이 거꾸로 돌고 돈다

3바퀴 2바퀴 1바퀴 0바퀴 -1바퀴……

연못 중앙엔 폭탄처럼 터진 가시연꽃, 잉어들은

수영복을 찢고 폐곡선을 찢고 까마득한 공중으로 헤엄쳐 오르고

원의 중심 0에서 죽은 새들이 분수처럼 난다

 

 

 

폭풍 속으로 달리는 열차

 

 

 

   열차가 달린다 나는 차창 밖 슬레이트집을 본다 지붕에 서서 나를 바라보는 나를 바라본다 검게 탄 손을 흔들며 우는 일곱의 아이를 본다 하늘에선 방울방울 검붉은 노을이 링거액처럼 떨어지고

 

 

   열차가 달린다 나는 잠든다 파란 빛이 흘러나오는 집으로 들어간다 말들이 묶여 있는 마당에서 사람들이 술을 마신다 상복을 입은 여자가 나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간다 흰 천을 걷고 죽은 노인의 얼굴을 보여준다

 

   아흔살의 나다 그의 뺨을 만지자 천장에서 주르르 모래가 쏟아진다 벽에서 아기의 혀들이 돋아나 뱀처럼 꿈틀거린다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계속 떠든다 나는 초조히 방을 나가려 한다 그러나 문은 밖으로 잠겨 있고 마당에서 취한 사람들이 싸운다 말들이 싸운다

 

 

   눈을 뜬다 열차가 정거장에 멈춘다 얼룩무늬 군복의 하사가 승차한다 미적분 책을 들고 대학생이 승차한다 외눈박이 고양이가 승차하고 종이로 뭉쳐진 아이도 승차한다 탑승객들은 모두 내가 탄 9호실로 온다 모두 나의 얼굴과 똑같다

 

 

   불안하게 반대편 차창 밖으로 눈을 돌린다 검은 눈이 내리는 들판이 보인다 불길에 휩싸인 집들도 보인다 위 공중으로 수많은 레일들이 깔려 있고 열차가 달린다 나를 태운 무수한 열차들이 달린다 폭풍 속으로 폭풍 속으로

 

 

 

                         —시집『힐베르트 고양이 제로』(2015)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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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기석 / 1966년 충북 청주 출생. 1992년 《작가세계》로 등단. 시집『힐베르트 고양이 제로』『오렌지 기하학』『뽈랑공원』『착란의 돌』『국어선생은 달팽이』, 동시집 『숫자벌레』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