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회〈현대시〉작품상 -호랑이 감정 (외 4편)/강 정
제16회〈현대시〉작품상
호랑이 감정 (외 4편)/강 정
다만, 좋은 공기를 만나 숨을 삼켰을 뿐인데
사람 하나가 코로 들어왔다
꿈인지 생시인지
내가 사람인지 짐승인지 혼돈스러운
어느 너른 길의 짧은 오수 속에서
비정과 나른의 통로이거나
호탕과 소심의 갈림길인
참음과 굶주림의 허방을 헤쳐
분내 특출한 여인 하나 숨결에 들어앉아
성성하게 구비진 목젖 위에서 잠든 울음을 요분질한다
포악과 갈증의 무늬를 잠시 여민 채
세상 그늘진 곳에서
순간을 영원 삼아 쉬어가던 몸
잠든 털올들 사이
부대끼는 바람결에 꽃을 매달고 울대를 움켜쥔 이것은
제 살을 쥐어뜯는 몽매 같기도,
더 큰 울음을 내성케 하는 먼 과거의 엄명 같기도 하다
나는 응당 그래야하는 심장의 지령에 따라
사위를 둘러본다
다만 갑자기 어두울 뿐이다
이제, 몸 안의 빛을 꺼내 나를 죽이고
죽인 나를 채찍질해 몸의 이끌림에 투신해야 할 때,
숨겼던 발톱과 이빨이 저만의 생기를 시위라도 하듯
점점 끄무러져가는 노을 아래 더 붉은 촉광으로 망막의 혈기를 끌어올리고
위장은 무슨 쓰다만 碑文처럼 정직하게 비어간다
자신을 죽여 다른 이를 살리는 것이나
자신의 호기로 다른 것을 죽여야 하는 사명이
이토록 뜨겁게 부딪친 적 또 있었을까
나는 크게 숨을 내쉰다
목젖을 지나
허허로운 위장의 내밀한 질서를 토닥이며 낭심을 거머쥔
여인의 기운
콧구멍 속 큰 동굴의 잠을 열고
깊은 숨이 나가자 나는 쓰러진다
쓰러지는 반동으로 내처 어둠 속으로 뛰어든다
멀리 숨죽인 흰 사슴 한 마리 사력과 정성을 다해 밤의 등불을 뒤흔들고
몸 안에서 여인이 해사하게 운다
그 울음을 받아 속으로 삼킨 포효로 세상 중심을 하복부에 담는다
달린다
소리내 울지 않는다
머무르지 않는다
사랑하지 않는다
모든 사랑을 다 거치며 스스로 사라지는
時速의 망각 속에서
나는 혼자 사람의 탈로 세상의 탈을 다 받으려 애쓴다
먼데를 보며 참아내는 울음이
미래에 여인이 울 그 울음의 까마득한 前奏라도 되는 양,
터지면 쇠도 삼킬 내 울음이
행여 칼바람의 破聲으로 여인을 벨까 우려하고 기대하며
—《문예중앙》2014 가을,
《현대시》2014. 10월호 현대시작품상 이달의 추천작
—시집『귀신』(2014)
사슴의 뜨거운 맹점
자꾸 누가 등을 떼미는 듯해서
겁에 질려 쫓긴 아이의 눈으로 집에 들어와 누웠다
창밖으로 검은 길이 뭉툭하다
유리에 비친 동공 속에 웬 사슴이 달린다
사지가 줄창 뜨겁다
몸속에 폐우물 같은 게 고여 있어
황막해진 마음 속곳 벗겨 밀어 넣은 채
사슴의 운동을 좇는다
불을 삼킨 늑대처럼 소리 지르며
얼어버린 물잔을 데우듯
오래오래 사슴을 좇는다
사슴 모양의 불이 창을 뚫고 어두운 길 위로 번진다
입 다문 건물들이 나무로 변한다
밤의 도시가 활활 타오르는 소리
사방으로 뿌려져 뜨거운 길이 되는 늑대 울음소리
욕망과 혈기에 치달았기보다
목이 말라 어둠 저편의 물길을 찾는 소리
사슴은 오래도록 불탄다
불덩이 바깥으로
창의 북쪽 모서리가 녹아내린 자리에 사슴뿔이 돋는다
구름에 한쪽 끝날이 뭉개진 그믐달인 양
이편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되돌아본 방 안에 죽은 짐승의 시체 즐비하다
*
죽은 다음 날이라는 자각이 들었다
건넌방 처녀가 문을 두드린다
유리문에 뜬 처녀의 그림자 뒤에 오래 알고 있던 그가
피 흘리며 울고 있는 아침
건넌방은 사실, 사람이 죽어 비어 있는 지 오래
한밤의 나무들이 잎사귀를 황급히 추스르고는
빠르게 아침 언덕을 향해 걸어 오른다
나는 커튼을 닫는다
환몽 끝의 탁본처럼 커튼에 드리운 사슴의 문양을 종이에 옮겨 그린다
긋는 선마다 서슬 뭉개진 불길이다
나의 이생은 매번 이렇게 유린당한다
그 어떤 슬픔 없이,
좁은 흑점 속에 전신을 말아 넣고 재 돼버린
남루한 화선지 속
저쪽 면의 어두운 점을 이편의 우주라 통칭하며
낙오한 외계인의 밀봉된 기별인 듯
해가 새카맣다
—시집『귀신』(2014)
토끼 소년의 노래
토끼 탈을 쓴 채 벌거벗고 돌아다니던 아이를 봤다
주로 노래를 흥얼거렸다
첫 소절을 신나게 부르면
마지막 소절엔 퉁명스럽게 총을 쏘듯,
차가운 방귀를 뀌었다
슬픈 냄새가 풍겼다
탈 속엔 어떤 얼굴이 들었을까
또는,
토끼는 왜 하필 사람의 몸으로 수난을 당할까
뛰어다니거나 숨거나 귀를 세워 먼 곳의 소식을 엿듣거나……
토끼의 사명을 모두 갖춘 채
아이는 사람이 닿으면 황폐해지는 땅의 기억 속에서
끝끝내 어른의 영토를 거부했다
주로 노래를 부르며
사람의 박자로는 노래일 수 없는 노래를 부르며
첫 소절 다음엔
사람의 감각으로는 헤아리기 힘든
낯선 체향의 메아리가 얼룩처럼 번지는 소리를 껌처럼 질겅거리며
적막했다
토끼의 노래는
아이의 얼굴을 삼켜버린
토끼의 아가리는
나는 귀를 쫑긋 세웠다, 아이처럼,
토끼가 되려 했던,
토끼의 모든 적들처럼
—《유심》2015년 2월호
물 위에서의 정지
날아오르기 직전일 수도
떨어져 내리기 직전일 수도 있다
나는 물을 보고 있었다
그림자와 실체 사이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가라앉는 것과 떠오르는 것 사이의 정물이 되어 있었다
물 표면에 뜬 그림자가 움직인다
지나가는 것일 수도
다시 돌아오는 것일 수도 있다
그림자를 따라 천천히 움직인다
내가 움직일 때
그림자는 고요히 멎은 채
어느 먼 곳의 파도 소리를 이끌고
물 위에 뜬 작은 꽃잎들의 일상 속에서 지분댄다
물 위에서 멎은 것과
물속으로 움직이는 것들 사이에서 울려나오는
깨알 같은 총성
물방울들의 내밀한 화간(和姦)
죽어가는 순간일 수도
다시 깨어 다른 물체가 되는 순간일 수도 있다
바람은 꽃잎에 내려앉아 투명한 옷을 벗는다
꽃이 꽃이라 불리기 전에 태어났던 물고기들이
허공에 멎은 나를 본다
그림자는 그물처럼 물 위를 휘저어
물고기 잇자국 명료한 그날의 해골을 건져 올린다
웃고 있는 흰 꽃이다
—시집『귀신』(2014)
가면의 혈통
가면을 쓰고 노래를 부른다
내 얼굴은 내 바깥에서 가면의 노랠 듣는다
가면의 목소리는 등뒤에서 울린다
천 개의 음색, 천 개의 표정으로
허물 벗겨진 벽 속의 어둠처럼
허공에서 떨어지다 만 구름의 입자처럼
노래가 부푸는 동안
얼굴에서 지워진 소리들이 빛의 입방체로 허공을 메운다
건물 창밖으로 고개 내민 얼굴들처럼
일제히 다른 말을 지껄여댄다
가면 안쪽에 가시가 돋는다
가면을 뚫고 나온 가시 끝에 핏방울이 맺힌다
가면을 벗는다
피투성이로 웃고 있는 가면에서
벌거벗은 여자가 걸어나와 화장을 지운다
여자의 다리 사이로
흰색 빨간색 파란색 검은색 보라색 꽃들이 불붙는다
태어나자마자 가면을 쓴 아이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린다
내 얼굴이 긴 줄에 매달려 허공을 입에 물고 떠 있다
시퍼런 불을 삼킨 붉은 구멍으로 빛난다
—시집『귀신』(2014)
심사위원 _ 원구식, 박주택, 오형엽, 조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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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 / 1971년 부산 출생. 1992년 계간 《현대시세계》로 등단. 시집『처형극장』『들려주려니 말이라 했지만』『키스』『활』『귀신』, 산문집『루트와 코드』『나쁜 취향』『콤마, 씨』등.
—《현대시》2015년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