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특집> e- INTERVIEW 시인 김륭 - ‘절망’이란 고도 위에서 내려다본 ‘절정’ - 한정원 시인
e- INTERVIEW <김륭 시인>
‘절망’이란 고도 위에서 내려다본 ‘절정’
한정원
김륭 시인
미래시학에서 겨울 호부터 선보이는 ‘e-INTERVIEW 시인’ 코너에 김륭 시인을 소개합니다. 시인의 작품세계와 창작의 배경, 주변 생활을 폭넓게 보여줄 수 있는 신선한 페이지가 될 것입니다. 특히 시인이 작품의 뒤 쪽 혹은 행간에 배치한 주관적인 세계관을 이메일이라는 공간 속에서 솔직하고 여유 있게 피력하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질문: 김륭 선생님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지면에서는 많이 만나볼 수 있었지만 직접 뵌 적이 없기 때문에 이메일을 통한 인터뷰는 더 자유롭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선 상투적이긴 하지만 근황부터 말씀해주시죠. 살고 계신 곳이 부산이죠?
-
덕분에 잘 지내고 있어요. 제가 살고 있는 곳은 부산이 아니라 인근 김해시입니다. 율하동이라는 김해 시가지 외곽에 숨어살고(?) 있어요. 우스갯소리를 덧붙이자면 지은 죄가 너무 없어서.^^ 강의 몇 군데 나가면서 두 번째 시집 원고를 마지막 정리중이고 다섯 번째 동시집 원고도 마무리 단계예요.
*질문: 최근의 일부터 여쭤볼까요? 지난 9월에 있었던 <제9회 지리산문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시『달의 귀』외 4편으로 영광을 안으셨는데요, 이 상의 배경을 좀 소개해주시죠. 상금은 5백만 원으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활용하셨는지요.
-
그냥 편하게 써서 여기저기 발표한 작품들이에요. 솔직히 상을 받을 거라고는 생각조차 못했어요. 심사위원들이 제대로 좀 쓰라고 죽비를 내린 것이죠. 선생님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시를 써서 받은 상금은 언제나 적자예요. 술!
*질문: 많은 시인들이 문학상에 응모를 하거나 주관하는 기관의 선별심사에 의해서 상을 받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문학상의 의미를 어디에 강점을 두고 계신지요. 그리고 선생님의 경우, 수상하신 후에 달라진 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
개인적으로 문학상의 의미를 말할 형편은 안 되는 것 같아요. 수상 후 달라진 점이라면 마음이 몸보다 무거워졌다는 것? 더 이상 부끄럽지 않게 제대로 써야겠다는 마음이 이렇게 힘든 건 줄은 몰랐네요.
*질문: 수상작인 『달의 귀』외 4편의 시는 심사위원들로부터 “일상을 훑는 시선은 충분히 감각적이고 눈빛은 다른 말을 할 줄 알며 상상력은 주행하고 있다. 그 언어는 뒤로 갈 때에도 갑갑하지 않으며 나아갈 때에도 투미하지 않고, 속도를 사용한다. 그 묘사는 새로움을 유지하고 서술과 구어 또한 지난 몇 년간 보다 진화했다”라는 평을 들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추구하고 지향하는 시의 세계, 문학의 도달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
이른바 시인에게 부여된 임무중의 하나가 언어가 인간에게 그리 호의적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는데 있다고 전제한다면 이 질문은 매우 당혹스럽습니다. 이를테면 시인의 언어가 세상의 권력과 얼마나 잘 영합하는지를 알고 있다면 더더욱, 그러니까 언어 또한 이 세상에 영주할 권리를 얻어야 한다는 분명한 사실 앞에서 당황할 수밖에 없다는 거죠. 시인이 아니라고 해서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의 모든 사상(事象) 속에는 속절없이 들끓는 언어가 있겠죠. 이런 까닭일 것 같습니다. 가끔씩 세상과 영합하는 대가로 자신의 존재가 매몰되지 않기를 바라는 최초의 인간으로 가장 적게 말해야 할 책임을 스스로 져야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게 제가 가진 능력 밖의 문제라는 거죠. 제 친구가 지난해 말 첫 시집을 내면서 서시에 이렇게 썼어요. “‘그것’에 대하여/ 서투르게 고백할 이야기가 있었다/ 너무 많거나 아니면 너무 적을 수도 있지만/ 말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말하고 싶지 않은 것에 대하여/ 맑음 때문에 흐려진 것에 대하여/ 혹은 세상이란 곳의 슬픈 배치와 사랑이란 위험한 무한분열의 방식에 대하여/ 텅 빈 중심의 빛이신 신의 그 충만함을 곧바로 배반할 게 뻔한/ 나에 대하여!// 시詩여,/ 내 울부짖은들 누가 들어주랴”(「다시, 시詩라는」전문) 이 시집의 평설을 쓰면서 저는 이상하게 이상한 통증이 따라오는 문장이라고 썼어요.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시의 세계라면 절망이란 고도 위에서 내려다본 ‘절정’이 아닐까, 싶어요. 저처럼 능력 없는 인간에겐 도달점이 없는 게 문학이고 시의 세계가 아닐는지요.
*질문: 선생님의 첫 시집 <살구나무에 살구비누 열리고>를 잘 읽었습니다. 이 시집을 보면 시의 오브제가 되고 있는 자연과 사물 그리고 인간 특히 아버지, 어머니, 아내, 딸에 대한 존재가 선명하게 나타납니다. 최현식 문학평론가는 ‘뒤죽박죽 박물지(誌)의 시적 규약과 논리’라는 제목으로 선생님 시 세계를 해설하고 있습니다. 선생님 작품에서 오브제의 준동(蠢動)은 어떤 형태로 와서 발현하는지요?
_
시인의 또 다른 자아로서 이상과 현실의 거리를 끝없이 아파하면서 질문하는 삼투압에 대한 생각을 해본 적이 있어요. 예컨대 내게 주어진 세계에서 끊임없이 바깥으로 분열되면서 ‘불안’과 마주하고 ‘의심’하면서, 스스로 고문하면서 문학 행위 그 자체를 추문화 하고 싶은 욕망이랄까. 인간 특히 어머니, 딸에 대한 존재는 내게 분명 시 이상의 것이지만 제대로 표현해 본적이 없는 것 같아요. 그런 까닭이겠죠. 발현이란 단어 앞에서 부끄럽기 짝이 없네요. 결국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시인의 또 다른 자아로서 저는 스스로 믿었던 사랑에 허를 찔린 것이고, 그 아픔이 빚어낸 아주 투박하고 볼품없는 악기의 형태? 우스갯소리 같지만 시가 나를 참아내느라 참 힘들겠다는 생각이 가끔씩 들어요.
*질문: 세부적인 질문을 드릴까 합니다. 시집에서 가장 빈도가 높았던 시적 단어는 ‘구름’이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김륭 시인이 ‘구름의 시인’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독자를 위해서 ‘구름’의 메타포가 어떤 것인지 친절한 설명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물론 시는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독자들도 알고 있을 겁니다. 그래도…….
-
한마디로 디아스포라(Diaspora)? 상투적인 얘기지만 디아스포라는 ‘흩어짐’의 뜻으로, 팔레스타인 이외의 지역에 살면서 유대적 종교 규범과 생활 관습을 유지하는 유대인을 가리키는 이 단어는 사회-역사적 지평에서만이 아니라 문학에서 빈번하게 다루어지는 문제적 인물들의 현상이죠. 여기서 흩어진 자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는데 하나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정주할 고향을 잃고 뿔뿔이 흩어진 민족이라는 의미이며, 다른 하나는 자기 존재를 그 자체로 조각난 삶의 형태로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자들이라는 의미입니다. 당연히 제 시집 속의 메타포는 후자의 의미로, 우리가 쉬이 경험하거나 도달하기 어려운 삶의 형상인 동시에 역사 속 어디에서나 편재하는 것들로 재발견된다고나 할까요. 제가 소환하고 싶은 디아스포라는 보편화되지 않는 역사에서 배제되고 억압되거나 박탈당한 삶의 양태를 고스란히 지닌 채로 낮은 지점으로만 흩어져 만날 수 있는 사랑으로 문득 발견되거나 발굴될 따름인 것 같아요.
모든 사랑은 꽃의 신경조직과 무당벌레의 눈을 가졌다
*질문: 선생님 시를 관통하는 가족사도 무게 있는 시의 구성요소라고 봅니다. 추측할 수 있는 것은 현재 어머니와 딸과 함께 살고계시지 않나 입니다. 어떤 독자는 선생님 시를 읽으면서 울었다고 하고 또 어떤 이는 재미있어서 깔깔 웃으면서 책을 덮었다고 합니다. <치약의 완성><황태>에서 나타나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미지 그리고 ‘내 하나 뿐인 딸에게 이 시집을 바친다’고 시인의 말에서 밝힌 딸의 사랑, 시의 배후에 숨어있는 아내의 존재는 어떻게 선생님의 인생을 구축하고 있는지 말씀해주시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매우 프라이빗한 질문이지만 작가의 인터뷰에서는 가능한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
정확하게 보셨네요. 딸과 살아요. 물론 딸은 서울서 학교에 다니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께서도 혼자 사시는 게 좋다고 하셔서 저도 홀아비로 빈둥빈둥ㅎㅎ. 고백컨대 아내는 일찍 먼 곳으로 떠났어요. 첫 시집은 거의 가족사와 지극히 개인적인 일상으로 채워져 있어요. 그러고 싶었어요. 가장 가까운 이야기부터 하고 싶었거든요. 제 가족이, 내가 소유한 사랑의 정체나 실체조차 잘 모르는 주제에 거창하고 우주가 어쩌니 저쩌니 하는 건 좀 아니다 싶었거든요. 가장 가까운 데서부터 가장 먼 곳으로 나가보고 싶었어요. 첫 시집에 개인적인 일상만 쑤셔 넣은 까닭입니다. ‘내 하나 뿐인 딸에게 이 시집을 바친다’는 시인의 말은 지금까지 나온 시집과 동시집에 다 들어있어요. 아빠로서의 능력이 없어서 딸에게 해줄 게 말뿐이라는 거죠. 뭐, 좀 더 이야기를 하라면 할 수는 있지만 이쯤에서 그만하는 게 지루하지 않겠네요. 누구에게나 숨기고 싶은 생의 환영(幻影) 같은 게 사랑이 되고 시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 질문: 사족 하나, 선생님 시 중에 “사랑은 짝짓기가 아니죠, 자작극이에요”라는 표현이 있어요. 재미있는 말입니다. 또 “모든 사랑은 꽃의 신경조직과 무당벌레의 눈을 가졌다.”라는 묘사가 있습니다. 선생님의 사랑관은?
-
오래 참아낸 울음이 시가 되는 순간이 있지요. 이를테면 하루하루 눈을 다시 떠야 가능한 ‘생의 투쟁’과, 가망 없음의 절망을 불가능함의 실재로 되살려내는 ‘칸트적 무한판단’으로 명할 수도 없는 사랑의 기록? 그것은 아직도 자신의 부셔버리고 싶은 생을 비춰보는 거울의 마법 같은 것이 아닐까 싶어요. 해서 짝짓기가 아니라 자작극 아닐는지요. 거창하게 사랑관이라고 할 것까지 없지만 굳이 말하자면 꽃의 신경조직과 무당벌레의 눈을 가지긴 했지만 ‘아무도 말할 수 없는’ 아니, ‘아무도 말하지 못한’ 아니, 아무도 말해서는 안 될 것 같은 어떤 삶의 가능성?
*질문: 선생님은 2007년 강원일보 신춘문예에 동시가, 갈은 해에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오셨습니다. 동시집은 이미 네 권을 출간하셨군요. 선생님의 동시를 읽고 있으면 이 작가가 그 김륭 시인 맞나?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됩니다.
시에서 느꼈던 슬픔, 분노, 카타르시스, 관능, 고요한 항변, 연민, 패배자의 울음, 언어의 트위스트 등 솔직한 진술(?)들이 동시를 읽는 순간 다 덮어집니다. 선생님께서는 동시를 먼저 쓰기 시작하셨는지요? 『삐뽀 삐뽀 눈물이 달려온다』『프라이팬을 타고 가는 도둑 고양이』『별에 다녀왔습니다』와 『엄마의 법칙』동시집을 보면서 어느 독자가 맑은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거부 하겠습니까?
선생님의 동시는 어른들이 읽으면 더 좋은 내용인 것 같은데 혹시 어른이나 어린이 독자들에게 바라는 점이 있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아동문학, 특히 동시는 사랑스럽고 단순하고, 알기 쉽게 쓴 짧은 이야기라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이 고정된 시각을 벗어 던지지 못하면 우리 동시문학은 그 근간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어른이 읽어도 재미있고, 몸과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미학적 서사나 언술을 바탕으로 한 상상력, 삶의 경험을 통한 아이러니가 작품 속에 담겨 있어야 한다는 거지요. 처음 동시를 쓸 때 어른작가로서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게 무엇인지 고민한 적이 있어요. 그것은 세상의 모든 아이들이 저만의 코드와 기호를 가진 존재임을 인정해야 하는 것 아닐는지요. 하늘을 번득이는 천둥번개처럼 찰나적인 것은 한순간 무서울 정도의 파괴력을 지니지만 손잡이를 달고 멋진 부채가 된 달을 넘어설 수는 없겠죠. 시가 그렇고 동시가 그런 것 아닐까요.
내가 살아온 폐허가 그저 아름다울 수만 있다면 다행
*질문: 이재복 아동문학 평론가는 선생님의 동시 해설에서 “언어가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날아다닌다. 심각한 존재의 내면도 언어가 경계를 넘어 다니면서 놀이의 공간으로 변환시키는 독특한 상상력의 힘이 느껴진다”고 말했습니다.
선생님께서 생각하는 동시의 문학적 역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작금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아동들의 불안정한 현실과 몰개성화 되어가는 제도 속에서 선생님께서 추구하는 동시는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지 말씀해주시죠.
-
순간적인 재치나 아이디어를 넘어선 의미를 확보하려면 아이들의 현실과 아이들의 내면세계에 대한 성찰과 이성적인 판단. ‘자기 동력’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거예요. 동시를 쓰고 있지만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몸과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수 없는 시는 없을까? 라고 자꾸만 되묻고 싶은 것은 이런 까닭이겠지요. 독자로서의 제 몸과 마음을 움직일 수 있어야만 어른 작가로서 아이들에게 좋은 시를 줄 수 있는 것 아닐는지요. 그러니까 아이들에게 동시를 선물하려는 어른작가라면 지적인 회로와 감각적인 회로가 끊임없이 작동해야 하며, 시에는 늘 긴장이 가득 차 있어야 하는 게 이런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게 문제죠. 선생님의 질문처럼 자본주의 사회에서 아동들의 불안정한 현실과 몰개성화 되어가는 제도 속에서 말입니다. 이건 창작자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의 교육현실과 맞물린 아동문학계 전반의 문제인 것 같아요.
*질문: 몇 년 전 아동문학의 ‘상투성’ 문제에 관한 세미나에서 선생님께서는 “동시의 주인은 어린이가 아니라 어른이다” “어린이의 인식으로서 다가갈 수 없는 삶의 세계를 포착해서 아이들에게 세계에 대한 인식을 확대해줘야 한다”고 피력하셨습니다. 이 문제 역시 앞의 질문과 상통하는 내용인데 부연 설명해주시겠습니까?
-
창비어린이 세미나에서 한 말인데 창작자 입장을 내세운 거예요. 어린이에게 준다고 무조건 쉬워야 한다는 건 어른으로서의 오만 아닐까요. 철학자이기도 한 어느 시인의 말을 빌리면 가르쳐질 수 없는 게 있다지요. 예컨대 아름다움이나 사랑은 말로 지시한다고 해서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누구에게도 가르쳐질 수 없는 이 아름다움이나 사랑은 또한 배울 수 있는 것이지요. 그것은 내가 그것을 직접 보고 그 아름다움을 알아보겠다는 의지와 그 의지를 통한 스스로의 자각으로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라지요. 마르셀 프루스트의 작품들을 분석하는 어느 책에서는 지도(instruction)되지는 않으나 이해(understanding)할 수는 있는 앎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어떤 사물에 대해서 <이집트 학자>가 아닌 견습생은 없다. 나무들이 내뿜는 기호에 민감한 사람만이 목수가 된다. 목수나 의사 같은 이런 천직은 어떤 기호에 대한 숙명이다. 우리에게 무언가를 가르쳐주는 모든 것은 기호를 방출하며, 모든 배우는 행위는 기호나 상형문자의 해석이다. 프루스트의 작품은 추억을 늘어놓는 추억의 전시장이 아니라 기호들을 배워 나가는 과정 위에 건축되어 있다” 그러니까 사물들이 내뿜는 기호에 민감한 사람만이 시인이 된다는 거지요. 어린이의 인식으로서 다가갈 수 없는 삶의 세계를 포착해서 아이들에게 세계에 대한 인식을 확대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시인뿐이라는 거죠. 시보다 동시가 어렵다고 말이 나온 지점이 바로 여기가 아닐까 싶어요.
*질문: 시인들은 시를 쓰기 전 마음을 가다듬을 때가 많습니다. 펜으로 옮기기 전에 자세를 정돈하는 습관이 있는데 선생님께서는 시를 쓸 때와 동시를 쓸 때의 준비 자세가 다르신지요?
-
시를 쓰다가 어린이들이 있는 동시의 세계로 들어가려면 하루나 이틀은 그저 멍한 상태로 시간을 보내야 해요. 동시를 쓰다가 시의 세계로 진입할 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제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겠죠. 동시를 써야 할 때는 몸과 마음 전부를 아이로 만들어야 한다면 이해가 되시겠죠?
*질문: 마지막으로 시인으로서 고민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무엇인지요? 또 희망사항이 있다면?
-
내가 살아온 폐허가 그저 아름다울 수만 있다면 다행이겠는데, 그럴 수 있을까요? 스스로 혁명적 투쟁의 방식으로 살아 숨 쉰다는 것은 뭘까, 하고 고민중이예요. 그러니까 언어의 문제만은 아닐 것 같아요. 돌이킬 수 없는 폐허를 우렁각시처럼 살아내는 가장 아름답고도 뼈아픈 연인에게 바치는 몸과 삶의 방술을 찾아내고 싶다고나 할까요.
*질문: 바쁜 일정 속에서도 많은 질문에 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좋은 작품과 반가운 소식으로 선생님을 뵈었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김륭 근작 시 5편>
사마귀
내 입술을 버리고 당신 입술을 가졌다
눈앞에 펼쳐져있던 모든 길을 먹어치웠다 교미 후 수컷의 머리를 씹는 암컷 사마귀처럼 그렇게 나는 당신에게 못 다한 사랑을 전해드리고자 했지만, 당신의 입술이 내 몸을 꿰매기 시작했다
노랗게 샛노랗게 당신의 입술로 나를 흘리고 간다 나풀나풀 나비의 길이 생겼지만 나는, 나비를 읽을 줄만 알았지 쓸 줄을 몰랐다
태어나 좋은 꿈 한 번 꾸지 못하고 간다 그러니까 나는 저만치 내 무덤 속에서 팔다리를 꺼내는데 사십년이 걸렸다고, 당신의 부서진 어깨 위에 머리 하나 기우뚱 달처럼 얹어놓고 간다
혀를 뽑아낸 자리에 애기똥풀 피었다
달의 귀
가끔씩 귀를 자르고 싶어, 내 몸을 돌던 피가
네모반듯하게 누울 수 있도록
그러면 우리 집 고양이는 온통 벽을 긁어놓겠지만 혀를 붓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된 나는 누군가의 뱃속에서 지워진 내 숨소리를 들을 수 있을 테고 가만히 첫눈이 온다고 속삭이는 여자는 얼굴도 모르는 아이의 심장을 꺼내 뭇 남자의 무릎을 베기도 한다더군요
그러니까 나는 자궁을 들어낸 어머니 뱃속 가득 담겨있던
신발 한 짝이었음을 기억해냅니다
달의 귀를 잘라 마르지 않는 그녀의 우물은 누군가의 손목을 베개로 삼아야 들을 수 있는 노래, 우두커니 아무리 울어도 나무가 될 수 없는 나는 축축한 밤의 옆구리에 의자를 갖다놓는 달팽이, 신발을 주우러 다니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어쩌죠? 귀를 잘라버린 무덤은 허공에 입을 그려 넣고
그녀는 밤새 눈사람을 만들지만 더 이상
무릎은 벨 수 없다더군요
어머니, 나뭇잎 좀 그만 떨어뜨리세요
뱃속에서 우는 아이의 심장을 가만히 꺼내
늙은 고양이를 만드는 그녀를 위해
밤은 가끔씩 종이가 됩니다
원나잇스탠드
역병疫病의 뼈다귀만 남았다
죽음이 구멍을 퍼내고 있다 헐컥벌컥
남의 피를 받아마시던 그림자 밑으로, 툭
마지막 구멍 하나가
굴러 떨어졌다
누런 똥무더기처럼 화색이 모락거리는
한 벌의 잠, 꿈틀 고구마를 캐듯
두 번 다시 꿰맬 수 없는 숨구멍이 가만히
꺼내 보여주는 심장이
숟가락 같다
어슬렁어슬렁 골목을 기어 나온 개가
자꾸 앞발을 들어올리는, 여기가
내 마지막 꽃밭이다
11월
― 사람을 뺀 나머지가 말했을까 모든 죽음은 바람의 발이라고,
바람은 가장 멀리서 왔습니다 사람은 아직 보이지 않습니다 가장 멀리서 오는 건지 가장 가까이서 오는 건지 그건 神도 모르는 일이지만 바람은 사람을 참 잘 만들었습니다 바람은 가장 가까이서 왔습니다 사람은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바람은 사람과 단둘이 있을 때 가장 죽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나뭇잎은 왜 떨어질까요?
미인이 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지
가게 밖을 청소하다 보니까 빤히 나만 쳐다보고 있더라구요, 달이
외간남자처럼 밤이 드나든 흔적은 없었지만 그녀에겐 그녀도 모르는 비밀이 있는지 모른다
그날 밤 나는 나무가 된 기분이었고, 미인이 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지
달은 그녀가 먹다 남긴 제 그림자를 어디다 쓸어 담는지
그 그림자로 살을 어떻게 문질러 물소리를 내는지
그녀를 사랑하는 나보다 더 궁금했던 거다
*본 작품은 문화체육관광부(주최)와 한국도서관협회(주관)의 체육진흥투표권 공익사업적립금으로 추진된
‘2014 도서관, 「내 생애 첫 작가수업」’ 사업 지원으로 집필 됨.
<약력> 김 륭
2007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2007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
2005년 제1회 김달진지역문학상
2007년 한국문화예술위 창작기금 수혜
2012년 제1회 박재삼사천문학상
2013년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수혜
2013년 제2회 문학동네 동시문학상 대상
2014년 제9회 지리산문학상
2009년 동시집 『프라이팬을 타고 가는 도둑고양이』
2012년 동시집 『삐뽀삐뽀 눈물이 달려온다』
2012년 시 집 『살구나무에 살구비누 열리고』
2014년 동시집 『별에 다녀오겠습니다』
2014년 동시집 『엄마의 법칙』
한정원
*1998년 현대시학 등단
시집 『그의 눈빛이 궁금하다』
『낮잠 속의 롤러코스터』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