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손택수 시 모음
언덕위의 붉은 벽돌집
- 1998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연탄이 떨어진 방, 원고지 붉은 빈칸 속에 긴긴 편지를 쓰고 있었다 살아서
무덤에 들 듯 이불 돌돌 아랫도리에 손을 데우며, 창문 너머 금 간 하늘 아
래 언덕 위의 붉은 벽돌집, 전학 온 여자아이가 피아노를 치고
보, 고, 싶, 다, 보, 고, 싶, 다 눈이 내리던 날들
벽돌 붉은 벽에 등을 기대고 싶었다 불의 뿌리에 닿고 싶은 하루하루 햇빛
이 묻어 놓고 간 온기라도 여직 남아 있다는 듯 눈사람이 되어, 눈사람이 되
어 만질 수 있는 희망이란 벽돌 속에 꿈을 수혈하는 일
만져도 녹지 않는, 꺼지지 않는 불을
새벽이 오도록 빈 벽돌 속에 시를 점화하며, 수신자 불명의 편지만 켜켜이
쌓여가던 세월, 그 아이는 떠나고 벽돌집도 이내 허물어지고 말았지만 가슴
속 노을 한 채 지워지지 않는다 내 구워낸 불들 싸늘히 잠들고 비록 힘없이
깨어지곤 하였지만
눈 내리는 황금빛 둥지 속으로 새 한 마리 하염없이 날아가고 있다
아버지의 등을 밀며
아버지는 단 한번도 아들을 데리고 목욕탕엘 가지 않았다
여덟살 무렵까지 나는 할 수 없이
누이들과 함께 어머니 손을 잡고 여탕엘 들어가야 했다
누가 물으면 어머니가 미리 일러준 대로
다섯살이라고 거짓말을 하곤 했는데
언젠가 한번은 입속에 준비해둔 다섯살 대신
일곱살이 튀어나와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나이보다 실하게 여물었구나, 누가 고추를 만지기라도 하면
잔뜩 성이 나서 물속으로 텀벙 뛰어들던 목욕탕
어머니를 따라갈 수 없으리만치 커버린 뒤론
함께 와서 서로 등을 밀어주는 부자들을
은근히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곤 하였다
그때마다 혼자서 원망했고, 좀더 철이 들어서는
돈이 무서워서 목욕탕도 가지 않는 걸 거라고
아무렇게나 함부로 비난했던 아버지
등짝에 살이 시커멓게 죽은 지게자국을 본 건
당신이 쓰러지고 난 뒤의 일이다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까지 실려온 뒤의 일이다
그렇게 밀어드리고 싶었지만, 부끄러워서 차마
자식에게도 보여줄 수 없었던 등
해 지면 달 지고, 달 지면 해를 지고 걸어온 길 끝
적막하디적막한 등짝에 낙인처럼 찍혀 지워지지 않는 지게자국
아버지는 병원 욕실에 업혀 들어와서야 비로소
자식의 소원 하나를 들어주신 것이었다.
어부림
딴은 꽃가루 날리고 꽃봉오리 터지는 날
물고기들이라고 뭍으로
꽃놀이 오지 말란 법 없겠지
남해는 나무그늘로 물고기를 낚는다
상수리나무 느티나무 팽나무 짙은 그늘 물 위에 드리우고
그물을 끌어당기듯,
바다로 휜 우듬지에 잔뜩 힘을 주면
푸조나무 이팝나무 꽃이 때맞춰 떨어져내린다
꽃냄새에 취한 물고기들 영영 정신을 차리지 못하도록
말채나무 박쥐나무 꽃도 덩달아 떨어져내린다
木그늘로 너희들 목에 내린 그늘이라도 풀어라
남해 삼동 촘촘한 그늘 가득 퍼득대는 물고기를
잎잎이 어깨에 메고 우뚝 선 어부림
꽃향기는 수평선 너머로도 가고 심해로도 가서
낚싯바늘처럼 단숨에 아가미를 꿰어뚫는다
꽃가루 날리고 꽃봉오리 터지고 청미래 댕댕이 철썩철썩
파도소리를 흉내내며
뒤척이는 숲,
날이 저물면 남해는 나무들도 집어등을 켜든다.
외할머니의 숟가락
외갓집은 찾아오는 이는 누구나
숟가락부터 우선 쥐여주고 본다
집에 사람이 있을 때도 그렇지만
사람이 없을 때도, 집을 찾아온 이는 누구나
밥부터 먼저 먹이고 봐야 한다는 게
고집 센 외할머니의 신조다
외할머니는 그래서 대문을 잠글 때 아직도 숟가락을 쓰는가
자물쇠 대신 숟가락을 꽂고 마실을 가는가
들은 바는 없지만, 그 지엄하신 신조대로라면
변변찮은 살림살이에도 집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한 그릇의 따순 공기밥이어야 한다
그것도 꾹꾹 눌러 퍼담은 고봉밥이어야 한다
빈털터리가 되어 십년 만에 찾은 외갓집
상보처럼 덮여 있는 양철대문 앞에 서니
시장기부터 먼저 몰려온다 나도
먼길 오시느라 얼마나 출출하겠는가
마실간 주인 대신 집이
쥐여주는 숟가락을 들고 문을 딴다
홍어
어느날인가는 시큼한 홍어가 들어왔다
마을에 잔치가 있던 날이었다
김희수씨네 마당 한가운데선
김나는 돼지가 설겅설겅 썰어지고
국솥이 자꾸 들썩거렸다
파란 도장이 찍히지 않은 걸로다가
나는 고기가 한점 먹고 싶고
김치 한점 척 걸쳐서 오물거려보고 싶은데
웬일로 어머니 눈엔 시큼한 홍어만 보이는 것이었다
홍어를 먹으면 아이의 살갗이 홍어처럼 붉어지느니라
지엄하신 할머니 몰래 삼킨 홍어
불그죽죽한 등을 타고 나는 무자맥질이라도 쳤던지
영산강 끝 바닷물이 밀려와서'흑산도 등대까지 실어다줄 것만 같았다
죄스런 마음에 몇번이고 망설이다, 어머니
채 소화도 시키지 못한 것을 토해내고 말았다는데
나는 문득문득 그 홍어란 놈이 생각나는 것이다
세상에 나서 처음 먹는 음식인데
언젠가 맛본 기억이 나고
무슨 곡절인지 울컥 서러움이 치솟으면
어머니 뱃속에 있던 열달이 생각나곤 하는 것이다.
추석달
스무살 무렵 나 안마시술소에서 일할 때, 현관보이로 어서옵쇼, 손님들 구
두닦이로 밥먹고 살 때
맹인 안마사들도 아가씨들도 다 비번을 내서 고향에 가고, 그날은 나와 새
로 온 김양 누나만 가게를 지키고 있었는데
이런 날도 손님이 있겠어 누나 간판불 끄고 탕수육이나 시켜 먹자, 그렇게
재차 졸라대고만 있었는데
그 말이 무슨 화근이 되었던가 그날따라 웬 손님이 그렇게나 많았던지, 상
한 구두코에 광을 내는 동안 퉤, 퉤 신세한탄을 하며 구두를 닦는 동안
누나는 술 취한 사내들을 혼자서 다 받아내었습니다 전표에 찍힌 스물 셋
어디로도 귀향하지 못한 철새들을 하룻밤에 혼자서 다 받아주었습니다
날이 샜을 무렵엔 비틀비틀 분화장 범벅이 된 얼굴로 내 어깨에 기대어 흐
느껴 울던 추석달
소가죽북
소는 죽어서도 매를 맞는다
살아서 맞던 채찍 대신 북채를 맞는다
살가죽만 남아 북이 된 소의
울음소리, 맞으면 맞을수록 신명을 더한다
노름꾼 아버지의 발길질 아래
피할 생각도 없이 주저앉아 울던
어머니가 그랬다
병든 사내를 버리지 못하고
버드나무처럼 쥐어뜯긴
머리를 풀어헤치고 울던 울음에도
저런 청승맞은 가락이 실려있었다
채식주의자의 질기디질긴 습성대로
죽어서도 여물여물
살가죽에 와닿는 아픔을 되새기며
둥 둥 둥 둥 지친 북채를 끌어당긴다
끌어 당겨 연신 제 몸을 친다
가슴에 묻은 김치 국물
점심으로 라면을 먹다
모처럼 만에 입은
흰 와이셔츠
가슴팍에
김치 국물이 묻었다
난처하게 그걸 잠시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평소에 소원하던 사람이
꾸벅, 인사를 하고 간다
김치 국물을 보느라
숙인 고개를
인사로 알았던 모양
살다보면 김치국물이 다
가슴을 들여다보게 하는구나
오만하게 곧추선 머리를
푹 숙이게 하는구나
사람이 좀 허술해 보이면 어떠냐
가끔은 민망한 김치 국물 한 두 방울 쯤
가슴에 슬쩍 묻혀나 볼일이다
물새 발자국 따라가다
모래밭 위에 무수한 화살표들,
앞으로 걸어간 것 같은데
끝없이 뒤쪽을 향하여 있다
저물어가는 해와 함께 앞으로
앞으로 드센 바람 속을
뒷걸음질치며 나아가는 힘, 저 힘으로
새들은 날개를 펴는가
제 몸의 시윗줄을 끌어당겨
가뜬히 지상으로 떠오르는가
따라가던 물새 발자국
끊어진 곳 쯤에서 우둑하니 파도에 잠긴다
탱자나무 울타리 속의 설법
가시 끝에 탱글탱글 빗방울이 열렸다
나무는 빗방울 속에 들어가
물장구치며 노는 햇살과 구름,
터질 것처럼 부풀어오른 새울음 소리까지를
고동 속처럼 알뜰히 빼어 먹는다
가시 끝에 맺힌 빗방울들,
가슴 깊이 가시를 물고 떨고 있다
살속을 파고든 비수를 품고
둥그래진다는 것, 그건
욱신거린는 상처를 머금고 사는 일이다
입술을 윽 깨물고 상처 속으로 들어가 한몸이 되는
일이다
열매들은 모두 빗방울을 닮아 둥그래질 것이다
빗방울의 아픔을 궁글려 탱탱한 탱자알이 될 것이다
바람이 불자, 내 어둔 이마 위로
빗방울 하나가 고동껍질처럼 떼구루루 떨어져내렸다
연꽃 에밀레
연꽃잎 위에 비가 내려 친다
에밀레종 종신에 새겨진 연꽃을
당목이 치듯, 가라앉은
물결을 고랑고랑 일으켜 세우며 간다
수심을 헤아릴 길 없는, 끔찍하게 고요한
저 연못도 일찍이 애 하나를 삼켜버렸다
애 하나를 삼키고선 단 한 번도
바닥을 드러낸 적이 없다
어린 내가 아침마다 밥 얻으러 오던
미친 여자에게 던지던 돌멩이처럼
비가 내려칠 때마다 연꽃
꾹 참은 아픔이 수면 위로 퍼져나간다
당목이 종신에 닿은 순간 종도
저처럼 연하게 풀어져 떨고 있었으리라
에밀레 에밀레 산발한 바람이
수면에 닿았다 튀어오른
빗줄기를 뒤로 힘껏 잡아당겼다
집
알껍질은 뜯어먹는다 방금 나온 애벌레가 껍질을 깨고 나오자마자 놀라운
식욕으로, 그동안 나를 품어주었으니 이제는 내가 너를 품어주마, 뛰쳐나온
집을 하나도 빠짐없이 오물오물 뜯어먹는다
애벌레의 몸속으로 통째로 들어간 집, 애벌레의 몸속으로 스며들어 곰실곰
실 기어다니다가 더듬이를 쭉 내밀어보고, 양 날개를 활짝 펴보는 집, 알집
속에 수많은 새끼집을 짓고 눈을 감으리라 그렇게 집이 나의 양식이 되고,
나는 집의 처소가 되어 살다 가리라
무얼 잘못 먹었는지 생똥을 싸고 자꾸 헛구역질을 한다 녹화해둔 「환경
스페셜」비디오 테이프도 다 돌아가고 차디찬 꽃무늬 장판바닥에 누워 나
비잠을 청해보는 하루, 어쩐지 벗어논 허물처럼 집이 헐렁하다
소금쟁이의 연애
바람 한 점 없는데 못물 위에 파문이 번지는 건
소금쟁이 때문이다 소금쟁이의 순전한 연애 때문이다
가만 보면 암컷인지 수컷인지 바람기 농한 소금쟁이 한 마리가
멀찌감치 떨어진 짝에게 무슨 신호를 보낸다
제 미미한 몸을 상하 좌우로 흔들어 고요한 수면을 깨우더니
보일 듯 말 듯 한 파문이 스르르 번져가서
좀체로 곁을 두려 하지 않는 짝의 발바닥을 간지른다
간지름을 참지 못하고 푸르르 떠는 건너편의 소금쟁이
가장 미세한 떨림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예민하게 가늘어진 다리, 파문에 감전된
다리의 떨림도 답신처럼 넌지시, 보기에 따라서는 수줍게
잔잔한 물결을 이루며 연못을 건너간다
소금쟁이 한 쌍의 은근한 수작 때문에
잠시도 잠들지 못하고 술렁이는 연못.
시골버스
아직도 어느 외진 산골에선
사람이 내리고 싶은 자리가 곧 정류장이다
기사 양반 소피나 좀 보고 가세
더러는 장바구니를 두고 내린 할머니가
손주놈 같은 기사의 눈치를 살피고
억새숲으로 들어갔다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
싱글벙글쑈 김혜영의 간드러진 목소리가
옆구리를 슬쩍슬쩍 간질러대는 시골버스
멈춘 자리가 곧 휴게소다
그러나, 한나절 내내 기다리던 버스가
그냥 지나쳐 간다 하더라도
먼지 폴폴 날리며 투덜투덜 한참을 지나쳤다
다시 후진해 온다 하더라도
정류소 팻말도 없이 길가에 우두커니 서서
팔을 들어올린 나여, 너무 불평을 하진 말자
가지를 번쩍 들어올린 포플러나무와 내가
어쩌면 버스 기사의 노곤한 눈에는 잠시나마
한 풍경으로 흔들리고 있었을 것이니
放心
한낮 대청마루에 누워 앞뒷문을 열어놓고 있다가, 앞뒷문으로 나락드락 불
어오는 바람에 겨드랑 땀을 식히고 있다가,
스윽, 제비 한 마리가,
집을 관통했다
그 하얀 아랫배,
내 낯바닥에
닿을 듯 말 듯,
한순간에,
스쳐 지나가버렸다
집이 잠시 어안이 벙벙
그야말로 무방비로
앞뒤로 뻥
뚫려버린 순간,
제비 아랫배처럼 하얗고 서늘한 바람이 사립문을 빠져나가는 게 보였다 내
몸의 숨구멍이란 숨구멍을 모두 확 열어젖히고
화살나무
언뜻 내민 촉들은 바깥을 향해
기세 좋게 뻗어가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은 제 살을 관통하여, 자신을 명중시키기 위해
일사불란하게 모여들고 있는 가지들
자신의 몸 속에 과녁을 갖고 산다
살아갈수록 중심으로부터 점덤 더
멀어지는 동심원, 나이테를 품고 산다
가장 먼 목표물은 언제나 내 안에 있었으니
어디로도 날아가지 못하는, 시윗줄처럼
팽팽하게 당겨진 산길 위에서
버려진 집 속에 거울이 있다
집을 버리면서, 거울을
두고 오는 건 차마 못할 짓이다
버려진 제 모습을 쳐다볼 수 없어
먼지를 풀썩이며 조용히 미쳐가는
집의 거울을 보라
집은 제 얼굴에 화장을 하는 대신
거울에 화장을 한다
거울에 파우더 분가루 같은
먼지를 덕지덕지 처발라
망가져가는 제 얼굴을 흐릿하게 뭉개어본다
그렇게 남은 날을 견뎌야 한다는 건,
아무래도 지나친 형벌이다
폐가는 금이 가거나, 깨어진
거울조각을 품고 있다
낡은 자전거가 있는 바다
외갓집 소금창고 구석진 자리에 낡은 자전거 한대가 있다. 군데군데 칠이
벗겨지고 녹이슬었지만, 수리하면 쓸 만하겠는걸. 아마도 나는 길 닿는 곳
이면 어디든지 쌩쌩 미끄러져 다녔을 은륜의 눈부신 전성기를 생각했는지
모른다. 논둑길 밭둑길로 새참을 나르고 포플러 푸른 방둑길 따라 바다에
이르던 시절, 그는 아마도 내 이모들의 풋풋한 젊은 날을 빠짐없이 지켜보
았으리라. 읍내 영화관 앞에서 빵집 앞에서 참을성 있게 주인을 기다리
다, 아카시아 향기 어지러운 방둑길로 푸르릉 푸르릉 바큇살마다 파도를
끼고 굴러다니기도 했을, 어쩌면 그는 열아홉 꽃된 처녀아이를 태우고 두
근두근 내 아버지가 될 청년을 만나러 가기도 했으리라. 바다가 보이는 풀
밭에 누워 클레멘타인 클레멘타인, 썰물져가는 하모니카 소리에 하염없이
젖어들기도 하였으리라. 그때 풀밭과 바다는 잘 구분이 되질 않아, 멀리서
보면 그는 마치 바다에 누워 즐겨 꿈에 젖는 행복한 몽상가로 보이지 않았
을까. 첫사랑처럼 한 번 익히고 나면 여간해선 잘 잊혀지질 않는 자전거, 손
잡이 위의 거울 먼지를 닦아본다. 거울은 오래 전부터 그렇게 나를 품고 있
었다는 눈치다. 턱없이 높은 앉을깨 위에서 페달이 발에 잘 닿지 않는다고
툭하면 투정을 부리던 철부지 아이를, 맥빠진 앞바퀴 뒷바퀴 타이어에 바
람 빵빵 밤 늦도록 소금자루 같은 달을 태우고 비틀대던 방둑길을.
구두 밑에서 말발굽 소리가 난다
구두 밑에서 따그락 따그락 말발굽 소리가 난다
구두를 벗어 보니 구두 뒷굽에 구멍이 났다
닳을 대로 닳은 구두 뒷굽을
뚫고 들어간 돌멩이들이 부딪히며
걸을 때마다 챙피한 소리를 낸다
바꿔야지, 바꿔야지 작심하고 다닌 게 몇 달
할 수 없다, 할 수 없다 체념하고 다닌 게 또 몇 달
부산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광주로
마산으로, 다시 부산으로 떠돌아다니는 동안
빗물이 꾸역꾸역 밀려들어오는 구두
빙판길에선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엄지발가락에 꾸욱 힘을 줘야 했던 구두
걸을 때마다 말발굽 소리를 낸다
빼고 나면 다시 들어가 박히고
빼고 나면 또 다시 들어가 박히는 소리
지친 걸음에 박자를 맞춰주는 소리
닳고 닳은 발굽으로 열 정거장 스무 정거장
빈주머니에 빈손을 감추고 걸어가는 동안
들려오지 않으면 이제는 왠지 허전해진다
그만 주저앉고 싶을 때마다, 이럇
뒷굽을 치며 갈기를 휘갈기는 소리
따그락 따그락 무거운 몸에 리듬을 실어주는 소리
곡비
눈이 많이 내린 한겨울이면 새들에게 모이를 줘서 아들 내외에게 자주 잔
소리를 듣던 함평쌀집 할머니
세상 버리던 날 새들은 오지 않았다 밥 달라고, 밥 달라고, 아침 일찍부터
찾아와 양철문을 바지런히 쪼아대던 새들
등쌀에 이놈의 장사도 집어치워야겠다, 그 아드님 허구헌 날 술만 푸고 있
더니
쌀집 앞 평상마루에 앉아 소주잔을 기울이며 들려준다 장지의 소나무 위에
서 울던 새울음 소리가 어째 영 낯설지만은 않더라고
울 어매가 주는 마지막 모이를 받으러 왔나 싶어 고수레 고수레 한상 걸게
차려주었더니, 구성진 곡비 소리 해종일 끊이질 않더라고
손택수 孫宅洙
1970년 전남 담양 출생
경남대 국문과를 졸업
199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
부산작가상, 현대시동인상 수상
제22회 신동엽창작상 수상
시집으로는 [호랑이 발자국] (창작과비평사, 2003)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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