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한 시

2014년 노작문학상-무논에 백일홍을 심다 외/ 장옥관

시치 2014. 10. 22. 23:16

 

2014년 노작문학상

 

무논에 백일홍을 심다 외/ 장옥관

 

무논에다 나무를 심은 건 올 봄의 일이다

벼가 자라야 할  논에 나무를 심다니, 아버지가 아시면 크게 혼이 날 일이다.

수백 년 도작한 논에 나무를 심으면서도 아버지와

한마디 의논 없었던 건 분명 잘못한 일이다

하지만 아버지도 장남인 내게 일언반구도 없이 여길 훌쩍 떠나지 않으셨던가.

풀어헤친 제 가슴을 해집던 아버지

손가락의 감촉을 새긴 논은

이제 사라지겠지만 남풍에 족보처럼 좍 펼쳐지던

물비린내 나는 초록의 페이지 덮고

올 봄엔 두어 마지기 논에 백일홍을 심었다.

백일홀 꽃이 피면

한여름 내내 붉은 그늘이 내 얼굴을 덮으리.

백날의 불빛 꺼지고 어둠 찾아오면 사방 무논으로 둘러싸인 들판 한가운데

나는 북 카페를 낼 것이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을 북 카페를 열 것이다.

천 개의 바람이 졸음 참으며 흰 페이지를 넘기고 적막이 어깨로 문 밀고 들어와 좌정하면

고요는 이마 빛내며 노을빛으로 저물어 갈 것이다.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활자 앞에 쌀가마니처럼 무겁게 앉아 아버지가 비워 두고 간 여백을 채울 것이다.

무논에 나무를 심은 일이 옳은지 아닌지 그것부터

곰곰 따져 기록할 것이다.

 

 

돼지와 봄밤

 

돼지가 생각나는 봄밤이다 돼지감자가 땅속에서 굵어 가는 봄밤이다 시커먼 돼지들이 벚나무 아래를 돌아다니는

봄밤이다 하이힐을 신은 돼지

뻣뻣한 털로 나무 밑동을 자꾸 비벼대는 봄밤이다

미나리꽝엔 미나리가 쑥쑥 자라고

달은 오줌보처럼 팽팽하게 부풀어 오르고

여린 꽃잎은 돼지의 콧잔등을 때리고

깻잎머리 한 여중생들이 놀이터에서 침을 퉤퉤 뱉다가 돼지를 만나는 봄밤이다 봄밤에는 돼지가 자란다

천 마리 만 마리 돼지들이 골목을 쑤시다가

캄캄한 하수구로 흘러드는 봄밤

풀어놓은 돼지들을 모두 잡아 풍선에 매달아 하늘로 띄우고  싶은 봄밤이다

 

 

멍 자국

 

  먼 바다 물빛을 닮았다. 빛조차 빠져들면 되돌아 나오지 못하는.  여자가 팔뚝 안쪽에 입을 갖다 댔다. 터져 나오려는

소리를 삼키기 위해 흡반으로 멍 자국을 만든 것이다. 왜 이리 컴컴할까. 제 어둠 들여다보며 여자가 울부짖을 때 바다

는 더  검고 푸르게 깊어졌다. 하지만 바다엔 계단이 없으니 칸이 있는 줄 알고 한발 디디다 쑥 빠져드는 느낌? 허방에

 사다리를 놓고 우리는 날마다 배밀이로 눈물겹게 저어가는 것일까. 형체도 없는 해파리처럼 춤추며 바다의 천장에 닿

기 위해 몸부림치는 여기는, 도무지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멍 자국의 바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