必死 筆寫

환상의 빛 外/강성은

시치 2014. 8. 9. 15:12

 

환상의 빛 外/강성은

 

 

옛날 영화를 보다가

옛날 음악을 듣다가

나는 옛날 사람이 되어버렸구나 생각했다

 

지금의 나보다 젊은 나이에 죽은 아버지를 떠올리고는

너무 멀리 와버렸구나 생각했다

 

명백한 것은 너무나 명백해서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몇 세기 전의 사람을 사랑하고

몇 세기 전의 장면을 그리워하며

단 한 번의 여름을 보냈다 보냈을 뿐인데

 

내게서 일어난 적 없는 일들이

조용히 우거지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한다

눈 속에 빛이 가득해서

다른 것을 보지 못했다

 

 

단지 조금 이상한 / 문학과지성사, 2013.

 

 

환상의 빛,

 

등 뒤에서 악령들이 내 긴 머리를 땋았다 

희고 가녀린 손으로 

입 속에서 허연 김을 내뿜으며 

나는 손가락을 뻗어 

뿌연 유리창 위에 밤의 다른 이름들을 써내려 갔다 

겨울의 다른 이름들을 써내려 갔다 

나의 다른 이름들을 써내려 갔다 

창 밖으로 몽유병의 신부와 들러리들이 맨발로 흰 드레스를 끌며 

나타났다 사라졌다 

어두운 거리는 밤새 골목을 만들었다가 숨겼다 

어째서 머리칼은 계속해서 자라고 창 밖의 폭풍은 멈추지 않는 걸까 

등 뒤에서 악령들이 내 긴 머리를 땋는다 

희고 빛나는 물을 뚝뚝 흘리며 

낮은 중얼거림으로 

어째서 이 밤에는 저 오래된 거리에는 

내 몸 속에는 불빛 하나 켜지지 않는 걸까 

예감으로 휩싸인 계절은 연속 상영되고 

새들은 지붕 위에서 오래 잠들어 있다 

감기약을 먹고 나는 다시 잠들겠지만 

먼지는 밤 사이 도시를 또 뒤덮을 것이고 

내가 잠들면 시작되는 

이 겨울 밤의 자막은 

내가 쓴 이름들과 기호들과 본 적 없는 빛의 알 수 없는 조합 

나는 끝내 읽지 못한다 

 

 환상의 빛

 

 

긴 잠에서 깨어난 외할머니가

조용히 매실을 담그고 있다

긴 잠을 자고 있는 내가 깨어날 때까지

 

나는 차를 너무 많이 마셨나

눈물에 휩쓸려 바다까지 떠내려갔나

하루는 거대해지고

하루는 입자처럼 작아져 보이지 않는다

 

아픈 내 배를 천천히 문질러주듯

외할머니가 햇볕에 나를 가지런히 말린다

슬퍼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본 적 없는 신을 사랑해본 적도 있다

본 적 없는 신을 그리워해본 적도 있다

 

그저 외할머니의 치마 속으로 들어가

긴 겨울을 여행하고 싶었을 뿐인데

 

긴 잠에서 깨어난 내가 눈물을 참는 사이

밤하늘에선 한 번도 본 적 없는 신이 내려오고 있다

 

저 눈이 녹으면 흰 빛은 어디로 가는가*

 

 

런던포그

 

런던포그는 아버지가 입던 양복의 이름

지금은 사라져버린

안개처럼 사라져버린

아버지와 양복

어느 날은 겨울 나뭇가지 끝에 걸려 있고

어느 날은 비에 젖은 채로 중얼거리고

눈 내리는 밤 창문을 톡톡 두드리고

텅 빈 가을을 가로지르고

시시각각 형체를 바꾸며 나타났다 사라지고

몇 세기 동안 녹지 않는 눈사람이 되어

겨울이 되면 다시 그 집 앞에 서 있다

고향이 없는 자가 그리워하는 고향처럼

지금은 사라져버린

안개처럼 사라져버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