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말선 시 보기(6편)
<1>-확보/조말선-
벼랑처럼 여름이다 식물들은 쑥쑥 위로만 기어오른다 나는 날카로운 칼을 가진다 새삼 해변이 가까이 있었다 해변에
는 한 번도 가지 않았다 화면에 비친 그곳은 낯설다 늘 모르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칼날에서 번뜩이는 햇빛이 칼보다 날카
로운 게 불만이다 내가 식물성향보다 동물성향이 강한게 불만이다 덩굴들은 여름에 가장 멀리까지 올라가 있다 나는 늘
땀으로 번들거리며 벼랑을 기어오르고 있었다 희미한 한 사람이 밧줄 끝에 호의적으로 서 있었다 얼굴은 알아볼 수 없었
다 나는 추락할 수 있는 경우의 수를 하나 더 확보했다
<2>-가로수들/조말선-
한 손이 다른 손에게 구름을 건네주고 있었다 이 발이 저 발에게 바람을 건네주고 있었다 그것은 늘 움직이고 있는 한
손과 다른 손, 이 발과 저 발이어서 장소가 없었다 도착이 없었다 당신은 내 옆을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당신의 옆 모습이
만족스럽지 않아 반쯤 표정을 숨긴 태도가 나를 외롭게 해 한 옆모습이 한 옆모습을 돌려세우려고 가고 있는 당신은 더
외로워 보여 그러니 당신은 이봐 이봐, 당신을 돌려세우려고 가고 있었다 외로움의 제복을 당신에게 당신을 건네주고 있
었다 제복의 아름다움은 길게 줄을 서는 것 그것은 늘 움직이고 있는 현상이라서 봄이 왔다 한 손이 다른 손에게 봄을 건
네주고 있었다 이 발이 저 발에게 봄을 건네주고 있었다 저 소실점까지!
<3>-고향/조말선-
벗어놓은 외투가 고향처럼 떨어져 있다
내가 빠져나간 이후에 그것은 고향이 되었다
오늘 껴입은 외투와 나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하면
한 번 이상 내가 포근하게 안긴 적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비로소 벗어놓은 외투를 찬찬히 살펴보는 것이다
내가 빠져나가자 그것은 공간이 되었다
후줄근한 중고품
더 이상 그 속에 있지 않은 사람의 언어
<4>-통로/조말선-
당신의 귀가 성욕처럼 어둡습니다 저기로 가기 위해 귀를 열어주시겠습니까 어딘가에 통로가 있다고 한 사람은 기찻
길 아래 긴 언덕입니다 굉장한 소음의 힘으로 나는 몸을 밀어넣습니다 남아도는 소음들의 무덤을 지나 밤을 유예시킨 아
이들이 불을 피운 흔적을 지나 꼼짝하지 못하는 이곳은 당신의 가냘픈 목입니까 나는 물을 마시고 나를 넘깁니다 어쨌든
나는 지나갈 수 있습니다 어쨌든 통로는 좁아야합니다 축축한 천장을 만져보니 나는 아주 커진 거지요 뜻밖에 공터를 발
견한 것은 내가 작아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성숙하고 있었기 때문에 꼭 맞는 통로가 불필요합니다 당신의 이쪽 귀와
저쪽 귀는 불과 한 뼘이지만 들리는 소음의 결말은 멀고 멉니다 나는 보다 커지거나 보다 작아지고 있습니다 나는 지나가
거나 지나오고 있습니다 저기, 빛에 가려 보이지 않는 쪽이 결말입니까 당신의 귀는 결말이 나지 않습니다
<5>-생강차의 맛/조말선-
오늘 읽은 책 중에서 가장 톡 쏜다 재미있는 책은 혼자 웃지 못했고 고상한 글은 드레스 자락이 밟혀서 금방 지저분해
진다 요즘 뜨고 있는 책은 아직도 뜨고 있어서 썩는 냄새가 난다 속달로 보내온 그의 책은 맛있다고 생각하지만 다음 책
을 보기 전에는 알 수가 없다 오늘 읽은 책 중에서 가장 급조한 것이다 벌써 최상급의 대접이 두 번 티백으로 포장되어 있
어서 휴게실에 널렸다 이 책과 저 책 사이에 차 마시듯이 읽었는데 금방 잊을 수 있었다 차 한 잔을 마시는 동안 피어오르
는 독설과 차 한 잔을 마시는 동안 전달되는 따뜻한 혈통이 전부라면 저자는 대단한 미식가이다 쓸데없이 수식어를 남발
하지 않아서 질척대지 않고 자, 여기 쓰레기 통을 갖다댄다 손에 도착하기 전에 혀에서 사라진다
<6>-나의 잠/조말선-
침대에 누우면 한 그루 나무의 형태로 돌아간다 나는 나무처럼 잠을 구부린다 잠은 나무처럼 멈춘다 걸음을 멈추고 잠
을 키운다 한 그루 잠이 내게서 깊이 뻗어나간다 눈꺼풀 아래 숨겨둔 눈알을 베껴먹고 잠이 자란다 닫힌 입속에서 입냄새
나는 침묵을 먹고 잠이 자란다 잠은 백 년 동안 무럭무럭 자란다 잠은 백 년 동안 한 침대를 사랑하고 있다 앙상한 손가락
에 손가락이 엉기며 겹겹의 통로를 반복하며 어두운 침대는 숲속처럼 숨을 내쉰다 잠은 네 발을 가진 식물처럼 나를 현상
한다 잠은 백 년 동안 나를 쫓아온다 나의 잠이 기력도 없는 잠이 나를 소파에 기대놓고 자란다 펼쳐진 책의 글자 속에서
도 기어나와 자란다 나에게 보이지 않는 잠이 한자리에서 떠날 수 없는 잠이 떠날 때마다 나를 낙엽처럼 버린다
<<조말선 시인 약력>>
*1965년 경남 김해에서 출생.
*1998년 부산일보 신춘문예와 "현대시학"으로 등단.
*詩集으로 "매우 가벼운 담론", "둥근 발작", "재스민 향기는 어두운 두 개의 콧구멍을 지나서 탄생했다".
*2001년 제7회 현대시동인상, 2012년 제17회 현대시학작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