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시

최호일 시 보기(13편)

시치 2014. 5. 2. 15:15

 

최호일 시 보기(13)

 

바나나의 웃음

 

바나나를 오전과 오후로 나눈다
바나나를 밤과 낮으로 나눈다
바나나를 동쪽과 서쪽으로, 만남과 사소한 이별로, 여자의 저녁과 남자로

나눈다
바나나로 세계를 나눈다
불안해지는 바나나
드디어 생선이 되는 바나나
왼쪽 바나나가 사라지고
바나나의 미래가 사라졌다
아 바나나 하고 웃는 바나나
바나나
네가 있는 곳을 알려줘

경제적인 일


콜라를 사러 간다
콜라를 사기 위해 먼 아프리카로 간다
당신과 이 거리와 잠시 헤어지기 위해 그곳에 간다
손잡이가 없는 컵에 콜라 한 잔을 따라 마시고
컵이 없으면 그냥
다시 돌아오기 위해
시간이 잠시 남아 있으면 남아 있던 콜라를 다 마시고
비행기를 타고 안전벨트를 매고
구름 속에 묻힌 채 잠을 자자

여기가 어디지
밤에는 왼손을 벌레에 물려 말라리아에 걸리고
간판이 떨어진 병원에 들러
앓다가 돌아오자
병원 벽에는 알 수 없는 아이들의 낙서
내리는 빗방울

친구들은 웃고 또 웃겠지
콜라를 사기 위해 아프리카에 가다니
비행기를 타고 가다 졸다니
나는 조금 웃는다
그곳에서 콜라를 마시고 다시 돌아오기 위해 산다고
아프리카는 그러기 위한 장소

콜라를 그리워하며
콜라를 사러 아프리카로 가자

 

 

엑스트라

 

 

이 한 여름에

두꺼운 옷을 껴입고 우리는 웃는다

여름 날 당신의 입술과 내 손가락 사이로 내리는

눈송이들

혀가 혀를 빨아 먹으며

바위 사이에서 커다란 뱀과 여자와 허벅지가 튀어나올 때

주인공은 홀로 용감하다

대기 속에는 진짜 총알이 들어있고

 

여섯시에 총을 맞아야하므로

우리는 그녀를 사랑하는 법을 모른다

내일은 지퍼가 열린 줄 모르고 들고 다니는 트렁크 속에서

가면과 시체가 쏟아질 것이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영화처럼

저녁이 오고

화면엔 보이지 않지만 쓰러진 술잔이 있다

그것이 어두운 소리로 굴러 떨어져 강가에 닿을 무렵

겨울이 와야 한다

여름에 내리는 눈송이처럼

 

내 몸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다

 

 

 

 

사라지는 오렌지

 

 

오렌지 나라에서는 오렌지가 사람

사람의 투명한 옷을 입고 의심하고 이해한다

 

오렌지가 되려면 오렌지의 크기와 색깔과 색다른 구두가 필요하고

열 개의 손가락이 당장 필요하다

만일 당신에게 손을 들어 인사를 한다면

그건 오렌지의 감정

 

문을 열고 들어가 비와 사람의 단추를 누르면 주렁주렁 열리는 팔과 다리들

오렌지는 사람들을 박스에 넣어 선물한다

당신과 나 사이를 주고받는 어느 선물

 

상자 속 사람들이 지하철에서 빠져나온 옆구리처럼 걸어 다닌다

뒤돌아보았을 때

일정한 높이와 냄새와 수만 개의 눈을 가지고

오늘 계단은 몇 개의 기분일까

 

백만 년 전 우리는 허리를 숙이다가 누군가의 호주머니에서 굴러 떨어진 노을이었지

그걸 주우려다 또 떨어뜨린 노을빛

 

저녁은 가장 오래된 물질

죽은 척하고 놓여 있는 이 오렌지는 지워진 안개와 강물이 다 사라지는 오후와

다른 사람이 사는 마을을 거쳐 여기 희미하게 굴러온 것

 

가보지 않은 여행지를 천천히 다녀온 사람들같이

아는 얼굴로

 

 

 

 

 

 

개 끈

 

 

 

빈 봉지로 배불러 가는 라면 집 쓰레기통처럼

늦은 폭설이 허기진 개밥그릇에

허드레 눈덩이를 곱배기로 던져 넣고 있다

이곳까지 오는 내 발목을 물어뜯던 것들

개는 싱겁게 하늘을 보고 짖어대지만

라면은 죄송하게 젓가락까지 짜다

내 호주머니가 그런 것처럼

개밥그릇도 짭짤한 하루를 좋아할 것이다

쭈글쭈글한 공복이 개밥그릇 속에서

찬밥덩이를 흘리면서 받아먹고 있다

한 숟가락만, 감나무 가지가 손 내민다

땡볕이 주렁주렁 달라붙는 여름날에는

감나무는 그늘을 깔고 개를 달게 키울 것이다

눈 더미가 쌀밥으로 보이기 시작했다가

뼈까지 녹아 버릴 때

개는 밥그릇을 엎고 부들거릴지 모른다

그러나, 직장이 내 따뜻한 끈이었던 시절처럼

개 끈은 당분간 개를 보호할 것이다

개가 끈을 끌고 가기도 하고

끈이 개를 잡아당기기도 하면서

개 끈의 길이만큼 간섭하고

개 끈의 길이만큼 용서할 것이다

전철에서 쏟아져 나온 넥타이들을

눈보라가 하나씩 잡아끌고 지나간다

집으로 가는 길이 하얗게 지워지는 동안

라면은 국물과 뼈다귀까지 주름지고 있다

 

멍멍, 하고 밥이 다가 갈 때쯤

개의 절반이 꼬리라는 걸 처음 알았다

마당의 절반쯤, 희망에 묶여있다는 걸

 

 

 

 

두 개의 수요일

 

 

수요일엔 행복해지고

수요일엔 불행하다

수요일 속에 수요일이 쑤셔 박혀 있다

 

나는 매일 내 마음을 혼자 사용하는 걸 허락하고 있다

저녁을 생각하면 눈에 들어온 이물질처럼 저녁이 오고

그래서 나무와 풀, 모르는 꽃들의 이름을 외우고 잊지

 

풀빛의 왼쪽 젖가슴은 어떤 색 피가 흐르고 있을까

 

두 개의 긴 팔과

투명한 팔이 하나 더 달린 복싱선수처럼

비가 오는데

 

저녁이 한 가슴을 여러 사람이 더듬는 것처럼 야비해진다

어두워지기 때문이지

 

수요일이 될 때까지

일주일에 한번 수요일을 살자

 

이런 방법을 기뻐하지 않지만

아주 어두워지자

 

저녁과 저녁 사이의 모든

죄 없는 바퀴벌레와 쥐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미안해질 때까지

 

수요일의 스파링 상대처럼

수많은 얼굴을 너에게 맡기는 것이 좋다

 

 

 

 

민달팽이

 

 

너는 밤과 동일하구나 고개를 들어 우리는 학자처럼 바라본다 다른

나라의 기이한 서적을 읽듯

 

인생이 명료해지도록

 

천 개의 단어를 넣고 뚜껑을 닫아놓은 나무 상자처럼 그것을 다시 뒤

적이는 손처럼 잠을 커피에 찍어 먹는다

 

빛을 어둡고 축축하게 보관한다 너는 태어나다가 죽은 아이의 얼굴을

달고 있구나 먹다 남긴 과자 봉지 속에는 지나간 시간이 들어 있을까

 

야구 선수들은 베이스를 지나 정말 집으로 무사히 돌아가는 걸까

 

이런 질문을 던지면 그 구멍 사이로 밤이 온다 어둠을 빛의 오른쪽 얼

굴로 이해한다

 

나로부터 한없이 늘어나는 것이 너는 밤보다 조금 더 길게 어두워지

고 있다 몸에 들어온 조용한 고무줄같이

 

 

 

 

조용한 손

 

 

조용한 손은 조용하다 어제의

약사는 약을 조제하느라 상처를 건드릴 뿐 조용하다

일요일의 거짓말처럼

약국에는 어제의 약이 없다

문틈으로 끼어든 정적도 정적 때문에 고요하고

끼어들 틈이 없다

 

두 번째 꽃집이 길을 건너오고 있다

모든 골목은 각별하고 추운데

사람들은 개처럼 첫눈이 오는 걸 좋아한다

 

눈송이가 머리를 만지고 걸어다닌다

 

주부들은 주부가 되기 위해 바쁘다 말없이 그릇을 깰 때도

그릇을 깨지 않을 때도

개와 주부 사이에 조용히 눈이 온다

소년들은 소녀의 예민한 손으로 빚어 만든 얼굴로 웃는다

잠시 너를 놓쳐야 할 텐데 만져야 할 텐데

내 소리를 받아 줘

개와 주부와 소년은 눈으로 뭉쳐 만든 시간인데

모두 옷을 입고 있을 뿐인데

 

손으로 약을 잡았으나 눈사람으로 만들어진 사람처럼

손이 나를 놓고 있는 것 같다

 

 

 

 

 

당신들의 취향

 

 

오른발에는 빨간 장화를 신고

왼쪽에는 굽이 높은 구두를 신고 걸어가자

오래 궁리하듯 굽이 낮은 쪽으로 먼저 가을이 오고

우리는 절뚝거리며 희미해진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빗방울은 거리의 튀김처럼 튀네

나무가 불안해 초록색을 흔드는 나무들

나무 아래에 앉아

타인의 방향에 대해 입을 다물고

한 사람이 만들어 낸 두 사람의 생각에 대해 저녁은

최초의 기분을 발견해 낼 것이다

장화를 신은 쪽의 발목에서는 아무래도 피가 흘러

질척거린다는 사실을

이런 생각이 하수구를 타고

지구 저편의 해변에 가 닿고 피로 물들 때까지

아무도 없는 아침이 오고

설탕이 없는 커피를 마시고

옷을 다 벗고

당신이 혼자 소파에 앉아 실없이 웃었으면 좋겠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우리를 멈추지 않는다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들으며

어제 죽은 고양이를 목에 두르고

 

 

 

 

일 분 동안 우산

 

 

비가 그친 줄 모르고

일 분 동안 쓰고 걸어간 우산을 음악이라 하자

검은 우산의 딸처럼

우산을 접으면 주르륵 흐르는

첫 번째 가로수의 두 번째 전생과 검은 발자국 소리

꽃의 노란색 바깥이라고 부르자

불가능한 저쪽이 따라온다

 

나뭇가지 사이에 스무 살 적의 새와 서른 살의 젖은 새가

새가 되기 위해 앉아있다

나는 늘 없고, 내 옷을 입고 있는 것 같다

 

너를 이해해

 

가수가 넘어지고

놀이터에서는 수많은 공이 사라진다

대부분의 현재는 발바닥을 보여주지 않는다

불 위에 냄비를 올려놓고 아주 잊어버리자

삼천 년 후의 목요일이 도착할 것이다

 

비와 시간으로 깎아 만든 식탁 위에

음료수가 놓여있고 누가 입술을 놓고 갔다

머리핀을 꽂고 머리가 길게 자라는

우산이 생겼다

 

 

 

 

오늘 그림자

 

 

햇빛 말짱한 대낮에도 그림자 없는 것이 있다

바로 그림자

 

열 살이 되기 위해 길을 건너는 아이도

깨지지 않은 유리창도 모두 조심스럽게 그림자를 거느리고 있다

사실 그림자도 다가가 옷을 벗겨보면

양파 껍질처럼 냄새나는 그림자가 또 있을지 모르지만

태양은 본질적인 것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어느 땐 우리 집 개가 몸을 부르르 떨며 먼지를 털다

가끔 혼자 넘어진다

그러면 그림자도 같이 일어난다

 

땅을 가만히 들춰보면 거기 그림자 없는 사람이 누워 있다

그가 신문을 읽고 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오늘자 스포츠 신문을 읽고 있다는 생각은 편견이다

 

오늘은 문이 잘 열리지 않아

그림자 도둑놈이 그림자를 한 개 훔치러 왔다가

제 그림자를 벗어놓고 갈지도 모른다

 

 

아쿠아리우스 


 

나는 물 한 그릇 속에서 태어났다

은하가 지나가는 길목에 정한수 떠있는 밤

물병자리의 가장 목마른 별 하나가

잠깐 망설이다 반짝 뛰어 들었다

물은 수시로 하늘과 내통한다는 사실을

편지를 쓸 줄 모르는 어머니는 알았던 것이다

달마다 피워 올리던 꽃을 앙 다물고

그이는 양수 속에서 나를 키웠다

그 기억 때문에 목마른 사랑이 자주 찾아 왔다

지금도 물 한 그릇을 보면 비우고 싶고

물병 같이 긴 목을 보면 매달리고 싶고

웅덩이가 있으면 달려가 고이고 싶다

어디 없을까 목마른 별 빛

물의 심장이 두근거리며 멎을 때까지

아주 물병이 되어 누군가를 적셔주고 싶다

아니, 트로이의 미소년 가니메데에게

눈물 섞인 술 한잔 얻어 마시고

취한 만큼 내 안의 고요를 엎지르고 싶다

한밤중의 갈증에 외로움을 더듬거려 냉장고 문을 열면, 그리웠다는 듯

반짝 켜지는 물병자리 별 하나

 

물병자리 별. 그리스 신화에는 제우스에게 납치당해 신들에게 술을 따르는 트로이의 왕자 가니메데의 이야기가 있다.

 

* 시는 최호일 시인의 2006년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당선 되었을 때에 발상이 신선한 시로 평이 좋았었는데 함께 공부하던 어떤 분이 최호일 시인 모르게 이 작품을 다른 곳에 응모, 수상하여 발표되는 바람에 당선이 취소된 아픔이 있는 시입니다.

다른 이야기이지만 함께 최종심에 올랐다가 밀린 저와 절친 문우인  임수련시인은 2007년 영남일보에 떡갈나무약국으로 당선 되었답니다.

그후, 최호일 시인은 2009년도 현대시학에 당선되었지요   당선작 중 저곳 참치는 역대 현대시학 당선자 중 최고였다는 심사위원들의 후담이 있었다고 합니다어느 평론가는 저곳참치가 발표된 시점 이전10 동안에 발표된 시중 최고의 시라는 이야기도 하더군요, 그마큼 최호일  시인의 타고난 시적 감각과 능력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영화"부시맨"이 세상에 나왔을 때 얼마나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습니까. 이 시를 보면서 저는 그 영화가 저절로 연상이 되더군요.

어느 오지에 하늘에서 콜라병이 떨어졌을 때  원주민의 놀라움이라니, 그 기상천외한 발상을요. 그것처럼 지구가 아닌 어느 외계인의 마을에 참치 캔이 떨어진다면 ?

설레이지 않습니까?

 


저 곳 참치

 

 

참치를 보면 다른 별에 가서 넘어지고 싶어진다


동그란 깡통 참치


어떻게 이런 모습으로 바다를 헤엄쳐 다녔는지 깡통 속에서 살이 통통하게 쪘는지
지느러미와 내장이 없다


참치는 좀 더 외로운 모습으로 진화해 온 듯하다 먼 훗날
비행접시를 타고 바닷가에 내린 어느 외계인처럼
사람들은 내용물을 버리고 깡통을 구워 먹을지 모른다
다 먹고 버린 참치를 차고 노는 아이들


참치를 숭배하는 자세로 비닐봉지에 담아 가지고 오다가
덜커덩 자전거가 어느 돌에 넘어졌다


저 곳으로 넘어지는 참치


저 돌은 어느 별에서 날아 왔을까 돌은
그곳에서 가시를 발라낸 비교적 딱딱한 참치일 수도 있고
저녁 어스름의 근원적인 고독일 수도 있다


아가미가 없는 참치

 

 

 

 

 

 


최호일 시인

1958년 충남 서천 출생

2009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바나나의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