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관련

[스크랩] 함양의 옛시인 - 함양수령 함양출신 문인의 시, 지금 봐도 최고의 시들 9편

시치 2014. 3. 12. 01:00

제가야산독서당(題伽倻山讀書堂)

                                                    

                                 고운 최치원(崔致遠 856~?)


狂奔疊石吼重巒(광분첩석후중만)

人語難分咫尺間(인어난분지척간)

常恐是非聲到耳(상공시비성도이)

故敎流水盡籠山(고교류수진롱산)


 

첩첩 바위 사이를 미친 듯 달려 겹겹 봉우리 울리니,


지척에서 하는 말소리도 분간키 어려워라.


늘 시비(是非)하는 소리 귀에 들릴세라,


짐짓 흐르는 물로 온 산을 둘러버렸다네




경주최씨(慶州崔氏)의 시조. 자 고운(孤雲)·해운(海雲). 868년(경문왕 8) 12세로 당나라에 유학하고, 874년 과거에 급제, 선주(宣州) 율수현위(溧水縣尉)가 된 후 승무랑(承務郞) 전중시어사내공봉(殿中侍御史內供奉)으로 도통순관(都統巡官)에 올라 비은어대(緋銀魚袋), 자금어대(紫金魚袋)받음.

879년(헌강왕 5) 황소(黃巢)의 난 때는 고변(高騈)의 종사관(從事官)으로서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초하여 문장가로서 명성 떨침.

885년 귀국, 시독 겸 한림학사(侍讀兼翰林學士) 수병부시랑(守兵部侍郞) 서서감지사(瑞書監知事)가 되었으나, 894년 시무책(時務策) 10여 조(條)를 진성여왕에게 상소, 문란한 국정을 통탄하고 외직을 자청, 대산(大山) 등지의 태수(太守)와 천령태감 천령태수(함양군)를 지낼 때 상림숲 조성.  난세를 비관, 각지를 유랑하다 여생을 마침.

저서에 《계원필경(桂苑筆耕)》 《중산복궤집(中山覆簣集)》 《석순응전(釋順應傳)》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 등이 있다.











다원이수 병서(茶園二首 幷敍)

                               점필재 김종직(金宗直1431~1492)


상공(上供)하는 차[茶]가 본군(本郡)에는 생산되지 않으므로, 해마다 백성들에게 이를 부과하는지라, 백성들은 값을 가지고 전라도(全羅道)에서 사오는데, 대략 쌀 한 말에 차 한 홉을 얻는다. 내가 처음 이 고을에 부임하여 그 폐단을 알고는 이것을 백성들에게 부과하지 않고 관(官)에서 자체로 여기저기서 구걸하여 납부했었다.

그런데 일찍이 삼국사(三國史)를 열람해보니, 신라(新羅) 때에 당(唐) 나라에서 다종(茶種)을 얻어와 명하여 지리산에 심게 했다 …… 는 말이 있었다.

아, 우리 군이 바로 이 산 밑에 있는데, 어찌 신라 때의 남긴 종자가 없겠는가.

그래서 매양 부로(父老)들을 만나서 그것을 찾아보게 한 결과 과연 엄천사(嚴川寺)의 북쪽 죽림(竹林) 속에서 두어 떨기의 다종을 발견하게 되었으므로, 나는 매우 기뻐하면서 그 땅을 다원(茶園)으로 만들게 하고, 그 부근은 모두 백성들의 토지이므로 그것을 관전(官田)으로 보상해주고 모두 사들여 차를 재배했는데, 겨우 수년 뒤에는 제법 번식하여 다원 전체에 두루 퍼지게 되었으니, 앞으로 4∼5년만 기다리면 상공할 액수를 충당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마침내 시 두 수를 읊는 바이다.


신령한 싹 올려 성군께 축수코자 하는데 / 欲奉靈苗壽聖君

신라 때의 남긴 종자 오랫동안 못 찾았다가 / 新羅遺種久無聞

지금에야 두류산 밑에서 채취하고 보니 / 如今擷得頭流下

우리 백성 일분의 힘 펴일 것이 우선 기쁘네 / 且喜吾民寬一分


죽림 밖 황량한 동산 두어 이랑 언덕에 / 竹外荒園數畝坡

붉은 꽃 검은 부리가 어느 때나 무성할꼬 / 紫英烏觜幾時誇

다만 백성의 심두육을 치유하게 할 뿐이요 / 但令民療心頭肉

속립아 농에 담아 진상하기는 바라지 않네/ 不要籠加粟粒芽



본관은 선산(善山;일선 一善), 자는 계온(季) ·효관(孝盥), 호는 점필재(佔畢齋), 시호는 문충(文忠) 경남 밀양 출생. 1459년(세조5)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 정자(正字) ·교리(校理) ·감찰(監察) ·경상도병마평사(慶尙道兵馬評事)를 지냄.

성종(成宗) 초에 경연관(經筵官)이 되고, 함양군수 참교(參校) 선산부사(善山府使)를 거쳐 응교(應敎)가 되어 다시 경연에 나갔다. 도승지 이조참판 경연동지사(經筵同知事) 한성부윤 ·공조참판(工曹參判) 형조판서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 문장과 경술(經術)에 뛰어나 이른바 영남학파(嶺南學派)의 종조(宗祖) 문집 《점필재집(佔畢齋集)》저서 《유두유록(流頭遊錄)》 《청구풍아(靑丘風雅)》 《당후일기(堂後日記)》 등








악양동천(岳陽洞天)


                                     뇌계 유호인(兪好仁 1445~1494)



一국歸心天盡頭(일국귀심천진두)     한가닥 돌아가고 싶은 마음 하늘에 닿았는데

岳陽無處不淸幽(악양무처불청유)     악양은 곳곳이 맑고 깊구나.

杜谷林塘春日遠(두곡임당춘일원)     두견새 우는 숲 언덕은 봄 기운에 멀고

輞川煙雨暮山浮(망천연우모산부)     섬진강 안개 속에 저문 산이 떴구나

雲泉歷歷編供興(운천역역편공흥)     구름은 뚜렸이 흥취를 돋우나

軒冕悠悠惹起愁(헌면유유야기수)     초헌의 사부(士夫)는 넌지시 수심이 이네.

經筵每被최三接(경연매피최삼접)     글 자리에서 자꾸만 재촉 받으니

睾負亭前月滿舟(고부정전월만주)     정자에 엎힌 달이 배에 가득하더라.








 본관 고령(高靈). 호 임계(林溪). 자 극기(克己). 1462년(세조 8) 생원에 합격한 뒤 김종직(金宗直)에게 사사하였고 1474년(성종 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봉상시 부봉사(奉常寺副奉事)를 거쳐 1478년 사가독서한 후 1480년에 거창현감 ·공조좌랑(工曹佐郞)을 지내고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494년 장령(掌令)을 거쳐 합천(陜川)군수로 재직 중 병사하였다. 시(詩) ·문(文) ·서(書)에 뛰어나 당대 3절(絶)이라 불리었고 성종으로부터 지극한 총애를 받았으며 당시 4대 학파 중 사림파(士林派)에 속하였다. 장수(長水)의 창계서원(蒼溪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로 <뇌계집>이 있음











두시언해 - 江 村



                            매계 조위(曺偉 1454~1503)


淸江一曲抱村流      맑은 강 한 구비 마을 안고 흐르나니

長夏江村事事幽      긴 여름 이 마을 모든 일이 한가 하네

自去自來堂上燕      절로 가고 오는 지붕 위의 제비요

相親相近水中鷗      물 위에 두둥실 서로 모이는 갈매기려니

老妻畵紙爲碁局      늙은 아내 종이에 장기판 그리고

稚子敲針作釣鉤      어린놈은 고기 낚을 바늘 만드네

多病所須唯藥物      하고한 날 병든 이내심사 오직 약 생각밖에 없으니

徵軀此外更何求      하찮은 몸이 이밖에 또 무얼 구하랴

 





본관 창녕(昌寧). 자 태허(太虛). 호 매계(梅溪). 시호 문장(文莊). 1474년(성종 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검열(檢閱)이 되고 1476년부터 사가독서한 뒤 1479년 영안도경차관(永安道敬差官)이 되었다. 수차에 걸쳐 시제(詩製)에서 장원하여 명성을 떨쳐, 성종의 총애를 받아 경연에 나갔다. 1485년 함양군수로 나가 선정하여, 표리(表裏) ·녹비[鹿皮] 등을 하사받았다. 그 후 도승지(都承旨) ·호조참판 ·충청도관찰사를 역임하고, 1495년(연산군 1) 대사성(大司成)으로 춘추관지사(春秋館知事)가 되어 《성종실록(成宗實錄)》을 편찬할 때 사관(史官) 김일손(金馹孫)이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史草)에 수록하여 올리자 그대로 편찬케 하였다.


후에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로 부총관(副摠管)을 겸직했고, 1498년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갔다가 오는 도중 무오사화(戊午史禍)가 일어나 의주에서 피체되어 투옥되었으나 이극균(李克均)의 극간으로 의주에 장류(杖流)되어 순천에서 죽었다. 성리학의 대가로서 당시 사림(士林)간에 대학자로 추앙되었고, 김종직과 함께 신진사류의 기수였으며, 글씨도 잘 썼다. 문집에 《매계집(梅溪集)》, 글씨로는 《조계문묘비(曺繼門墓碑)》가 있다.













권주가(勸酒歌)


                       노진(盧禛, 1518-1578)


 만수산(萬壽山) 만수봉(萬壽峯)에 만수정(萬壽井)이 있더이다.


 그 물로 술 빚으니 만수주(萬壽酒)라 하더이다.


 이 한 잔 잡으시면 만수무강(萬壽無疆)하리이다.






 



명종,선조 때의 문신. 자는 자응(子膺) 호는 옥계(玉溪) 본관은 풍천(豊川), 함양출생.

29살(1546, 명종1)에 문과 급제. 김인후, 노사신, 기대승 등과 도의(道義)로 교유예조좌랑 등을 거쳐 35살에 모친봉양을 위해 자청하여 지례(知禮)현감을 지내고 청백리에 뽑혔다. 부교리, 이조좌랑, 교리 등을 거쳐, 42살에 사헌부 장령, 사인, 집의 등을 지내고, 홍문관 직제학, 형조참의, 우부승지가 되었다. 47살에 모친을 모시고자 사직하니 왕이 진주목사를 시켰고, 50살에 이조참의가 되었다. 선조 즉위년에 충청감사, 전주부윤이 되고, 54살에 곤양군수를 거쳐 대사간이 되었다. 이듬해 경상감사가 되었다가 병으로 사임했다. 다음해 대사헌이 되었으나 병으로 곧 사임했고, 58살에 예조판서, 이조판서가 되었으나 모친상을 당하여서 병을 얻어 죽었다.









소상팔경가(瀟湘八景歌)


                    이후백(李後白 1520-1578)



平沙에 落雁하니 江村에 日暮이로다

漁船은 已歸하고 白鷗는 잠든 밤에

어듸서 數聲長笛이 잠든 나를 깨우는고



평평한 모래펄에 기러기 앉으니 강촌에 저녁이로구나

고기잡이 배 는 이미 돌아오고 흰 갈매기들도 다 잠든 밤에

어디서 부는지 긴 피리소리가 나의 잠을 깨우는구나


※ 선조 6년 이조참판 겸 예문관제학으로 명나라 주청사로 갔을 때 소상팔경을 구경하시고 지은 시임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계진(季眞), 호는 청련(靑蓮). 함양출신.

관찰사 숙함(淑瑊)의 증손으로, 현감 원례(元禮)의 손자이며, 국형(國衡)의 아들

1555년 식년문과에 병과 급제, 승문원주서를 거쳐, 승문원박사로 사가독서(賜暇讀書).시강원설서·사서·정언·사간·병조좌랑·이조정랑·사인 등 역임

동부승지에 발탁, 이어 대사간 병조참의를 거쳐 도승지,예조참의·홍문관부제학·이조참판 역임

형조판서 평안도관찰사 양관(兩館)의 제학, 호조판서청백리 녹선

문장이 뛰어나고 덕망이 높아 사림의 추앙을 받았다. 《청련집》이 있다.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강익시조이수(姜翼 時調二首)

                          

                             강익(姜翼 1523-1567)



시비(柴扉)에 개 짖는다 이 산촌에 그 뉘 오리.

댓잎 푸른데 봄새 울음소리로다.

아이야 날 추심(推尋) 오나든 채미(採薇)갔다 하여라.




지란(芝蘭)을 가꾸려 하여 호미를 둘러메고

전원(田園)을 돌아보니 반이나마 형극(荊棘)이다.

아이야 이 기음 못다 매어 해 저물까 하노라.



 



자는 중보(仲輔)이고 호는 개암(介菴)이며 본관은 진주이며 함양출신.

조식(曺植)의 문인으로 27살에 진사가 되었으나 벼슬하기를 싫어하여 학문과 후진 양성에 전념. 지리산 기슭 함양 구동(龜洞)에 전지(田地)를 마련하여 살았다. 44살(명종21년, 1566)에 정여창(鄭汝昌)의 신원을 호소하는 상소문을 올린 33명의 소두(疏頭)가 되었다. 이듬해 천거로 소격서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그 해 겨울에 죽었다. 노진(盧禛), 김우옹(金宇顒) 등과 함께 배웠다.















     백자증정부인박씨묘지명(伯姉贈貞夫人朴氏墓誌銘)

                        

                                          연암 박지원(朴趾源1737-1805)


 유인(사대부의 아내. 남자의 경우는 學生)의 이름은 아무이니, 반남 박씨이다. 그 동생 지원 仲美(박지원의 字)는 묘지명을 쓴다. 유인은 열여섯에 덕수이씨 택모(백규의 字) 백규에게 시집가서 딸 하나 아들 둘이 있었는데, 신묘년(1771) 9월 1일에 세상을 뜨니 얻은 해가 마흔 셋이었다. 지아비의 선산이 까치골인지라, 장차 서쪽 자리에 장사지내려 한다. 백규가 그 어진 아내를 잃고 나서 가난하여 살 길이 막막하여, 어린 것들과 계집종 하나, 솥과 그릇, 옷상자와 짐궤짝을 끌고 강물에 배를 띄워 산골로 들어가려고 상여와 더불어 함께 떠나가니, 내가 새벽에 두포에서 이를 전송하고 배 가운데서 통곡하며 돌아왔다.


아아, 누님이 시집가던 날 새벽 화장하던 것이 어제 일만 같구나. 나는 그때 갓 여덟 살이었다. 멋대로 드러누워 말처럼 뒹굴고 발을 동동 구르면서 새 신랑의 말투를 흉내 내어 말을 더듬거리며 점잖을 빼니, 누님은 그만 부끄러워 빗을 떨구어 내 이마에 맞았다. 나는 성나 울면서 먹으로 분에 뒤섞고 침으로 거울을 더럽혔다. 그러자 누님은 옥 오리 금 벌 따위의 패물을 꺼내 내게 뇌물로 주면서 울음을 그치게 했었다. 지금에 스물여덟 해 전의 일이다.


말을 세워 강 위를 멀리 바라보니, 붉은 조기가 바람에 펄럭거리고 돛대 그림자는 물 위에 꿈틀거렸다. 건너편 물가에 이르러 숲을 돌아가더니 가리워져 다시는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강 위 먼 산은 검푸른 것이 마치 누님의 쪽진 머리 같고, 강물 빛은 누님의 화장 거울 같고, 새벽달은 누님의 눈썹 같았다. 그래서 울면서 빗을 떨구던 일을 생각하였다. 유독 어릴 적 일은 또렷하고 또 즐거운 기억이 많은데, 세월은 길어 그 사이에는 언제나 고생하고 떨어져 있었으며 가난과 곤궁을 근심하였으니, 덧없기 마치 꿈속과도 같구나. 형제로 지낸 날들은 또 어찌 이다지 짧았더란 말인가.



去者丁寧留後期 떠나는 이 거듭해서 뒷기약을 남기지만

猶令送者淚沾衣 오히려 보내는 사람 눈물로 옷깃 적시게 하네.

扁舟從此何時返 조각배 이제 가면 언제나 돌아오나

送者徒然岸上歸 보내는 이 하릴없이 언덕 위로 돌아가네



박지원은 실학 대사상가, 대문호이다. 안의현감(함양군)을 역임하며 저술활동과 실학사상을 펼쳤음






한죽당(寒竹堂)의 겨울 밤

                                

                               청장관 이덕무(李德懋 1741-1793)



더운 여름 구중(九重)의 깊은 궐문 조알(朝謁)하였고 / 炎天京闕覲

초겨울 찬 바람에 영남의 화산우(花山郵)로 돌아왔도다 / 陽月嶺郵還

고향 편지 천리 먼 길 날아오고 / 家札飛天里

관가(官家)의 술자리엔 일만 봉우리 둘려 있도다 / 官樽繞萬山

차가운 나무 옆에서 아참(衙參)을 파하고 / 罷衙寒樹側

감도는 구름 사이에서 관인(官印)을 봉하네 / 封印亂雲間

한 질의 서적을 맑은 밤에 열람하고 / 一帙淸宵閱

단정히 앉으니 잠시나마 한가하네 / 端居得暫閒

공무의 겨를이라 취미가 풍족하니 / 公暇饒風味

관노를 보내어 술 얻어왔도다 / 官奴借酒還

깜박이는 등불은 차가운 연못에 비치고 / 寒燈輝古沼

외로운 화각(畵角) 소리 황량한 산에 울리네 / 孤角響荒山

푸른 아지랑이 감도는 속에서 먹고 마시며 / 飮食靑嵐裏

붉은 대 우거진 가운데서 앉았다 누웠다 / 起居紫竹間

좋은 관함이 내각을 겸했으니 / 華啣兼內閣

말안장 한가할 겨를 전혀 없어라 / 鞍馬未全閒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무관(懋官)이며 호는 형암(炯庵), 아정(雅亭), 청장관(靑莊館)이며 사근촬방(함양군 수동면)을 지냈음

유득공·박제가·이서구(李書九)와 함께 사가시집(四家詩集) 《건연집(巾衍集)》을 내어 문명을 떨쳤다.

1778년(정조 2년)에는 서장관 심염조(沈念祖)를 수행하여 청나라에서 기균(紀均)·반정균(潘庭筠)·이조원(李調元)·이정원(李鼎元) 등의 석학과 교류하였다. 또한 청나라에서 여러 자료 및 고증학 관련 저서를 가져와 그의 학문을 발전시킴. 귀국 후 북학을 제창함.

1779년 박제가·유득공·서이수(徐理修)와 함께 규장각 검서관이 되어, 그들과 함께 4검서관으로 이름을 떨쳤다.

주요 저서로《관독일기(觀讀日記)》 《기년아람(紀年兒覽)》《앙엽기(盎葉記)》《영처시고》

《한죽당수필》 등이 있음

출처 : 지리산문학회
글쓴이 : 마당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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