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관련글

처음의 각도들(2012년 봄의 시들)/장은정

시치 2013. 4. 12. 00:01

처음의 각도들

2012년 봄의 시들

장은정

1

어떤 일상은 오로지 습관으로 구성된다. 습관의 시간은 어제에서 오늘로, 오늘에서 내일로 이어지면서 그 형태를 지속한다. 이때 공간의 의미는 서서히 굳어가기 시작하며 그 공간에 포함된 존재들의 의미 역시 서서히 자명한 것으로 변해가기 시작한다. 이러한 자명성이 위험한 것은 우리에게 모든 대상이 ‘이미 완전히 알려진 것’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빛 속에서 환하게 빛나는 모서리들처럼, 어둠과 비밀을 잃어버린 대상은 더 이상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지 않는다. 사물들은 얌전히 놓여 있다. 유용성과 경제성의 좌표에 안전하게 착지한 사물들에겐 시선이 없으며, 우리만이 사물을 바라보고 이름을 붙이고 용도를 정할 수 있는 권위를 가진다. 하지만 이 능숙한 안전은 관계 맺을 수 있는 타자의 자리를 삭제한다. 우리의 손 안에 익숙하게 길들여진 사물이 아니라, 사물 그 자체의 세계를 응시할 때 우리에겐 보이지 않는 것들이 생겨난다. 아이들은 장롱이 자꾸만 나를 쳐다봐서 무서우니 불을 끄지 말아달라고 부탁한다. 그들에게 장롱이란 ‘여전히 알려지지 않은’ 것들이 도사리고 있는 살아있는 존재이며, 그들은 인간의 질서와는 전혀 다른 차원에 속하는 사물의 세계를 그 자체로 직관한다. 낯선 것들이 불쑥 등장하는 이 시간은 유용성과 경제성으로 조직된 자명한 공간의 의미를 존재론의 차원으로 옮겨놓는다. 이것은 때로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의미의 구조를 완전히 지워버리거나 흔들어놓는 것이기에 파괴적이다.

이 세상에 처음 해보는 것이 많겠지만

막 걸음마를 뗀 아이의 발걸음이

처음 해보는 것이 꽃 앞에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아이가 눈을 감은 채

물방울에 손을 집어넣고

꽃 속에 저무는 발걸음과 만나는 것이 처음 해보는 것이었습니다

꽃에 스치는 물방울도 길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온 마음들이 비치는 물방울이

바다처럼 맺혀서 보는 이도

이 세상에 나서 처음 보는 것 같은 저녁인 것이었습니다

저도 그렇게 눈을 감는 일이었습니다

가만히 가만히

꽃 앞에 무릎 꿇고 있는, 처음인 저녁인 것이었습니다

― 박형준, 「처음 보는 저녁」(『문예중앙』 2012년 봄호)

“막 걸음마를 뗀” 아이의 눈에 비친 세계 속에는 익숙한 것이라곤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처음 보는 낯선 것들이며, 두려움과 설렘 속에서 사물들은 아이에게 손을 뻗어온다. 시 속의 아이는 꽃과 함께 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시는 아이가 꽃 앞에 서 있다고 쓰는 대신, “막 걸음마를 뗀 아이의 발걸음이 / 처음 해보는 것이 꽃 앞에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라고 쓴다. 이 구절이 너무나 섬세한 것은 만약 아이가 꽃 앞에 서 있다고 쓰는 순간, 문장 자체에서 무게 중심은 꽃이 아니라 아이에게 과도하게 쏠리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아이는 사물을 보는 자로서 시선의 권위를 가진 자가 되고 만다. 익숙한 습관들로 구성된 어른들의 세계가 지닌 시선으로 꽃을 보고 있는 아이를 묘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시는 꽃 앞에 서 있는 것이 아이가 아니라 “아이의 발걸음”임을, “처음 해보는 것”임을 강조한다. 이 때문에 꽃 앞에 서 있는 것은 꽃만큼이나 알려지지 않은 존재가 된다. 이러한 섬세한 언어 속에서 꽃과 아이는 대등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모두 비밀스런 존재들이다. 그러니 “아이가 눈을 감은 채 / 물방울에 손을 집어넣”는 것은 비밀이 비밀을 만나는 순간, 비밀이 비밀을 만지는 순간이다. 그 순간을 목격하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고, 동시에 파괴적인 일이다. 습관과 익숙함의 시간은 더 이상 지속되지 못하고 붕괴되면서 급기야 “이 세상에 나서 처음 보는 것 같은 저녁”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아이가 꽃 앞에 서서 물방울에 손을 집어넣는 것이 “눈을 감은 채” 이루어졌다는 것을 상기하자. 아이가 불러온 저녁은 우선 시선의 차단을 근원적 조건으로 삼는다. 표면적 외부 세계의 차단만이 아이의 손이 “꽃 속에 저무는 발걸음과 만”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시는 이중의 겹으로 이루어져 있다. 눈을 감은 아이가 꽃을 만나고 저녁을 불러오는 것이 그 첫 번째라면, 그런 아이를 바라보고 있는 화자가 두 번째이다. 이 후자의 자리는 특별하다. 왜냐하면 그 곳은 목격자로서의 화자의 자리이고, 자신이 본 것을 고스란히 기록하는 시인의 자리이며, 그 기록을 읽고 듣는 독자의 자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전자는 눈을 감고 있지만 후자는 눈을 감고 있는 아이를 ‘보고’ 있어서 여전히 눈을 뜨고 있다. 그런데 시의 결말에 이르면 그 눈마저 감게 된다(“저도 그렇게 눈을 감는 일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꽃 앞에 서 있는 것은 더 이상 아이의 발걸음이 아니라 아이를 보고 있던 화자이며 시인이며 독자이다. 아니, 화자도 시인도 독자도 아니다. 그저 꽃 앞에 놓여 있는 것은 “처음 해보는 것”이며 “가만히 가만히 / 꽃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처음인 저녁”이다.

그러니 박형준의 「처음 보는 저녁」은 꽃을 처음 보는 아이를 그리는 시라고 할 수 없다. 만약 아이만을 그렸다면 이 시는 아이를 바라보다가 눈을 감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차라리 이 시는 ‘처음으로서의 시’라고 해야 할 것이다. “처음 해보는 것”은 눈을 감음으로써 관습과 익숙함의 세계를 붕괴시키고 이전엔 없었던 저녁을 도래하게 만든다. 이 시는 처음의 기원을 아이에게 두고 있지만, 사실상 그 기원은 시인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아이가 눈을 감고 꽃에 손을 넣는 순간을 만난다 하더라도 관습적 시선은 그 순간에 일어나는 ‘처음’을 알아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시가 일으키는 혁명은 ‘아이가 꽃 앞에 서 있다’는 일상적 문장이 사실은 아이와 꽃이라는 비밀스런 존재를 훼손할 수도 있음을 인식하고, “아이의 발걸음이 / 처음 해보는 것이 꽃 앞에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라고 고쳐 쓸 수 있음에서 비롯한다.

2

긴 잠에서 깨어난 외할머니가

조용히 매실을 담그고 있다

긴 잠을 자고 있는 내가 깨어날 때까지

나는 차를 너무 많이 마셨나

눈물에 휩쓸려 바다까지 떠내려갔나

하루는 거대해지고

하루는 입자처럼 작아져 보이지 않는다

아픈 내 배를 천천히 문질러주듯

외할머니가 햇볕에 나를 가지런히 말린다

슬퍼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본 적 없는 신을 사랑해본 적도 있다

본 적 없는 신을 그리워해본 적도 있다

그저 외할머니의 치마 속으로 들어가

긴 겨울을 여행하고 싶었을 뿐인데

긴 잠에서 깨어난 내가 눈물을 참는 사이

밤하늘에선 한 번도 본 적 없는 신이 내려오고 있다

저 눈이 녹으면 흰 빛은 어디로 가는가

― 강성은, 「환상의 빛」(『문예중앙』2012년 봄호)

우리는 깨어있는 의식적 시간과 잠이 드는 무의식적 시간을 매일 오가며 살아가고 있다. 이는 태어난 이후로 매일 반복되는 것으로 너무나 익숙한 일상적 리듬이다. 하지만 강성은의 「환상의 빛」을 읽고 있노라면 하나의 영역에서 또 다른 영역으로 건너가는 일이 자명하거나 자연스러운 일이 아닌 것만 같다. 잠들어가면서 잠에서 깨어나면서, 매일 밤 그리고 매일 아침 우리에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일까?

이 시의 시간은 아직은 잠들어 있는 순간으로부터 시작하여(“긴 잠을 자고 있는”) 잠에서 깨어난 순간으로 도달하는(“긴 잠에서 깨어난 내가”)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몽롱하고 부드러운 잠의 세계에서 날카로운 모서리들이 반사되는 의식의 세계로 이동하는 것은 자발적인 의지에 의해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다. 이미 의식의 세계로 완전히 건너간 외할머니가 “긴 잠을 자고 있는” 나를 기다리며 조용히 매실을 담그고 있을 때, 아직은 잠들어 있는 ‘나’는 마치 물속에 잠겨있는 것처럼 “하루는 거대해지고 / 하루는 입자처럼 작아져 보이지 않는다”. 그때 할머니가 “아픈 내 배를 천천히 문질러주듯” “햇볕에 나를 가지런히 말린다”. 날카롭게 쏟아지는 빛은 잔인하게도 물기의 잠을 파고들어 서서히 잠으로부터 ‘나’를 일으켜 세운다. 몽롱하던 물기들이 천천히 말라갈 때, “슬퍼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이 구절에 이르러 우리는 크게 놀라게 되는 것 같다. 잠드는 것, 잠에서 깨어나는 것은 매일 반복해서 경험하던 것이었지만 사실 그것이 얼마나 슬픈 일인지에 대해 전혀 몰랐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깨어난다는 건 아직은 의식의 세계에 속하지 못한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이므로 의지가 개입되는 일이 아니다. 잠에서 깨어난다는 것은 밀려나는 것, 잃어버리는 것, 쫓겨나는 것과 같다. 이것은 상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잠을 소유한 적이 없다. 마치 눈이 눈의 흰 빛을 소유한 적이 없듯이. 잠든 순간만큼만은 우리는 잠에 속한 존재로 지낼 수 있다. 그러나 깨어남으로서 우리는 자기 자신으로 돌아와야 한다.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는 일이야말로 가장 큰 상실인 것일지도 모른다. 물속에서 편히 잠겨있던 우리를, 빛의 손이 깊숙이 들어와 건져낸다. 매일 아침, 잔인하게도.

박형준의 「처음 보는 저녁」이 “처음 해보는 것”을 통해 시적 순간을 구현했다면, 강성은의 「환상의 빛」은 ‘매일 잃어버리는 것’을 통해 시적 순간을 포착한다. 가끔은 어떤 기분이 넌지시 삶의 진실을 일러준다고 느낄 때가 있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찾아오는 슬픔이 그런 기분은 아닐까. 당연하고 자명한 생의 리듬 내부에 출렁이고 있던 슬픔이라는 감정을 들여다볼 수 있는 시. 그러나 그 상실의 슬픔이란 실제로 가지고 있던 것을 잃어버린 슬픔이 아니라, “본 적 없는 신을 사랑”하거나 “본 적 없는 신을 그리워”하는 것처럼 경험적 차원을 뛰어넘는 인간을 형성하는 조건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그 슬픔을 조용히 직면하고 있을 때 비로소 환상의 빛을 알아볼 수 있다(“밤하늘에선 한 번도 본 적 없는 신이 내려오고 있다”). 소유한 적이 없던 것을 잃어버리면, 잃어버린 것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3

가위를 들고 풍경을 자르는 너

만날 때마다 일그러지는 얼굴이 있었다 좁은 그곳에도 여닫히는 기관이 있어 밀실에 어울리는 표정이었다

밀실에 드는 광선은 분재에 남은 의지였다 몸을 비트는 펜다는 왜 자신의 생장에 반하여 어두운 쪽으로 잎을 벌리는지

그릇된 방향으로 분무기를 들고 분재에 물을 뿌렸다 밀실을 비추는 무지개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색깔만큼의 색깔을 발견하며

너는 밀실을 위해 정원을 지우고 있고 나는 정원을 위해 벽돌을 쌓고 있다 내가 물을 뿌리면 네가 멍든 몸을 비틀어

우리는 무지개 속에서 일손을 놓고 서로의 첫 얼굴을 바라본다

우리는 서로의 표정에 세들어 사는 임차인, 서로의 얼굴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고

펜다 잎사귀에 광선이 모인다

둥근 어둠, 이것은 유일한 합의점

― 송승언, 「변검술사」(『창작과비평』2012년 봄호)

시에서 너는 “가위를 들고 풍경을 자르”며 분재를 하고 있다. 가장 적합한 모양, 적절한 형태를 위해 식물을 다듬는 모습은 일상적 시선 속에서는 평화로운 취미 생활이겠지만, 이 시는 그 조용한 가위질에 숨어 있는 격렬한 의지를 읽어낸다. 사실상 분재는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를 자신이 상상하는 이상적 형태에 가깝게 조율하고 규정하며 재단하는 일이다. 그것은 하나의 존재와 또 다른 존재가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어서 분재 또한 자신을 가위질하는 의지를 고스란히 승낙하지는 않는다. 직접 가위질에 맞설 수는 없는 분재는 “밀실에 드는 광선”의 반대편으로, 즉 “자신의 생장에 반하여 어두운 쪽으로 잎을 벌”린다. 생장의 조건을 거스르는 것만이 가위질하는 손의 의지를 자꾸만 벗어나는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맞섬은 스스로의 생존을 거스르는 방향으로 진행된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삶의 형태를 규정하는 의지에 맞서는 유일한 방법은 삶을 포기하는 방식인 것이다.

여기까지는 송승언의 「변검술사」를 읽기 위해 가장 전제가 되는 요소들이라고 할 수 있을 뿐, 시에 관한 직접적 해석이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시는 앞서 지적한 지점들을 가장 기본적인 의미의 층위에 깔아두고 그 이상의 지점으로 나아가고자 하기 때문이다. 시는 오히려 하나의 존재와 또 다른 하나의 존재가 격렬히 맞설 때 (다른 한 쪽이 너무나 미미한 영향력을 가진 존재라고 하더라도)필연적으로 발생하는 표정에 주목하고 있다.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버리는 그 표정에는 평화로워 보이는 가위질의 진정한 본질과 비명 소리도 내지 않고 깔끔하게 잘려나가는 존재의 본질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런데 그 표정은 “만날 때마다 일그러지는 얼굴”로, “좁은 그곳에도 여닫히는 기관이 있어 밀실에 어울리는 표정”이다. 흥미롭게도 이 얼굴에 대한 묘사는 모든 인간적 요소가 제거된, 생물학적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즉 하나의 존재가 타자에 대해 완벽히 무관심한 채로 어떤 폭력을 행사할 때 양쪽 모두의 표정에 나타나는 것은 모든 인간적 요소가 사라진 표정인 것이다. 그저 기관이 열리고 닫히는 것으로만 구성되는 표정.

그런데 이 시의 특별한 점은 시를 종합하는 최종적 심급으로서의 시적 목소리가 분재 혹은 분재를 하는 너,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5연이 바로 그 지점이다. 5연이 등장하기 이전의 부분까지만 해도 ‘너’는 분재를 하고 있는 존재로 명확히 지시되고 있었다면 5연에 이르면 ‘너’는 누구인지 명료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즉 “너는 밀실을 위해 정원을 지우고 있고”라는 구절에서의 ‘너’가 분재인지, 분재를 하는 존재인지 불명확하며, “나는 정원을 위해 벽돌을 쌓고 있다”는 구절에서의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갑자기 주어의 존재가 흐려지는 것은 갑작스러운 ‘나’의 출현 때문이다. 사태의 바깥에서 너를 관찰하던 화자가 ‘나’라는 직접적 주어로 불쑥 등장함으로써 시의 평면적 구조는 단숨에 입체적으로 변하게 된다. 그런데 이때의 ‘나’가 분재인지, 분재를 하는 자인지, 아니면 이 둘을 지켜보던 제 3의 인물인지를 가늠할 수 없다. 그 때문에 ‘나’는 ‘너’인 동시에 ‘너’가 아닌 가능성을 모두 획득하게 된다. 화자의 이러한 불명확한 위치 설정은 “밀실에 어울리는 표정”을 어떤 죄책감이나 분노 같은 감정적 층위로 환원하지 않고 그 표정의 비인간성 그 자체를 건조하고 탁월하게 형상화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그러니 송승언의 「변검술사」는 박형준의 「처음 보는 저녁」과 완전히 정반대의 상황을 시적 정황으로 택하고 있는 셈이다. 즉 일상성에 의해 가려져 있던 두 존재들이 서로의 비밀을 주고받는 순간이 아니라, 하나의 존재와 또 다른 존재가 서로의 존재를 파괴하기 위해 맞서는 순간을 그리는 것이다. 그 순간에서 드러나는 것은 모든 인간적 요소가 박탈된 채 단지 기관이 열렸다가 닫히며 표정을 만들어내는 신체로서의 가면이며, 시는 일상 속에 숨겨져 있던 폭력성을 고스란히 형상화하고 있다.

4

레이디는 상자에서 빠져나오며 마술에 대해 생각했다

미치기 직전의 상태로 끝까지 살아가는 식물처럼

나는 아프고 너는 지켜만 보았는데

너를 좋아해서 웃어만 지는 얼굴

잘려 나간 팔다리가 공손히 식어 가는 동안에도

몸에서는 부드러운 털이 자라났지

모자 속의 토끼

사과 속의 코끼리 같은

순진한 준비물과

대괄호가 많은 아이들의 말 속에서

레이디는 죽었다 살았다를 반복했다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무릎이

명사의 밧줄처럼 잘 땋여

거기 남았다

우린 모두 그가 다녀온 공간을 위로하고 있다

레이디는 상자에서 빠져나오며 마술에 대해 생각했다

통증으로만 구성된 꿈을 꾸었다는 듯이

이 놀라운 상자를 마술사에게도 만들어 주겠다고 생각했다

― 유계영, 「지그재그」(『문장웹진』3월호)

마술에서 절대 빠지지 않는 요소가 있다면 바로 미녀일 것이다. 도저히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일들이 척척 일어나는 마술의 무대 위에서 미녀는 언제나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자발적으로 상자 안으로 들어간다. 유계영의 「지그재그」는 바로 그런 미녀들, “레이디”의 입장에서 쓰인 시다. 마술쇼가 벌어질 때 모두가 마술사의 손가락 끝에 집중한다면, 이 시는 레이디의 잠깐 보였다가 곧 숨겨지고, 숨겨지는 동안 절단되었다가 다시 완전하게 합쳐지는 그 몸에 집중한다. 시는 그 몸을 “미치기 직전의 상태로 끝까지 살아가는 식물”로 비유하는데, 이때의 ‘식물’이란 동물에 속하는 인간과는 다르기에 고통이 없는 미적 존재로 인식되기 쉽다는 점에서 미녀의 몸과 상응한다.

마술사의 손가락 끝이 아니라 레이디의 몸에 집중한다는 것, 그것은 마술과 같이 ‘신비한 일’들이 사실은 레이디와 같이 어떤 희생자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희생자는 언제나 웃고 있음으로 우리의 죄책감을 완화시켜주고 신비의 상징을 완성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 레이디의 몸은 보였다가 보이지 않았다가를 반복한다. 그런데 그 어떤 경우에도 레이디는 보이는 존재로서만 규정될 수 있다. 보이는 몸은 미적 대상으로서, 숨겨지는 몸은 잘려나가는 상상적 육체로 존재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레이디에게 ‘목소리’가 없다는 점이다. 언제나 마술 속에서 미녀들은 웃고 있을 뿐, 말하지 못한다. 이 시는 레이디의 보이지 않는 내면의 생각들을 시적 구절들로 삼는다.

상자의 틈으로 칼날이 서늘하게 들어오고, 관객의 탄성 속에서 레이디의 몸은 “지그재그”로 잘려나간다. 레이디는 아프지만 언제나 웃고 있고, 마술사는 그런 그녀를 그저 지켜보기만 한다. 그녀의 몸은 “모자 속의 토끼 / 사과 속의 코끼리 같은 / 순진한 준비물과 / 대괄호가 많은 아이들의 말 속에서” “죽었다 살았다를 반복”한다. 그러나 그것은 마술사와 관객들에게 하나의 신비에 불과하다. 사실상 그 신비는 “통증으로만 구성된 꿈”인데도 말이다. 레이디는 “상자에서 빠져나오며” “이 놀라운 상자를 마술사에게도 만들어 주겠다고 생각”한다. 이 구절에 이르면 우리는 미녀가 지시를 내리고, 마술사가 상자의 내부로 들어가는 장면을 상상하게 된다. 이것은 단지 자리 바꾸기에 지나지 않는데도 굉장히 놀라운 상상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머릿속에서 마술쇼란 언제나 남자 마술사와 미녀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것은 자명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 시는 그 자명성이 하나의 폭력적 자의성에 지나지 않음을 “레이디”라는 재치 있는 명명과 발랄한 진술들로 보여주고 있다.

5

밤, 붉은 여자가 떠났다

사랑, 침실로

여자가 창문에 고개

들이밀고 내 침대에 올라왔지

사랑, 침실로

옆에 누워 속삭이며

죽음의 이불을 덮자

하이얀 눈 굴리며

죽음의 이불을 덮자

나는 여자의 손 힘껏 움켜쥐었어

쑥 빠져 버린 팔

가슴에 품고 거리에 나와 소리 질렀지

이걸 봐! 왼팔과 오른팔이

부메랑처럼 붙어 있는 붉은 팔,

던져도 다시 돌아오는 밤의 발톱을

그러나 사람들은 떠났네

사랑, 침실로

서로의 발 보며 잠들었던 부랑아들

서로의 몸 깔고 누웠던

노숙자들, 모두 여자의 허리

끌어안느라 정신없었지

여자가 내게 말했다

그 팔로 베개를 해보는 건 어때?

낮은 신음 소리로 자장가

불러 줄게 낭떠러지 같은

여자의 입맞춤

밤은 끝나지 않았지 여자는 사람들

목덜미 핥으며 시커먼

속삭임 멈추지 않고

나흘 밤 되도록 사람들

깨지 않고 나는 홀로

우두커니 거리에 서서 되돌아오는

여자의 팔을

되돌아오는 긴긴 밤을 계속

계속, 던져야만 했네

― 김소형, 「사랑, 침실」(『문장웹진』 2월호)

여기, 결코 죽지 않는 여자가 있다. 그녀는 “창문에 고개 / 들이밀고 내 침대에 올라”와 “옆에 누워 속삭”이며 “죽음의 이불을 덮”는다. 그때 나는 “여자의 손 힘껏 움켜”쥐는데, 팔이 “쑥 빠져 버”린다. 그런데 빠져버린 그 팔은 “왼팔과 오른팔이 / 부메랑처럼 붙어 있는 붉은 팔”이다. 양쪽에 왼손과 오른손을 달고 있을 이 긴 팔의 이미지는 그 자체로도 굉장히 압도적이다. 우리는 그동안 잘린 팔에 대한 이미지들을 시 속에서 숱하게 봐왔지만 이 시에서의 팔은 왼팔과 오른팔이 연결된, 즉 절단된 것이 아니라 좌우가 연결되어 있는 온전한 형태로 살아있는 팔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 팔에게는 목소리마저 남아있어서 “그 팔로 베개를 해보는 건 어때?”하고 묻곤 “낮은 신음 소리로 자장가”를 불러주기까지 한다. 그 자장가 속에서 밤은 끝이 나질 않고 사람들은 나흘이 지나도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무엇보다 끔찍한 것은 ‘나’는 이 팔에게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이다. “나는 홀로 / 우두커니 거리에 서서 되돌아오는 / 여자의 팔을 / 되돌아오는 긴긴 밤을 계속 / 계속, 던져야만 했네” 끝없이 돌아오는 이 이상한 팔, 노래를 부르며 사람들을 잠재우는 팔, 도대체 이것은 무엇인가.

우선 이 팔을 매번 꼬박꼬박 돌아오는 밤에 대한 형상화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팔은 ‘무엇’에 대한 비유라고 보기엔 그 이미지가 너무 압도적이며 그 자체로 독립성을 지닌다. 그러니 우리는 이 저 혼자 살아 움직이는 팔의 완결성을 시적 해석에 있어 가장 우선 순위로 삼아야 한다. 그렇다면 이 팔은 무엇인가. 이에 대해 또 하나 반복되는 “사랑, 침실”이라는 시적 장소가 그 힌트가 될 수 있을 듯 하다. 시의 초반에 붉은 여자가 떠난 곳도 “사랑, 침실”이고 내 침대가 있던 곳도 “사랑, 침실”이며 사람들이 떠나는 곳도 “사랑, 침실”이다. 이 반복적으로 회귀하는 장소는 사실상 이 팔의 기원이기도 하다. 가장 내밀하고 사적인 장소, 휴식과 사랑, 어둠과 죽음이 깃든 장소. 시는 오로지 이 장소로부터 시작하여 이 장소로 무한히 회귀하는 팔의 이미지를 통해 오로지 “사랑, 침실”로만 가득 채워져 있는 시 한편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 곳은 우리가 한번도 가본 적 없는 세계이며 오로지 「사랑, 침실」의 시를 통해서만 가닿을 수 있는 유일한 세계이다. 고통스럽지만 달콤한 낮은 신음 소리가 자장가로 울려 퍼지고, 저 혼자 살아 움직이는 팔이 따스한 베개가 되어 사흘이 넘도록 깨지 않는 잠을 불러오는 곳인 것이다.

다섯 편의 시들로 제각기 다른 ‘처음’의 지점들을 읽어보았다. 시적 순간이 생성하는 ‘처음’이란 단지 시적인 수사적 표현이 아니라, 일상적 언어 내부에 내재된 폭력을 인지하고 그 언어와의 투쟁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처음’은 시의 출발점이라기보다 최종적인 도착점이며, 그 도착점에 이르기까지는 시 속에선 보이지 않는 과정으로서의 집요한 시적 투쟁이 전제된다. 그러니 어쩌면 ‘시란 무엇인가’라는 오래된 질문은 그 직접성 때문에 오히려 핵심을 비껴나간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더 중요한 질문은 ‘이 시는 어디에서 왔는가’가 아닐까. 그 기원을 되짚어가는 일은 그 자체로 ‘시란 무엇인가’에 답하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약력 : 1984년 부산 출생,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대학원 석사과정 재학 중, 2009년 대산대학문학상 평론 부문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