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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안 / 계간리뷰]폭설을 베끼다 -송재학

시치 2012. 12. 24. 18:05

[시안 / 계간리뷰]

 

폭설을 베끼다

                        송재학

 

폭설

                 위선환 

몸속에 가시뼈를 키우는 물고기가 자라나는 가시뼈에 속살이 찔리는 첫째 풍경 속에서는  

몸속에 두 귀를 묻어버린 물고기의 몸속보다 깊은 적막을, 적막하므로 무한한 그 깊이를  

누가 내 이름이라 지어 불렀다. 대답하는 목소리가 떨렸다.  

눈 뜨고 처음 내다본 앞바다에 희끗희끗 눈발이 날리는 둘째 풍경 속에서는  

야윈 손이 반음씩 낮은 음을 짚어가는 저녁 무렵에 어둑하게 어스름이 깔리는 音調를  

새들은 어둔 하늘로 날고 살 속에서는 신열을 앓는 뼈가 사뭇 떠는 오한을  

누가 내 이름이라 지어 불렀다. 대답하는 목소리가 떨렸다.

잠깐씩 돌아다본 들판에 돌아다볼 때마다 눈발이 굵어지는 셋째 풍경 속에서는  

눈꺼풀에 점점이 점 찍힌 점무늬 아래로 한없이 떨어져 내리는 반점들의 하염없는 나부낌을

아득하게 깊어진 눈구멍 속에서 속날개를 털며 자잘하게 날갯짓도 하는 설렘을

누가 내 이름이라 지어 불렀다. 대답하는 목소리가 떨렸다.

물굽이와 들판과 나를 덮고 묻는 눈발이 자욱하게 쏟아지는 마지막 풍경 속에서는  

천 마리씩 떨어지는 여러 무리 새떼들이 바짝 마른 가슴팍을 땅바닥에 부딪치며 몸 부수는 저것이  

폭설인 것을  

내리 꽂고 혹은 치솟는 만 마리 물고기들은 물고기들끼리 부딪쳐서 산산조각 나는 것 또한

폭설인 것을

따로 이름 지어 부르지 않았다. 깜깜하게 쏟아지는 눈발 속에서, 누구인가 그가!

내 이름이라 지어 불렀다. 대답하는 목소리가 떨렸다.

   

                                                                                                    -「폭설」위선환 /『현대시학』2009년 7월호

 

20년 전의 어떤 기억!

시집 원고를 퇴고하다는건 지겨움과 역겨움 등 고기를 먹는 것처럼 점차 불쾌해지는 감정과의 싸움이다. 반 년 쯤 시집 원고를 반복해 들여다보았을 때 급기야 구토를 하고 말았다. 자기 시를 백 번 쯤 읽으면 시를 포함해서 스스로의 모든 것이 싫어진다. 언제부터인가 자신의 시가 역겨울 때 의례히 『민음사판』 <오늘의 시인총서> 초기 시리즈를 뒤적거린다. 그 시집들을 읽으면 시집의 주인공은 청춘의 몸을 통과하는 청년 송아무개. 최근에 와서 스스로의 시가 끔찍해질 때, 김경주와 진은영, 이근화의 시를 읽는다. 젊은 시인의 시를 읽는다는 것은 첨단의 내 청춘을 다시 뒤적인다는 것과 무어 다르랴. 위선환은 어떨까. 그 목록에 위선환의 『새떼를 베끼다』를 작년 연말 쯤에 넣었다. 몇 편은 연필로 적어보기도 했다.

 

공중에서는 새의 몸이 빈다고, 새떼도 큰 몸이 빈다고, 빈 몸들끼리 뚫렸다고, 그러므로 空中이다, 라고 쓴다

 

꽃이 향기와 색의 매혹이라면 새는 움직이는 매혹이다. 새떼의 움직임은 감각이 도달하는 가장 높고 먼 곳의 매혹이다. 위선환의 새떼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전율아닌 전율이다. 평이한 언어들이 서서히 벼려지고 예리해지면서, 혹은 부딪치며 으깨어지며 몸서리치는 전율의 언어로 전환되었다. 모든 언어들은 새떼의 날개와 날기로 전환되었다. 새떼들은 부딪치면서 생존하는 것처럼 보인다. 새떼들은 허공과 또 다른 새떼를 관통하는데 시인의 눈은 새떼가 너무 많기에 새떼는 새떼 사이로 관통해야 한다고 필연적으로 생각한다. 그게 훨씬 더 <관통>적이다. 히치코크의 영화 <새>처럼 위선환의 새들도 평범한 새떼가 아니다. 그것들은 시인의 몸을 관통하면서 허공을 관통하면서 새떼 스스로의 몸을 관통한다. 왜 관통하는가 하는 성찰도 관통한다. 그 모든 사물을 관통하면서 남긴 새떼의 항적은 경이롭다.

그러다가 「폭설」을 만났다. 시선을 한정한다면「새떼를 베끼다」가 위선환의 형이상학이라면 「폭설」은 그 형이상학에 반하는 물질의 형이하학이다. 둘 사이의 간격은 그러나 구조가 흡사한 것처럼 감정몰입도 흡사하다. 평이한 언어와 리듬을 결합하면서 곡진할 것이라는 서정시의 전통적 전략이다. 하지만 위선환의 언어들은 마치 영화 「존 말고비치 되기」의 주인공 크레이그처럼 사람/사물의 내부로 들어가는 비의의 언어이다.

 

몸속에 가시뼈를 키우는 물고기가 자라나는 가시뼈에 속살이 찔리는 첫째 풍경 속에서는  

몸속에 두 귀를 묻어버린 물고기의 몸속보다 깊은 적막을, 적막하므로 무한한 그 깊이를  

누가 내 이름이라 지어 불렀다. 대답하는 목소리가 떨렸다.

 

시「폭설」의 1연에서 3연까지의 변주는 반복이라는 기계의 기어뭉치를 달고 있다. 반복은 이 시의 하염없이 굽은 척추이다. <누가 내 이름이라 지어 불렀다. 대답하는 목소리가 떨렸다>라는 연의 되풀이는 아주 중요한 되새김이다. 그 구절의 떨림이 시의 전체/폭설의 떨림을 재생반복시킨다. 반복은 바로 폭설 공간의 언어화이다. (현실의) 폭설처럼 위선환의 언어들은 무한반복된다. 그 무한반복이 폭설의 풍경이라면 위선환의 시적인 폭설은 그 무한반복되는 도저한 풍경의 뼈를 전시하는데 있다. 따라서 위선환 폭설의 언어들은 폭설의 풍경으로서의 언어가 아니라 풍경의 뼈이자 풍경의 심리적 깊이에 해당된다. 당연히 그 뼈들은 조금씩 자라거나 풍화 침식한다. 폭설의 풍경 속에서 데자뷰로 다가오는 <누가 내 이름이라 지어 불렀다. 대답하는 목소리가 떨렸다>라는 구절에 도달해서 우리는 풍경과 사람 사이의 곡진하고 내밀한 조응을 목격할 수 있다. (현실의) 폭설과 위선환 폭설의 외양적 차이는 소리의 유무에 있다. (현실의) 폭설이 소리없는 고요라면 위선환 폭설은 그 고요를 뼈가 부딪치는 아픔의 소리로 드러낸다. 고요를 노출시키되 위선환은 폭설의 외양은 그대로 두고 폭설 속으로 출입하는 전략을 가지고 왔다. 「존 말코비치 되기」라는 낯익은 영화의 구조가 생각나는 것도 그러한 이유이다. 그 영화에서 주인공은 자신과 전혀 다른 배우 존 말코비치의 몸 속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영화와 뚜렷한 차이가 있다. 영화에서 주인공 크레이그는 자신과 전혀 다른 정체성 속으로 들어가서 자신을 되돌아보지만, 위선환이 들어가는 폭설의 내부는 위선환의 내부와 다를 바 없다. 위선환 언어의 평범성이 놀라운 감동을 주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위선환 언어의 피륙이 정반합을 되풀이하면서 넓이와 깊이를 확장하기 때문이다.

네 개의 풍경이 제시되어 있고 각 풍경은 액자의 또 다른 풍경과 맞물려 있다. 예컨대 <몸속에 가시뼈를 키우는 물고기가 자라나는 가시뼈에 속살이 찔리는 첫째 풍경>은 <몸속에 두 귀를 묻어버린 물고기의 몸속보다 깊은 적막을, 적막하므로 무한한 그 깊이>가 있는 적막의 풍경이다. <눈 뜨고 처음 내다본 앞바다에 희끗희끗 눈발이 날리는 둘째 풍경>은 <야윈 손이 반음씩 낮은 음을 짚어가는 저녁 무렵에 어둑하게 어스름이 깔리는 音調> 속에서 <새들은 어둔 하늘로 날고 살 속에서는 신열을 앓는 뼈가 사뭇 떠는 오한>이며, <잠깐씩 돌아다본 들판에 돌아다볼 때마다 눈발이 굵어지는 셋째 풍경>은 <눈꺼풀에 점점이 점 찍힌 점무늬 아래로 한없이 떨어져 내리는 반점들의 하염없는 나부낌>과 <아득하게 깊어진 눈구멍 속에서 속날개를 털며 자잘하게 날갯짓도 하는 설렘>을 앞장세우고, <물굽이와 들판과 나를 덮고 묻는 눈발이 자욱하게 쏟아지는 마지막 풍경>은 <천 마리씩 떨어지는 여러 무리 새떼들이 바짝 마른 가슴팍을 땅바닥에 부딪치며 몸 부수>며 <내리 꽂고 혹은 치솟는 만 마리 물고기들은 물고기들끼리 부딪쳐서 산산조각 나>는 역동적 스틸에 다름 아니다.

결국 눈은 <몸속에 가시뼈를 키우는 물고기가 자라나는 가시뼈에 속살이 찔리는> 고통으로부터 시작하여 폭설은 <천 마리씩 떨어지는 여러 무리 새떼들이 바짝 마른 가슴팍을 땅바닥에 부딪치며 몸 부수는> 것으로 확장 묘사되고 있다. 그 모든 것 또한 고통 속에서 시인을 부르고 있으며 혹은 시인이 저것들을 죄다 부르고 있다. 순환의 시간이 시의 전체를 지배하면서 세상/시는 죄다 폭설의 세계이다. 멈출 수 없는 고통처럼 폭설은 세상/시를 덮고 있다. 위선환의 다음 행보가 궁금해지는 고통이다.

 

송재학:․계간《세계의 문학》으로 등단.

           시집 『얼음시집』『살레시오네 집』『푸른빛과 싸우다』『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기억들』『진흙얼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