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김영남 시인 - 1
김영남 시인
1957 전남 장흥군 대덕읍 분토리 출생
1985 중앙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1997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정동진역> 당선으로 등단
1998 시집 '정동진역(민음사)'
1998 윤동주 문학상(우수상)수상
2001 시집 '모슬포 사랑'(문학동네)
2002 중앙문학상 수상
2004 문학과 창작 작품상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기획조정실에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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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도 가꾸면 재산이 된다 / 김영남
밑에 관하여 / 김영남
‘아줌마’라는 말은 / 김영남
누워 있는 것을 보면 나는 올라타고 싶다 / 김영남
빨래 / 김영남
눈이 내리면 총체적으로 불행하다 / 김영남
그 길이 꿈틀하네 /김영남
우리 집 트레이드 마크로는 / 김영남
신춘문예(新春文藝)는
알고 있다 / 김영남
말뚝 위의 거대한 망치 / 김영남
하현달 / 김영남
요즈음 가슴들에는
가짜가 많다 / 김영남
나의 고지식함을 알았다 / 김영남
땅 위를 기어가는 것들에는 / 김영남
가을밤이 되면 / 김영남
나의 애인을 빨간색으로 바꾸려 한다 / 김영남
정동진 驛 / 김영남
아름다운 섬이 없다 / 김영남
슬픔도 가꾸면 재산이 된다 / 김영남
귀하게 얻은 슬픔이란
뿌리가 잘 썩는 분재 같아
고운 흙으로 분갈이를 해주지 않으면
내부 공간을 심하게 망가뜨린다.
따라서 내부 공간을 가꾸기 위해서는
보습용 물레방아, 흔들의자를 들여놓고
대(竹)발로 밖을 차단해 놓은
마음의 베란다 한 켠이 필요하다.
자주 눈길을 주며, 웃자라거나
삐져자란 슬픔을 다듬을 수 있도록
예쁜 창도
안으로 달아놓아야 한다.
잘 보살핀 슬픔, 옹이가 곱게 앉은 슬픔이란
거실, 현관, 정원, 옥상 어디에 내놔도
주변을 깊고 넓게 변하게 한다. 값 비싼 난(蘭)처럼
진한 향기를 감돌게 하고, 조용한 숲속으로 바꾸어준다.
저기, 슬픔을 방치해
내부 공간이 헛간처럼 망가진 사람이
내부 공간 밖에서 술을 마시고 있다.
밑에 관하여 / 김영남
나는 위보다는 밑을 사랑한다
밑이 큰 나무, 밑이 큰 그릇, 밑이 큰 여자……
그 탄탄한 밑동을 사랑한다
위가 높다고 해서 반드시 밑동도 다 넓은 것은 아니지만
참나무처럼 튼튼한 사람,
그 사람 밑을 내려가 보면
넓은 뿌리가 바닥을
악착같이 끌어 안고 있다
밑을 잘 다지고 가꾸는 사람들 ……
우리도 밑을
논밭처럼 잘 일궈야 똑바로 설 수 있다
가로수처럼 확실한 밑을 믿고
대로를 당당하게 걸을 수 있다
거리에서 명물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밑이 구린 것들, 밑이 썩은 것들은
내일로 얼굴을 내밀 수 없고
옆 사람에게도 가지를 칠 수 없다
나는 밑을 사랑한다
밑이 넓은 말, 밑이 넓은 행동. 밑이 넓은 일……
그 근본을 사랑한다
근본이 없어도
근본을 이루려는 아랫도리를 사랑한다
아줌마’라는 말은 / 김영남
일단 무겁고 뚱뚱하게 들린다.
아무 옷이나 색깔에 잘 어울리고
치마에 밥풀이 묻어있어도 어색하지 않다.
그래서 젊은 여자들은 낯설어하지만
골목에서 아이들이 ‘아줌마’ 하고 부르면
낯익은 얼굴이 뒤돌아본다. 그런 얼굴들이
매일매일 시장, 식당, 미장원에서 부산히 움직이다가
어두워지면 집으로 돌아 가 저녁을 짓는다.
그렇다고 그 얼굴들을 함부로 다루면 안 된다.
함부로 다루면 요즘에는 집을 팽 나가버린다.
나갔다하면 언제 터질 줄 모르는 폭탄이 된다.
유도탄처럼 자유롭게 날아다니진 못하겠지만
뭉툭한 모습으로도 터지면 엄청난 파괴력을 갖는다.
이웃 아저씨도 그걸 드럼통으로 여기고 두드렸다가
집이 완전히 날아 가버린 적 있다.
우리 집에서도 아버지가 고렇게 두드린 적 있다.
그러나 우리 집에서는 한번도 터지지 않았다.
아무리 두들겨도 이 세상까지 모두 흡수해 버리는
포용력 큰 불발탄이었다, 나의 어머니는.
누워 있는 것을 보면 나는 올라타고 싶다 / 김영남
나는 누워만 있는 것을 보면 올라가보고 싶다.
그 누워 있는 것들에 신나게 올라가서
한번 가쁜 숨을 매몰차게 몰아쉬고 싶다.
가쁜 숨을
기쁘게
내쉴 것들을 고르다 보니,
나를 기다리는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누워 있는 침대, 누워 있는 천장, 누워 있는 하늘…
저기 한 여자도
한사코 누워만 있는 바위를 올라타느라
가쁜 숨을
크게 내뿜고 있다.
여자가 슬슬 기어오르는 모습을 보니까
귀엽다.
용감해 보인다.
아니, 불행해 보인다.
세상에!
오죽했으면 여자가 하늘을 올라타야 할까?
나는 누워 잠자는 걸 보면 꼭 한번 올라타 보고 싶다.
누워 있는 상사, 누워 있는 행정, 누워 있는 학문…
빨래 / 김영남
이렇게 모가지를 비틀면 어떡하냐고
찔끔찔끔 눈물을 짜며
그가 완강하게 버틸 때면,
이놈 고분고분하지 않는다고
시커먼 거짓말 뱉어내지 않고 끝까지 숨기고 있다고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두둘겨 패서
질질 옥상으로 끌고 가 거꾸로 매달아버린다. 그녀는
그러면 그는 그때서야 얘기를 꺼낸다
정말 이렇게 나아가서는 안되겠다고,
어떻게든 집안에
평화의 깃발은 펄럭여야겠다고
보라, 그녀는 그를 다루는 1급 기술자다
눈이 내리면 총체적으로 불행하다 / 김영남
와, 눈이다 눈! 눈이 창을 가득 메우니
갑자기 따뜻해진다. 눈은 가볍게 살아
사각의 창을 자유롭게 한다. 나는 이 창을
친구에게 E-메일로 부칠 수 있어서 행복하다.
이런 날 눈은 창을 넘고 산을 넘어
동서남북 저 아득한 곳까지 내린다.
산골 마을에 내리고, 제주도에 내리고, 아메리카에도 내린다.
눈 감고 죽어라고 죽어라고 내리다가
팽이를 돌리고, 배를 타고, 비행기를 띄운다.
그러다가 크리스마스 카드로 되돌아오며
눈은 잠시 멎는다.
눈을 밟자, 이럴 때
멎은 눈을 밟으면 볼이 달아오르고 길까지 행복해진다.
행복한 길들은 밟으면 뽀드득 소리가 나고 모두 아름다운 흔적을 갖는다.
그러나 지나치게 밟으면 미끄러진다 행복도
그대여, 눈을 밟자 더 아프게 미끄러지기 전에
우와, 다시 눈이다 눈!
분분한 눈이 창을 또 한번 메우니
이번에 나는 불행해진다. 눈은 분분하게 다투면서
내 앞 창을 자유롭게 하지만 내 책상은 자유롭게 하지 못해
불행해진다. 다투니까 자유로워지고 다투지 않으니까 갇히는
이 답답한 世上으로 하여금 다시 한번 불행해진다.
그리하여 오늘은 총체적으로 불행이다, 창도 세상도 나도
눈은 어둠을 켜면서까지 계속 불행하게 불행하게 내린다.
제2회 <문학과창작> 작품상 수상작품
그 길이 꿈틀하네 /김영남
한 할머니가 시골길을 가고 있네
맞은 편에서 여학생 한 명이 등장하네
둘은 뭐가 생각난 듯 훔쳐보며 갈라지고 있네
서로의 길을 자꾸만 자꾸만......
순간! 들녘한 가운데 놓이는
저 아름다운 헌 길과 새 길
우리 집 트레이드 마크로는 / 김영남
하나는 내가 증조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 끝이 뭉툭하나 찔리면 통증이 매우 오래가는 뿔이다. 보이지 않아 만질 수가 없고 주로 밀어붙이는 데에 용이하게 쓰인다. 이 뿔은 소유하고 있다는 생각만 해도 머리가 근질근질해지고, 갑자기 힘이 솟는다. 신통한 마력 때문에 벽이 많은 이웃, 회사, 관공서 등에 갈 때는 머릿속에 꼭 이것을 담아 가고 싶어진다.
또 하나는 아내가 자기의 외할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뿔로 조립형이다. 뾰족한 부분을 나사처럼 끼울 수도 있고 뗄 수도 있는 뿔. 신축성 있는 용도만큼이나 다양한 표정에 잘 어울린다. 따라서 양의 머리, 소의 머리, 공룡의 머리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여우의 머리, 뱀의 머리, 카멜레온의 머리에까지 잘 어울린다. 색깔이 알록달록하고 모양이 참 예쁘다.
그런데 우리 집 아이들은 저희들끼리 놀다가 쌈이 붙으면 종종 이걸 꺼내온다. 한 녀석은 나의 뿔, 또 한 녀석은 아내의 뿔. 어떻게 찾아냈는지 이걸 꺼내와 서로에게 겨눈다. 뭉툭한 뿔과 뾰족한 뿔로 서로 머리 맞대고 칼로 물베기식 대결을 벌이기도 한다.
나는 이번 가족 대항 진기명품(珍奇名品) 대회에 이 뿔들을 출품시킬까 한다.
신춘문예(新春文藝)는 알고 있다 / 김영남
신춘문예에 당선 돼 시인이 되면 나는 그때
호미, 삽을 대학 8차 학기 끝날 무렵 다시 든 부모님께 제일 먼저
고추처럼 매운 시 한 수를 바치리라 다짐했었다.
일류 회사 중역 꿈꾸며 교문을 빠져나가는 대학 동창들.
그리운 모습들 모두 곁을 떠났을 때도 나는
삐걱이는 강의실 책상에 버려진 볼펜처럼 홀로 남아
원고지 구멍을 메우고 빈혈의 사연을 고향에 부치면서
남도의 제일 가는 서정시인으로 떠오르리라 다짐했었다.
지난 가을 전지(剪枝)한 덩굴장미가 새로 자취방까지 기웃거리고
언제쯤 졸업사진 찍어낼 수 있겠느냐는 부모님 기별이
철 지난 나뭇잎처럼 날아들 땐
느렛골 파밭에서 언 땅을 파고계신 어머님의 구부정한 허리가 보였고,
대밭에서 후박나무 밑동을 쓰러뜨리는 아버님의 다리 삐걱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종일토록 휴지통 가득 버려진 니코틴 그을린 시간들.
그해 겨울 마지막 잎새처럼 남은 생활비마저 하루 두끼로 줄어들었을 땐
나는 세상의, 문학의 버린 자식으로 흑석동 싸늘하게 살아남아
시인이 될 수 없는 시인들 신분을 부정하기 시작했었다.
글이 될 수 없는 글의 심사위원들까지 부정했었다.
매번 패배의 변(辯)과 야멸찬 다짐으로 가득 찬 대학노트,
목울대까지 차오르는 쓰라림을 삼키면서도 나는
고추처럼 매운 시 한 수를 바치리라 다짐했었다.
시집 "모슬포 사랑"(문학동네)
말뚝 위의 거대한 망치 / 김영남
가을 하늘 아래 과수원에 세운 말뚝이란
'그래 바로 여기야, 이런 곳에서 우리도 저처럼......'
하는 사람들 감탄사 모양이다. 그런 감탄사를 곁에두면
쓰러진 울타리가 다시 얼어날 수 있겠고,
바람에 날아가는 빨래도
하얀 생명을 온전하게 건질 수 있겠다.
발정난 염소가 거기에 줄이 묶인다면
왔다 갔다 하던 흥분도 동그렇게 삭이겠다
흥분을 잘 삭이지 못했던 옆집 아저씨는
그런 감탄사를 뽑아 아예 휴대용 감탄사로
사용한 적 있다 그러나 그 아저씨는 결국
휴대용 감탄사를 지나치게 남발하다 또 다른 감탄사에 맞아 쓰러졌다.
쓰러진 곳 웅성웅성하고 있는 것들 곁에 다가가 보면
쓰러진 것들을 놓고 서로 다른 감탄사 때문에 싸운다.
그러다가 그걸 탱크처럼 서로 수평으로 겨누게 되면
정말 큰 일을 일으키게 된다.
고추잠자리 한 마리가 과수원 울타리를 지나
집마당을 지나 텃밭 해바라기 위에 앉는다.
흔들리는 감탄사 위에서도 고추잠자리는 저렇게 잠을 잘 잔다.
그러나 난 그 풍경으로 인해 평화롭지 못하고 벌떡 일어난다.
일어나 능금나무 아래를 불안하게 서성이다가 선다 말뚝처럼,
그래. 푸른 하늘 아래 문득 세워보는 말뚝!
가을 하늘은 불안한 나도 불안하지 않게 말뚝 박는 거대한 망치다.
지금 내 머리도 푸른 하늘에 얻어맞아 멍멍하다.
2004년 「애지」가을호
2004년 「현대시학」11월호 이달의 작품 선정
하현달 / 김영남
어느 날 밤 마당가에서 서성이다가
나는 보고 또 보았다.
바람에 날리는 달빛,
돌아오지 못한 할아버지 흰 옷자락을.
잠 못 든 댓잎 소리, 싸락눈도 잘게 뿌리고 있었다.
그때 동네 대밭 머리 위로 떠오르던 하현달.
이윽고 우리 집 신발장 위로
싸늘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어릴적 무서운 그림자의
기억, 무서운 꿈처럼.
사납게 개 짖는 소리를 끌고 달빛이
집 대문을 막 넘어오고 있었다.
받아올 것이 너무 많아서였을까?
그 흔한 싸리울 하나 세우지 않고
주무시던 할아버지가
어느 날 밤
까닭 없는 부름으로 대문을 나섰다
흰 고무신 두 짝만 남기고
맨발로, 맨발로.
그 뒤로
문고리를 꼭꼭 잠그셨다, 할머님은.
등잔불도 아예 치우고 누워만 계시다가
어둠이 되셨다, 할머님은 끝내.
누구의 부름을 받으신 걸까?
등불 없어진 자리처럼 허전한 우리 집.
마당가에 서서 문득 신발장을 다시 올려다 봤을 때
마지막 유언처럼 남아 빛나는 신발.
그 속엔
밝히지 못한 어둠이 있다, 읊조리며 시린 눈을 감았다 뜨면
마당 가득 쳐들어오는 시퍼런 물결. 그 무서운 기억의 달빛 속
싸락눈으로 나는 싸늘하게 깨어 서성이고 있었다.
시집 - 정동진역 (민음사)
요즈음 가슴들에는 가짜가 많다 / 김영남
요즘 거리에는 가슴을 예쁘게 고치는 바람이 불고 있다. 큰 가슴, 탄력 있는 가슴, 봉곳한 가슴, 찔려도 되게 기분 좋은 가슴, 이승희 같은 가슴...
이런 가슴으로 꾸미기 위해 실리콘을 넣고, 가슴을 마사지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더욱이 밋밋한 가슴, 쭈글쭈글한 가슴까지 가세해서 유명 브랜드 브래지어를 갖다 붙이고 성형 수술을 하는 유행도 생기게 되었다.
참 이상한 세상이다 부풀린 가슴, 위장한 가슴, 순 껍데기뿐인 가슴들이 저렇게 거리를 당당하게 활보하는 것이.
저런 가슴들이 가짜라면 그것과 한핏줄을 나누고 있는 입도 가짜이고, 여기에서 나오는 고매한 말도 전부 가짜임이 틀림없을 텐데, 우리는 왜 이렇게 가짜에 속고 살아야 하나? 더욱이 가짜를 만지면서? 가짜 선행도 따지고 보면 축 처진 가슴이거나, 모두 말라빠진 가슴으로 귀착할 텐데...
그의 삶.
가짜 가슴을 달고 다니는 무수한 사람들 속에서 한 사람이 큰 가슴을 덜렁거리며 걸어나오고 있다.
갑자기 세상도 덜렁거리고 있다.
시집 - 정동진역 (1998년 민음사)
나의 고지식함을 알았다 / 김영남
그의 말 속에는 의자가 있다.
형체가 있기도 하고 또한 없기도 한 의자.
그는 늘
그 의자를 들고 다니면서 고객을 만나고 손님을 접대한다.
어떤 때는 가끔 그 의자를 집에 놔두고 출근을 하기도 한다.
그러면 집에서 그의 마누라가 이를 반들반들하게 닦아놓는다.
그는 줄곧 출세를 했다.
고속 출세를 하다보니깐 신호 위반도 많이 했다.
빨간 신호등을 무시하고 뛰다가 경찰서에 끌려간 적도 있다.
그럴 때에도 그는
그 의자를 봉투에 넣어 건네주고 위기를 넘겼다.
어느 날 나도 나를 한번 들여다봤다.
의자가 없었다.
시집 - 정동진역(민음사)
땅 위를 기어가는 것들에는 / 김영남
땅을 기어가는 것들에는
기둥에 붙들어맬 수 없는 고집이 있다.
황토밭을 달리다가 잠시 뒤돌아보는 고구마 순,
벽을 기어오르며 허공에 내미는 담쟁이손,
이것들에게는 허리가 꺾이고 발목이 묶이더라도
오로지 가고야 말겠다는 강인한 근성이
무섭도록 꿈틀댄다.
그 구불구불한 줄기를 들치면
대나무 뿌리 같은 손이 있고,
그 손 속에
들녘으로 나가는 어머니
호미자루가 쥐어져 있다.
꺾인 자리를 지우며 푸른 하늘을 향해
날개 펴는 새순 속에는 또
얘야, 손발이 부르트도록 땅을 뒤져 네게 올려주마 하시던
고무 신발 같은 말씀이 달리고 있고,
주렁주렁 열매 달린 묵은 순 속에는
딱딱한 매듭으로 남거나 삭정이로 부러지는
줄기의 마지막 모습이
아프게 숨어 있다.
땅을 기어가는 것들,
절벽을 기어오르는 줄기들에는
어둔 싹들을 이 세상으로 업어낸
아름다운 등이 있다.
시집 - 정동진역(민음사)
가을밤이 되면 / 김영남
달, 저 달을
싸리울에 묶어본다
허름한 말뚝에 매어본다
그러면 달은 짖는다
짖어 푸른 밤이 된다
나는
푸른 밤 속으로 들어간다.
들어가 묶어 둔 달을 풀어준다
달은
깻단 이고 오는 어머니를 따라온다
살랑살랑 꼬리 치며 삽살개도 따라온다
이번에 달 대신 개를 묶어본다
달은 어느새 동산위로 올라가고
개는 기둥 주위를 맴돌며 밥그릇의 달빛을 핥는다
동료처럼
그러면 지붕에는 외삼촌 닮은 얼굴 하나
백자 항아리 술병을 허리에 차고 웃어오고
어디에선간 위험 신호의 호루라기 소리들
그 소리에 이어 푸른 바닷물 밀려오는 소리들
이내 난 허우적거릴 것 같아
허우적거리다가 지붕과 함께 잠겨버릴 것 같아
익사직전의 구조요청을 누군가에게 계속 하게 되고
달, 저 달은 날 가둔다. 바다 한가운데 가두고
고백하라, 반성하라 고문을 해온다
詩- 내 이웃
나의 애인을 빨간색으로 바꾸려 한다 / 김영남
나의 애인은
이태리풍 카페 앞에 세웠을 때, 아름답다.
카세트 테이프처럼 머리칼이 길고 부드러우며
먼지에 민감한 하얀 치마를 입었다.
나의 애인은 내부가 청색으로 선팅되어 있고
선글라스 낀 남자가 핸들을 잡았을 때, 멋있다.
나는 그녀를 사 년 전에 만났다.
그녀와 시골에 다녀오고
살악산, 지리산을 함께 여행했다.
그러나 요즘 그녀는 짜증을 자주 낸다.
요구하는 게 많아 유지비가 많이 든다.
제동이 잘 되지 않아, 매우 불안하다.
에어백을 장착하고도 불안한 나의 애인,
이번 기회에 나는 나의 애인을
빨간색 바지를 입은
소형 '티코'로 바꿀까 한다.
누가 나의 중형 '소나타'를 몰고 가다오.
시집 - 모슬포 사랑 (문학동네)
정동진 驛 / 김영남
겨울이 다른 곳보다 일찍 도착하는 바닷가
그 마을에 가면
정동진이라는 억새꽃 같은 간이역이 있다.
계절마다 쓸쓸한 꽃들과 벤치를 내려놓고
가끔 두 칸 열차 가득
조개껍질이 되어버린 몸들을 싣고 떠나는 역.
여기에는 혼자 뒹굴기에 좋은 모래사장이 있고,
해안선을 잡아넣고 끓이는 라면집과
파도를 의자에 앉혀놓고
잔을 주고받기 좋은 소주집이 있다.
그리고 밤이 되면
외로운 방들 위에 영롱한 불빛을 다는
아름다운 천장도 볼 수 있다.
강능에서 20분, 7번 국도를 따라가면
바닷바람에 철로 쪽으로 휘어진 소나무 한 그루와
푸른 깃발로 열차를 세우는 역사(驛舍),
같은 그녀를 만날 수 있다.
(97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아름다운 섬이 없다 / 김영남
요즘 카페 여자들에겐 지느러미가 없다
부끄럼처럼 돋은 비늘이 없고
만져도 파닥거리지 않는다
파닥거릴 줄 모르다보니, 탁자 위에서
입만 뻐끔거린다. 탁한 물 속에서
아무 낚시나 덥석 물기나 하고
버팅기고 반항하는 쾌감이 없다
몸통을 뒤트는 신선함, 그 파닥거림이
내부를 얼마나 크게 열리게 하고
실내장식하는지를 모른다. 파도와 해일이
바다를 또 얼마나 아름답게 꾸미는 줄도
그러나 무엇보다 그녀들에게는
청정 바다의 징표(徵表), 비린내가 없다
시집- 모슬포 사랑 (2001년 문학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