必死 筆寫

물을 여미다/박남희

시치 2012. 11. 5. 19:47

물을 여미다/박남희

 

 

 

그녀는 나에게 사랑을 보여 달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물을 보여주었다

 

물은 예측할 수 없는 사랑의 지도이다

나는 종종 물로 사랑을 그린다

물은 디오니소스의 불온한 상상력이다

N극과 S극의 팽팽한 긴장이다

그래서 물로 그린 사랑은 늘 출렁인다

물이 테두리를 얻어 형태를 이루는 일은

물을 가두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빛을 담는 것이다

 

그녀는 내게 빛이다 물이다

어떤 때는 눈부시게 반짝이다가

어떤 때는 사정없이 출렁인다

물은 흐를 때보다

고여서 출렁일 때가 신비롭다

 

고인다는 것은 생각이 깊어진다는 것이고

생각이 깊어진다는 것은 물이 스스로를 여미는 일이다

여미는 것은 물이 물을 가두어 두는 것이 아니라

한쪽으로 생각을 모으는 것이다

 

봄 나무에 꽃이 피는 것도

나무가 제 안의 물을 여미었기 때문이다

물은 흐르기 위해 있지만

여미는 곳에서 물은 깊다

 

누군가 물에 돌을 던져도

물은 아파하지 않고

제 마음 깊은 곳을 열어 선뜻 꽃을 피운다

 

사랑은 물을 여미어 꽃을 피우는 일이다

 

 

 

                       —《작가연대》 2012년 5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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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희 / 1956년 경기 고양 출생. 숭실대 국문과, 고려대 대학원 국문과 졸업. 1996년 경인일보, 199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폐차장 근처』『이불 속의 쥐』『고장 난 아침』. 현재 고려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