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현대시학 작품상 수상작〉재스민 향기는 어두운 두 개의 콧구멍을 지나서 탄생했다(외 4편)/조말선
〈2012년 현대시학 작품상 수상작〉
재스민 향기는 어두운 두 개의 콧구멍을 지나서 탄생했다(외 4편)/조말선
피가 번질까 봐 테두리를 그렸다
바닥으로 떨어질까 봐 바닥으로 내려놓았다
너를 만들고 보니 더 외로워졌다
매달리면 추락을 염려했다
장미는 나와 같이 피지 않았다
맨드라미는 혼자 흘러내리고 있었다
재스민 향기는 어두운 두 개의 콧구멍을 지나서 탄생했다
테두리를 그리자마자 지울 궁리를 했다
입구를 원하는 자가 생기자 출구를 원하는 자가 생겼다
남겨둔 부분에 대한 연구는 성과가 컸지만
남겨진 부분이 계속 나타났다
손가락이 사라지도록 장갑을 꼈다
얼굴이 지워지도록 모자를 썼다
삭제키를 눌러서 모두 지웠다
강물은 어둠 속에서도 바닥이었다
노을은 너무 멀어서 계속 남겨졌다
문을 열었지만 문 안에 있거나 문밖에 있었다
늪에 다다랐지만 전망대에서 조금도 나아가지지 않았다
열정과 늪은 한통속이었다
차들이 지나갔다
햇빛이 지나갔다
히아신스 향기가 매우 빨리 지나갔다
나는 계속 지나가고 있었다
남겨진 부분에 대해서 연구하고 싶었다
식구들이 흩어질까 봐 액자에 끼웠다
식구들이 나와 벽 사이에 끼여 있었다
싱크대에 가까워질 때 식탁에서 멀어졌다
꽃들은 피었지만 꽃나무에서 멀어졌다
네게서 멀어질 때 내가 가까워지는 것은 분명히 있다
겁탈을 꿈꾸며 독서를 했다
칼이거나 향료이거나 얼음이거나 반란이거나 아름다움이거나 독이거나
돋보기의 도수가 올라갔다
노을은 사라졌으므로 탐구가 중단되기 일쑤였다
강물은 다시 푸르렀다
검푸른 얼굴들이 마주보았다
서로 어두워지고 있었다
비를 좋아하면서 우산을 펴는 것은 멜로다
더 이상 우산 밖으로 손바닥을 펴지 않기로 했다
흘러내리는 생각을 턱이 뾰족하게 깎아냈다
손바닥으로 턱을 떠받칠 때 손바닥의 생각은 섞이지 않는다
여름은 빽빽해졌다
여름은 벌레처럼 단어들이 창궐했다
명쾌한 명사는 점점 수식어가 많아졌다
당신의 아름다운 눈을 찾기 위해 수식어를 헤치고 나아갔다
당신의 눈은 점점 깊어졌다
나는 구 번 트랙을 돌며 당신의 아름다운 눈을 노래했다
당신은 구 번 외의 어느 트랙도 거부했다
나를 재생하고 재생했지만
당신은 나를 들을 수 있을 뿐이었다
—《현대시학》2012년 4월호
생강차의 맛
오늘 읽은 책 중에서 가장 톡 쏜다 재미있는 책은 혼자 웃지 못했고 고상한 글은 드레스 자락이 밟혀서 금방 지저분해진다 요즘 뜨고 있는 책은 아직도 뜨고 있어서 썩는 냄새가 난다 속달로 보내온 그의 책은 맛있다고 생각하지만 다음 책을 보기 전에는 알 수가 없다 오늘 읽은 책 중에서 가장 급조한 것이다 벌써 최상급의 대접이 두 번 티백으로 포장되어 있어서 휴게실에 널렸다 이 책과 저 책 사이에 차 마시듯이 읽었는데 금방 잊을 수 있었다 차 한 잔을 마시는 동안 피어오르는 독설과 차 한 잔을 마시는 동안 전달되는 따뜻한 혈통이 전부라면 저자는 대단한 미식가이다 쓸데없이 수식어를 남발하지 않아서 질척대지 않고 자, 여기 쓰레기통을 갖다댄다 손에 도착하기 전에 혀에서 사라진다
—《미네르바》2012년 여름호
생각보다 가벼운 상자
뚜껑을 닫자마자 상자입니다 결코 입을 다물 수 없는 〈상자〉를 불러봅니다 …아아아, 목젖에서부터 열려 있는 둥근 모음에 침이 고입니다 각이 진 모서리가 사과처럼 사각거립니다 사각거리는 상자가 침을 질질 흘립니다 사각사각 모서리를 갉아먹으며 상자가 젖고 있습니다 옷이 젖을까봐 한껏 상자에서 떨어져 상자를 들고 가는 당신 상자는 난처합니다 상자는 불편합니다 상자는 내성적입니다 당신은 구름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상자의 능력입니다 상자가 줄줄 비를 내립니다 상자는 상자를 빠져나갑니다 그것은 상자의 기분입니다 당신은 생각보다 가벼운 상자를 툭 던지듯이 놓는군요 〈상자〉가 새어나옵니다 당신의 목젖에서부터 당신의 치아 사이로 새어나오는 상자는 닫혀 있습니다 뚜껑을 열자마자 상자가 아닌 〈상자〉는 닫혀 있습니다
—《현대시학》2012년 4월호
손에서 발까지
당신이라는 장소에 도달하기 위해
손에서 발까지 걸어갔어요
이런, 내 손과 내 발인 줄 몰랐는데 말이죠
당신 손은 언제나 내 손만한 심장을 꽉 쥐고 있군요
내 발이 계속 더듬는 이유죠
내 손보다 더 큰 접시가 놓인 밥상 위에서
우리는 접시보다 못한 곳이 되어버리죠
내 입에서 튕겨 나온 사랑의 밀어가
당신의 방패에 멋지게 꽂힙니다
접시가 흘러넘칩니다
우리가 자꾸 비만이 되는 이유죠
당신이라는 장소에 도달하기 위해
배에서 등까지 걸어갔어요
삽시간에 와락 안을 수도 있지만
그 다음엔 무얼 하죠?
걸어가기에는 당신은 꽤 비좁군요
당신이라는 장소에 도달하기 위해
막 내 오른손에 도착한 곳이 당신인가요
당신에게서 당신까지
매일 한 시간 십 분씩만 걸어갈께요
당신이라는 장소에 도착하기 전에
당신은 이미 건강할 거에요
(시와 표현, 2011 가을호)
깊이에의 강요*
그렇다면 나에게 깊이를 보여주시겠습니까
여기 있는 빈 술병과 반쯤 남은 술병을 예로 들어
목이 좁은 원통의 높이를 구하는 공식은 어떤가요
내 손이 가장 커지는 순간이 병의 바닥에 닿지 않을 때라면
저 꽃병에 꽂힌 짧은 손목들은 깊이를 맛보고 있는 중입니다
키가 큰 당신은 나보다 깊습니다 키가 큰 당신은 바닥보다 얕습니다
술을 가장 많이 마신 사람은 누구입니까
당신 때문에 밤이 깊어졌습니다
목을 수그린 대화는 테이블에 엎질러졌습니다
관상용으로 꽂혀 있던 주먹이 튀어나와 불확실한 얼굴을 가격한다면
분출하는 밤이라도 막아주세요
나의 질문이 다시 자정에 가 있습니다
이 중에서 가장 두꺼운 책을 낸 사람은 어떻습니까
한마디도 하지 않은 저 사람 때문에 깊이를 알 수 없습니다
아직 한마디도 하지 않은 저 사람이 쾅, 테이블만 내리쳐도
깊이는 종류대로 불안합니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단편소설 제목,
(현대시학 2011. 11월호)
-------------
조말선 / 1965년 경남 김해 출생. 동아대 불문과 졸업. 1998년 〈부산일보〉신춘문예 시 당선, 《현대시학》신인작품 당선.
시집: 『매우 가벼운 담론』『둥근 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