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규 시 보기(11편)
시집 - 서문 / 이덕규
스무 살 가을밤이었다. 어느 낯선 간이역 대합실에서 깜박 잠이 들었는데 새벽녁, 어떤 서늘한 손 하나가 내 호주머니 속으로 들어왔다.
순간 섬뜩했으나, 나는 잠자코 있었다.
그때 내가 가진 거라곤 날선 칼 한 자루와 맑은 눈물과 제목 없는 책 따위의 무량한 허기뿐이었으므로.
그리고, 이른 아침 호주머니 속에선 뜻밖에 오천 원권 지폐 한 장이 나왔는데,
그게 여비가 되어 그만 놓칠 뻔한 청춘의 막차를 끊었고, 그게 밑천이 되어 지금껏 잘 먹고 잘 산다.
그때 다녀가셨던 그 어른의 주소를 알 길이 없어......, 그간의 행적을 묶어 소지하듯 태워올린다.
-이덕규
밥그릇 경전
어쩌면 이렇게도
불경스런 생각들을 싹싹 핥아서
깨끗이 비워놨을까요
볕 좋은 절집 뜨락에
가부좌 튼 개밥그릇 하나
고요히 반짝입니다
단단하게 박힌
금강(金剛) 말뚝에 묶여 무심히
먼 산을 바라보다가 어슬렁 일어나
앞발로 굴리고 밟고
으르렁 그르렁 물어 뜯다가
끌어안고 뒹굴다 찌그러진,
어느 경지에 이르면
저렇게 제 밥그릇을 마음대로
가지고 놀 수 있을까요
테두리에
잘근잘근 씹어 외운
이빨 경전이 시리게 촘촘히
박혀있는 , 그 경전
꼼곰히 읽어내려 가다보면
어느 대목에선가
할 일 없으면
가서 <밥 그릇이나 씻어라>* 그러는
*조주선사와 어느 학인과의 선문답
(2004년 현대시학작품상 수상작 )
칼과 어머니
어머니는 우리 집에서 칼을 제일 많이 쓰는 사람, 칼을 가장 능숙하게 잘 쓰는 사람, 자르고 썰고 족닥이고 생선대가리를 아무 생각없이 뎅겅뎅겅 날려 칼집을 내고 저녁상을 차리는 어머니
한밤중에 물 먹으러 부엌에 나갔다가 움푹 파인 도마 위에 파랗게 실눈을 뜨고 누워 있는 식칼을 보고 들어와, 반월도半月刀처럼 웅크리고 칼잠 자는 어머니를 반듯하게 고쳐주면 날을 세우듯 다시 모로 눕는 어머니
자는 척 늘 깨어 있는......, 이제는 당신 마음을 다스리던 인내忍耐의 사원 그 시퍼렇게 빛나는 천근 칼날 지붕아래에서도 평온한 어머니, 칼을 들었을 때 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 칼끝이 오직 자식을 향해 열려 있는
도마 위의 그 날렵한 칼솜씨를 보면 무인가문의 후손이 확실한 어머니, 그러나 칼의 볼모로 잡힌 이래 집 밖으로 칼을 내돌리지 못하는 몰락한 칼잡이의 딸, 쓰ㅡ윽, 나도 모르게 감쪽같이 내 가슴을 가르고 들어온 날선 비수匕首 한 자루
숙박계
늦은 밤 후미진 골목 여인숙 숙박계 막장에 나를 또박또박 적어넣어 본 적이 있으신가?
밤새 오갈 데 없는 어린 눈송이들이 낮은 처마 끝을 맴돌다 뿌우연 창문에 달라붙어 가뭇가뭇 자지러지는
그 어느 외진 구석방에서 캐시밀론 이불을 덮어쓰고 또박또박 유서 쓰듯 일기를 써본 적이 있으신가?
이른 아침 조으는 주인 몰래 숙박계 비고란을 찾아 '참 따뜻했네'또박또박 적어넣고
덜컹, 문을 열고 나서면 밤새도록 떠돌던 본적지 없는 눈송이 들을 막다른 골목 끝으로 몰아가는 쇠바람 속
그 쓸리는 숫눈 위에 가볍게 목숨을 내려놓듯, 첫 발자국을 또박또박 찍으며 걸어가본 적이
있으신가? 언젠가는 흔적도 없이 지워질 그 가뭇없는 기록들을...... 당신은 또박또박
어처구니
이른 봄날이었습니다
마늘밭에 덮어놓았던 비닐을
겨울 속치마 벗기듯 확 걷어버렸는데요
거기, 아주 예민한
숫처녀 성감대 같은 노란 마늘 싹들이
이제 막 눈을 뜨기 시작했는데요
나도 모르게 그걸 살짝 건드려보고는
갑자기 손끝이 후끈거려서
그 옆, 어떤 싹눈에 오롯이 맺혀 있는
물방울을 두근두근 만져보려는데요
세상에나! 맑고 깨끗해서
속이 환히 다 비치는 그 물방울이요
아 글쎄 탱탱한 알몸의 그 잡년이요
내 손가락 끝이 닿기도 전에 그냥 와락,
단번에 앵겨붙는 거였습니다
어쩝니까 벌건 대낮에
한바탕 잘 젖었다 싶었는데요
근데요, 이를 또 어쩌지요
손가락이, 손가락이 굽어지질 않습니다요
단검처럼 스며드는 저녁 햇살
뒷골목 아무렇게나 버려진 빈깡통과 소주병들이 가끔 누군가의 발길에 한 번 더 찌그러지거나
좀더 투명한 제 속살을 보여주기 위해 산산조각이 나는 연습을 했다 어른들은
한 여름에도 허기진 호주머니 속에 손을 넣고 다녔고
담벼락엔 철 지난 흑백 포스터들이 반쯤 찢어져 무슨 쇠락한 이념처럼 펄럭였다 우리들은
그 뜻을 알려하지 않은 채 자본의 전부인 구멍가게에서의 불문의 서열을 세웠고 한낮
골방에 누워 속옷처럼 축축하게 말라가는 여자들에게서 언제든지 모든 것을 허락할 수 있는 사랑을 배웠다 그리고 조금씩
더 멀리 불야성의 거센 바다로 나아가 빛나는 야광채의 살찐 고기들을 향해 그물을 던졌다
그러나 그 불빛들은 좀체 걸려들지 않았고 좀더 세밀한 그물을 깁기 위해
늘 막배를 타고 멀미하듯 돌아왔다 더러는
너무 멀리 나아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 어느 날 쫓기듯 돌아와
좁은 골목 출구 없는 미로 속으로 숨어들었다
흑백 포스터 위로 총천연색 구인광고물들이 수없이 덧붙여졌으나 여전히 그 뜻을 알지 못했고
어느새 빈 호주머니 속 익명의 슬픔에게 상처투성이인 손들이 습관처럼 불려 들어갔다 그리고
누군가 내다버린 아직 식지 않은 연탄재 위로 뛰어 내린 눈송이들이 거친 숨을 몰아쉬는 그 어디쯤,
막다른 골목 쪽창 안으로 단검처럼 스며드는 저녁 햇살이 언제든지 모든 것을
철거당할 수 있는 희망처럼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식물도감을 던지다
해마다 봄이 되면 어김없이 들판에는 참 많은 꽃들이
피어나지만 그 이름들을
낱낱이 아는 이는 우리 동네엔 아무도 없었다
그저 씨 뿌릴 즈음에 피었다가
가을걷이 추수철이면 앙상한 꽃대들이 말라비틀어질 뿐, 더러는
사람들이 그 꽃 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들밥을 먹고
더러는 쇠똥에도 눌려 주저앉고 억센 맨발에 짓이겨져도 그것들은
늘 거기에 피었다가 지고 말 뿐
어느 누가 그 이름을 불러
아름답다거나 남루하다거나 신비롭다 하는 말을 했던가, 있는 듯 없는 듯이
서로에게 불러줄 이름이 없던 그 시절부터 맛 달고 향기로운 꽃 찾아 따 먹으며
나 여기까지 흘러왔느니 누구 하나 내게 그 이름 들려준 적 없고
너희들 이름 불러본 적 없었다
들꽃들아! 네 이름을 모르고 간 사람들
오늘 다시 이 외진 들길마다 못다 한 말 못다 한 울음
저토록 많은 씨알 속에서 터져 오르는데
저마다 아름답고 신비롭고 남루한 서러움의 향내 돌아 그렁그렁한 눈빛들 맞추고 바라보면
아-하, 늦저녁 들판에서 돌아오는 지친 암소 발굽에 쓰러지면서도 이른 저녁 별들에게
기꺼이 손 흔들어주던 낯익은 얼굴들,
통성명도 없이…… , 너희들 이름을 내가 너무 많이 알아버리고 말았구나
나무의 밀교
누군가 내게 보낸 봉인된 엽서들을
손에 쥐고 흔드는 저 나무의 애틋한 눈길은
천상의 우체부를 닮았다
지난 겨우내 썼다 지우고
지웠다 다시 쓴 생명의 시간,
나무는 수도 없이 잎들을 땅에 떨구며
자신을 버리고
한번 버렸던 잎들을 봄마다 다시 주워들어
지나는 이들에게 애타게 손을 흔드는 것이다
그럴 때 세상은 볕에 물들고
빈 나무의 풍요한 밀교를 기억한다
길을 가다가 살펴보면
나무는 한 권의 책이 되어 있다
미처 건네 주지 못한 숱한 사연과 온기들을
둥근 나이테 사이에 두툼하게 끼워 두고
새파란 우체통이 되어 우두커니 서 있다
자물쇠 없는 우체통에서
오래 잠들었던 내 사랑을 흔들어 깨울 때,
몸에서는 짙푸른 잎사귀가 돋아나고
나도 모르게 누군가에게 다가가
불쑥, 초록 손을 내밀어보는 것이다
2003년「파라 21」겨울호
고슴도치 -진화 예측론
고슴도치를 보았습니다
숲 곳곳에 난무하던 칼들이
그의 등에 다 꽂혀 있었습니다
어디, 내게
더 꽂을 칼이 없냐는 듯
착한 눈을 꿈벅이고 있었습니다
몸 전체가 칼집이 되어
잔뜩 웅크린 채 풀벌레소리를 듣고 있었습니다
어서어서
내가 죽어야 모두 편안들 하다고
간절히 눈빛으로 말하곤
어디론가 조용히 돌아서 가는
그의 뒷모습에 대고
나는 나직이 엄마, 라고 불러봅니다
*시작 2004/봄호
제목, 혹은 죄목도 모르고
이른 가을날 늙은 느티나무 아래 앉아 오래 전에 겉표지가 떨
어져나간 책을 읽네 어디선가 된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네 잠시
검문하듯 바람이 방심한 책장들을 단숨에 차르륵 읽고 가네 제목
도 모르고 펄럭이던 나뭇잎들이 떨어지네 불온한 전단지처럼 덧
없던 함성들이 날아가네
아니네, 아니네 이건 아직 완성되지 않은 희극의 초고라는 그
차가운 계절성 순시관들에게 맞서 단호하게 부정하는 나뭇가지
들, 그러나 손목에 수갑을 채우고 머리채를 단단하게 휘어잡은
바람은 이미 산등성이 넘어 새날 새 페이지를 열어 보이고 문득
책 속의 글자들이 우수수 쏟아지며 휩쓸려가네
아직 불온함이 유효한 곳으로, 어두 컴컴한 권력의 지하실에서
재생된 빈 공책 한 권과 맞바꿔지기 위해, 또다시 그 누렇게 바랜
미래 어딘가에 송치되어 가출경위서와 반성문을 쓰기위해……
죄목도 모르고
시집 - 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 (문학동네)
自決
이른 아침이었습니다
뒷산을 오르다가
밤새 가만히 서 있었을
가시나무 가시에
이슬 한 방울이
맺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밤새
아무 생각 없이 잠만 쿨쿨 잤을,
아직도 잠이 덜 깬
그 가시나무 가시에
맑고 투명한
이슬 한 방울이 매달린 채
바르르 떨고 있었습니다
시집 『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문학동네, 2003) 중에서
이덕규 시인
1961년 경기 화성 출생.
1998년 현대시학에 「揚水機」 외 네 편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
2004년 제9회 현대시학작품상 수상
시집 <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 2003년 문학동네
현재 화성에서 농사를 짓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