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시

여정 시 보기(7편)

시치 2011. 10. 13. 00:07

여정 시 보기 (7편)

 

자모의 검 외/여정  

 

 

 

 

   혹자가 말하길, 입속은 자객들의 은신처란다. 그들이 즐겨 쓰는 무기는 '영혼을 베는 보검'으로 전해오는 자모의 검이란다. 을씨년스런 날이면 자객들은 검은 말을 타고 허허벌판을 가로질러 어느 심장을 향해 힘차게 달려간단다. 천지를 울리는 말발굽 소리 어느 귓가에 닿으면 그들은 어김없이 이성의 칼집을 벗어던지고 자모의 검을 빼어든단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 한 영혼의 목을 뎅거덩 자르고 나면 자객들은 섬뜩한 미소로 조위금을 전하고 또 다른 심장을 향해 말 달려간단다. 그날에 귀머거리는 복 있을진저, 자객들의 불문율에 있는 '귀머거리의 목은 칠 수 없다'는 조항에 따름이라.

 

   혹자가 말하길, 자모의 검에 찔린 사람들은 귀부터 썩어간단다. 귀가 썩고 뇌가 썩고, 썩고 썩어 생긴 가슴의 커다란 구멍으로 혹한기의 바람이 불어대고 수많은 까마귀떼의 날개짓이 장대비처럼 내린단다. 그 부리에 생살이 뜯기고 새하얀 뼈를 갉히며 그렇게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단다. 그날에 수다쟁이는 화 있을진저, 더 많은 까마귀떼를 불러들임이라.

 

   자객들의 말발굽 소리 요란한 날이면 너희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두 손으로 귀부터 틀어막고 묵직한 바위 뒤에 숨어 최대한 몸을 낮춰라. 그리하면 자객들이 탄 검은 말들이 너희를 비켜가리니, 자모의 검일망정 결코 너희를 해(害)치 못하리라. 귀 있는 자들은 들어라. 이 말로 더불어 너희가 그날에 '복 받았다' 일컬음을 받을지니, 부디 그날에 너희에게 복 있을진저, 혹자의 말이니라.

 

 

 

         —199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칼질

 

 

 

 

 

나는 그녀의 손을 꼭 거머쥐고 지하 레스토랑으로 들어간다

 

 

나는 돈까스, 그녀는 비후까스

메뉴판이 우리를 조금 갈라놓는다

하지만,

우리는 똑같이 수프를 떠먹는다

 

 

나는 돈까스, 그녀는 비후까스

수프를 담았던 빈 접시가 우리를 조금 더 갈라놓는다

나는 돈까스 위에 그녀를 살짝 올려놓는다

그녀는 비후까스 위에 나를 살짝 올려놓는다

나는 왼손으로 고기를 누르고 오른손으로 고기를 자른다

그녀는 오른손으로 고기를 누르고 왼손으로 고기를 자른다

나는 6번의 칼질로 그녀를 19조각 낸다

그녀는 5번의 칼질로 나를 16조각 낸다

하지만,

우리는 중간중간 똑같이 샐러드를 먹는다

 

 

나는 커피, 그녀는 주스

음식을 담았던 빈 접시가 우리를 완전히 갈라놓는다

 

 

나는 오른손으로 사막의 태양이 이글거리는 블랙커피를 마신다

그녀는 왼손으로 남극의 빙산이 둥둥 떠 있는 오렌지주스를 마신다

하지만,

우리는 더 이상 똑같이 먹을 음식이 남아 있지 않다

 

 

나는 그녀를 자리에 두고 카운터로 가서 음식값을 치른다

나는 그녀를 자리에 두고 지하 레스토랑 계단을 오른다

 

 

 

 

 

고정된 사내

 

 

 

 

 

   벽에 붙박인 그 사내는 사각의 틀 속에 갇혀 정육점의 고기마냥 걸려 있다. 머리 윗부분이 잘린 오른쪽 귀가 잘린 그는 시선을 왼쪽 아래에 두고 눈동자를 움직이지 않는다. 입술에는 초승달을 베어 물고 왼쪽 새끼손가락에는 링반지를 끼고 턱을 괴고 있다. 링반지 속에는 그 사내의 영혼 같은 한 여자가 가루가 되어 섞여 있다. 그 사내는 하반신이 없다. 그녀에게 갈 수 있는 길은 하반신과 함께 사라졌고 그녀 또한 그 길과 함께 사라졌다. 그는 늘 벽에 붙박여 꿈결 같은 그 길을 그녀와 함께 걸었던 그 마지막 길을 다시 거닐곤 한다. 그 길에는 풀냄새가 초록초록 싱그럽고 그녀의 젖빛 살냄새 또한 향긋하다. 간혹 그 사내가 뜬눈으로 가위에라도 눌리는 날이면 도로를 이탈한 트럭이 풀들을 짓누르고 그녀의 젖빛 살냄새를 붉은 피로 물들이며 달려온다. 그럴 때면 풀들조차 비명과 함께 하반신이 잘려나간다. 그런 날이면 벽에 붙박인 그 사내의 고정된 두 눈 속에서 피눈물이 마른 나뭇가지 꺾이는 소리를 내며 흘러나오고 그 사내가 붙박인 그 벽조차 붉게 붉게 물들어 노을이 된다.

 

 

 

벌레 11호

 

 

 

 

 

   밥그릇에 담겨 꿈틀댄다. 밥알들이 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댄다. 식탁 위를 달려가는 벌레 4호, 입안에 든 숟가락을 번개같이 빼내어 쳐 죽인다. 오물오물 씹히는 밥알들이 벌레 4호 같다. 콩나물이 꿈틀댄다. 파김치가 꿈틀댄다. 그 사이로 지나가는 벌레 5호, 젓가락으로 집어 들어 그 사이에 끼워 죽인다. 벽이 꿈틀댄다. 의자가 꿈틀댄다. 가만히 방바닥에 드러눕는다. 방바닥에 가만히 있던 벌레 6호, 드러눕는 등짝에 짓눌린다. 나도 몰래 죽인다. 살갗 위를 기어 다니는 벌레 7호, 8호, 9호, 이리저리 뒤척이며 꾹, 꾹, 꾹, 눌러 죽인다. 천장이 꿈틀댄다. 몇 켤레 구두가 내 머리 위에서 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댄다.

   벌레 10호, 잠을 뚫고 들어와 꿈속을 기어 다닌다. 투명한 재떨이를 들어 가만히 얹어놓는다. 서서히 죽인다. 죽은 벌레 10호를 재떨이에 담아 한 번 더 태워 죽인다. 꿈속에서도 꿈틀댄다.

 

 

 

 

                             —시집 『벌레』11호

늙은 방  

 

  더 늦기 전, 늙은 방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잠든 어미의 품속으로 들어가 늘어진 세월 끝에 매달린 젖꼭지 만져봐야 하는데, 멀어진 어미냄새 가까이서 다시 맡으며 어미가 걸었던 수만 갈래 길 같은 주름을 바라봐야 하는데, 그 주름 속 아직 지지 않은 꽃송이 몇이나 될까 헤아려봐야 하는데, 늙은 방, 문은 늘 밖에서 닫혀 있고 나는 늘 문 앞에서만 서성이는데, 더 늦기 전, 늙은 방으로 들어가 어미의 가는 숨소리에 매달려봐야 하는데, 어미의 가랑이 사이로 고개를 들이밀고 들어가 어미의 귀로 듣는 새마을노래 다시 들어봐야 하는데, 어느새, 어미의 머리 위엔 허연 눈만 가득 쌓여 내 가슴속으로 조금씩 녹아들고 있는데, 더 늦기 전, 더 늦기 전에.

 

몇 명의 내가 있는 액자 하나 

 

 

   나의 정신병동에 프리다 칼로가 「헨리포드 병원」의 침대 하나를 옮겨온다. 침대에는 내가 사랑하는 여자가 누워 있다. 나의 병실로 들어서자 그녀의 가랑이 사이에서 탯줄이 흘러나온다. 내 배꼽이 사라지고 나는 그 탯줄에 매달려 그녀의 배 위로 떠오른다. 그녀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내가 허공에서 가부좌를 하고 두 눈을 감는다. 3, 내 몸은 건강하다(세 번 반복한다). 2, 내 마음은 편안하다(세 번 반복한다). 1, 몰입상태로 들어간다(세 번 반복한다). 나는 지금 엘리베이터 안에 있다. 엘리베이터가 천천히 내려간다. 10, 9, 8, 7, 6, ((더 깊이, 더 깊이)), 5, 4, 3, 2, 1,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다. 자궁이다.

 

 

   자궁 안에서 詩를 쓴다. 그녀의 뼈가 한 줄 한 줄 약해진다. 詩가 되지 못해 몸부림친다. 그녀의 진통이 심해진다. 미칠 것 같아 그녀의 배를 찢고 뛰쳐나간다. 탯줄을 끊고 달아난다. 그녀의 내장이 몸 밖으로 흘러내린다. 그녀는 침대에 누워 계속 피를 흘리고 있다. 간호사가 급히 내 뒤를 쫓는다. 이봐요, 보호자님, 보호자님, 보호자님이 내 뒤를 쫓는다. 이봐요, 보호자님, 보호자님이 점점 멀어진다. 나는 문이 닫히고 있는 엘리베이터를 간신히 탄다. 엘리베이터가 빠르게 올라간다. 1, 2, 3,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다. 문이 열리면 다시 10층이다. 10층은 옥상이다.

 

 

   나의 정신병동의 보호사들이 옥상 철문을 두드리고 있다. 그 두드림에 옥상도 울렁대고 바닥도 울렁댄다. 그녀가 없으면 커져버리는 내가 옥상바닥 끝에서 가부좌를 한다. 하늘도 어수선하고 땅도 어수선하다. 두 눈을 감는다. 점점 작아진다. 허공으로 몸이 떠오른다. 머리가 무거워 머리가 먼저 내려간다. 엘리베이터도 따라 내려간다. 10, 9, 8, 7, 6, ((더 깊이, 더 깊이)), 5, 4, 3, 2, 1, 꽝,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린다. 문이 열리면 포토샵이다.

 

 

   그녀의 포토샵 窓에는 프리다 칼로의 「도로시 해일의 자살(1939)」이 걸려 있다. 다른 窓을 열고 두 명의 내가 들어온다. 그녀는 도로시 해일의 자리와 자세를 나에게 내어준다. 두 명의 나는 그녀의 안내대로 그 자리로 가서 그 자세를 취한다. 그녀가 두 명의 나를 미친 사람 보듯 한다. 그리고 「어느 정신병자의 꿈(2010)」으로 저장한다. 그녀가 포토샵 窓들을 모두 닫는다. 그녀는 문을 열고 작업실을 빠져나간다. 나는 어둠 속에 누워 또 다른 나에게 말을 한다. 그렇게 해서 옥상까지 오를 수 있겠어? 물론이지! 하며 또 다른 내가 허공으로 솟구친다. 머리가 무거워 발부터 올라간다. 엘리베이터도 따라 올라간다. 1, 2, 3,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다. 문이 열리면 병실이다.

 

 

   나의 병실에는 내가 사랑하는 그녀가 두 명의 내가 그려진 그림 하나를 걸고 있다.

 

                                                                                        —《현대시》2011년 5월호

 

호러영화를 찍다 

 

 

 

 

   # 1-1

 

 

   13일의 금요일, 소파에 누워 25년이 지난 극장에 간다. 나열 16번 어둠에 앉는다. 효과음만으로도 가슴이 나를 두드린다. 무덤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손이 내 두 눈을 가린다. 손가락들이 틈을 만들어 처녀귀신을 열었다 닫았다 한다. 스피커를 찢고 나오는 비명에 내 몸속의 비명이 기다렸다는 듯 나를 찢고 나간다. 여기저기 피가 튄다. 오싹해진 등골이 식은땀을 흘려보낸다. 떨리는 몸이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고 무덤에라도 들고 싶다. 쥐구멍을 뚫었다 무덤을 덮었다 하는 두 눈이 해골을 보았다 말았다 하고 해골의 비워진 동공으로 쥐의 머리가 잘렸다 붙었다 한다.

 

 

 

   # 1-2

 

 

   건장한 한 사내가 처녀의 몸에 삽질을 한다. 관람석들이 처녀의 몸에서 일제히 비명을 퍼낸다. 처녀의 몸이 무덤을 토해낸다. 무덤에서 스멀스멀 아기들이 기어 나온다. 아기들이 처녀의 피를 빨아먹는다. 뼈를 갉아먹는다. 갉아대는 소리가 관람객들의 뼈를 갉아댄다. 극장 가득 어둠 가득 비명이 쏟아진다. 아기들이 그 비명에 놀라 피울음을 운다. 건장한 그 사내가 피로 물든 아기들을 달랜다. 아기들이 건장한 사내의 품에서 하나, 둘, …… 잠들기 시작한다. 숨소리 하나 나지 않는 고요한 밤, 건장한 그 사내 앞에 처녀귀신이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다. 관람석들이 갑자기 움찔한다. 처녀귀신이 건장한 그 사내를 찢어대기 시작한다. 관람객들이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한다. 잠든 아기들은 자장가인 양 자던 잠을 계속 잔다. 처녀귀신이 한 아기의 몸속으로 들어간다. 한 숨소리가 흘러나오고 그 아기가 갑자기 눈을 번쩍 뜨고 먹이를 바라보듯 우리들을 노려본다.

 

 

   # 2

 

 

   13일의 금요일, 소파에 누워 방금 본 영화를 그 극장 안에서 한 번 더 본다. 다른 관람객에게 밀려 나열 41번 어둠으로 자리를 옮긴다. 효과음만으로는 가슴이 나를 두드리지 않는다. 관람객들의 두근대는 가슴들이 나를 더 누그러뜨린다. 무덤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손이 여기저기에서 비명을 토해낸다. 그 손이 토해낸 비명들이 나는 우습다. 처녀귀신이 나타날 때마다 움찔대는 관람석들이 나는 재밌다. 비명들을 토해내는 무덤도 재밌고 해골도 재밌다. 비명들을 퍼내는 건장한 사내의 삽질도 재밌고 비명들을 빨아대는 아기들도 재밌다. 웃음이 터지기 일보직전, 건장한 사내가 내 웃음보를 달래준다. 비명으로 물들 아기들이 내 웃음보 안에서 겨우 잠을 잔다. 숨소리 하나 나지 않는 고요한 밤이 내 웃음보 안에서 킥킥댄다. 건장한 그 사내의 몸이 비명들과 함께 내 웃음보 안에서 찢겨진다. 잠들지 못한 웃음 하나가 눈을 번쩍 뜨고 처녀귀신의 몸속으로 들어간다. 처녀귀신이 한 웃음과 여러 비명들을 노려본다. 한 웃음과 여러 비명들 사이로 갑자기 눈을 번쩍 뜬 그 아기의 눈동자가 참 고운 하늘빛이다.

 

 

   # 3-0

 

 

   13일의 일요일, 소파에 누워 밀린 잠을 잔다. 호러영화도 닫혔고 참 고운 하늘빛도 닫혔다. 비명도 닫혔고 웃음보도 닫혔다. 묵묵히 밀린 잠을 끌고 가던 내가 갑자기 눈을 번쩍 뜬다. 더 깊은 잠을 예고라도 하듯 다시 잠이 나를 끌고 간다.

 

                                                                                                       —《시인세계》2011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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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정 / 본명 박택수. 1970년 대구 출생. 계명전문대 경영학과 졸업. 199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자모의 검」 당선. 시집 『벌레 1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