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시

[스크랩] 이기인 시인

시치 2011. 9. 20. 17:10



이기인 시인
1967년 인천 출생.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
2000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 「ㅎ방직공장의 소녀들」이 당선
2005년 시집 「알쏭달쏭 소녀백과사전 」
현재 성균관대 국문과 대학원에 재학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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ㅎ 방직공장의 소녀들 / 이기인
손 / 이기인
찢어진 방충망 / 이기인
해바라기 공장 / 이기인
시인에게 온 편지 / 이기인
알쏭달쏭한 소녀백과사전 / 이기인
알쏭달쏭 소녀백과사전
십년 만의 답장 / 이기인

 


 


ㅎ 방직공장의 소녀들 / 이기인

 

 

목화송이처럼 눈은 내리고
ㅎ 방직공장의 어린 소녀들은 우르르
몰려나와 따뜻한 분식집으로 걸어가는 동안… 제 가슴에 실밥
묻은 줄 모르고,
공장의 긴 담벽과 가로수는 빈 화장품 그릇처럼
은은한 향기의 그녀들을 따라오라 하였네
걸음을 멈추고
작은 눈
뭉치를 하나 만들었을 뿐인데,
묻지도 않은 고향 이야기를 늘어놓으면서… 늘어놓으면서 어느덧
뚱뚱한 눈사람이 하나 생겨나서

어린 손목을 붙잡아버렸네
그녀가 난생 처음 박아 준 눈사람의 웃음은 더 없이
행복해 보였네


어둠과 소녀들이 교차하는 시간, 눈꺼풀이 내려왔네


ㅎ 방직공장의 피곤한 소녀들에게
영원한 메뉴는 사랑이 아닐까,
라면 혹은 김밥을 주문한 분식집에서
생산라인의 한 소녀는 봉숭아 물든 손을 싹싹 비벼대네
오늘도 나무젓가락을 쪼개어 소년에 대한
소녀의 사랑을 점치고 싶어하네
뜨거운 국물에 나무젓가락이 둥둥
떠서, 흘러가고 소녀의… 시간이 그렇게 흘러갔다고 분식집 뻐꾸기가 울었네


입김을 불고 있는 ㅎ 방직공장의 굴뚝이,
건강한 남자의 그것처럼 보였네


소녀들이 마지막 戰線(전선)으로 총총 걸어가며 휘파람을 불었네

 

 

 

/ 이기인

 

 

보육원 자원봉사자가 빨래를 너는 동안
끊어진 고구마줄기처럼 더 이상 길을 걷지 않는 아이가 바짓가랑이에 오줌을 흘린다
엄마의 손을 놓친 아이들이 미끄럼틀에서 미끄러지고 또 미끄러진다

 

아이들은 그네의 쇠사슬 부분을 꼭 붙들고 앞 뒤로 흔들거린다

 

아이가 찬 공이 자원봉사자 앞으로 데굴데굴 굴러간다
엄마의 손을 놓친 아이들의 빨랫감이 점점 많아져서 제비처럼 빨랫줄을 가득 메운다
빨래집게가 점점 삭고 있다

 

현대시 (2005년 9월호)

 

 

 

찢어진 방충망 / 이기인

 

 

누군가, 찢어진 방충망을 꿰매어 놓았다
저 바깥 세상의 염증은 군데군데 상처를 만들기 시작한다
       

주문을 받기 위해 <차림표>를 내놓는 여자는 재떨이를 옮기고
냄새나는 구두를 정리하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주방엔 개의 죽음을 둘러싼 대형 냉장고가 으르렁거리고 있다
그 속에서 얼어붙은 턱을, 여자가 더듬는다
       

들썩거리는 솥뚜껑, 여자는 눈물을 빼고 마늘을 찧는다
긴 좌담이 펼쳐진 탁자 위로 오후의 파리떼가 찾아온다

       
우리들의 욕망은 한 그릇 수북하다, 수상하다
가슴이 무너지도록… 방충망으로 돌진한 것은 무엇일까

 

 

 

해바라기 공장 / 이기인

 

 

촛농을 삼켜버린 불빛,
일기의 맨 마지막 이야기는 너무 외롭다는 것이고
너무 외롭다는 것은 소녀의 얼굴에 박힌 주근깨처럼 너무 많았네
어디, 깨진 거울을 좀 보자
 

어제 본 해바라기도 주근깨가 많은 소녀를 닮았네
그 해바라기도 일기장만한 큰 잎사귀로 서서 온종일 울었네
인부들의 겉옷이 해바라기에 걸쳐 있는 동안
해바라기는 인부의 아이를 닮았네


밤새 고개를 숙인 해바라기 앞을 지나서
소녀들 눈 비비고 공장 속으로 들어가버린 후,
해바라기는 얼굴을 들었네
 

공장 근처에서 서성거렸던 인부들아 날 좀 보렴, 보도블록은 다 깔았니,
가끔은 먼 친척처럼
잎사귀를 흔들었던 해바라기를 지나서 온 얼굴
밤늦게 일기 속으로도 들어오고
오늘 공장 가는 길에 새로 깐 보도블록 때문에
해바라기......죽었다고 쓰기도 하네
 

길바닥에 누운 해바라기의 주근깨를 오래 잊지 못하네
공장 가는 길목에 이제 누가 손 흔들어주나

 

 시집 - [알쏭달쏭 소녀백과사전] 창비시인선인천출생
 


 

시인에게 온 편지 / 이기인

 

 

청송교도소에서 편지 한 통이 날아왔다
밥풀냄새가 난다 그쪽도 내 독자다
지금은 봄이군요 그리고 아무 말도 없다
새순이 돋아서 좋다 꽃이 피어서 좋다
그쪽도 어쩌다 내 쪽으로 가지를 뻗어서 좋다
검열한 편지지 속에서 삐뚤삐뚤 피어난 꽃
볼펜 한 자루에서 피어났다
오늘은 저녁 쌀 씻다 한 줌 쌀을 더 씻다

 

 

 

알쏭달쏭한 소녀백과사전 / 이기인
-흰벽

 

                                                

  공장과 공장 사이에 있는 화장실
  흰 문짝은 오랫동안 페인트를 벗으면서, 깨알 같은 글씨를
토해내고야 말았다
    

  똥을 싸면서도 뭔가를 열심히 읽고 싶었던 이 못난 필적은
  필시 쾌활한 자지를 바나나처럼 그려놓고 슬펐을 것이다

    
  작업복을 벗고 자지를 타고 올라가 그 바나나를 하나 따다,
미끄러졌다
    

  위험한 기계를 움직이는  몸에서는 주기적으로 뭉친  피가
흘러나왔을 것이다
  가려운 벽을 긁었던 소녀의 머리핀은 은밀한 필기구,

    
  잔업이 끝나고 처음 만난 기계와 잠을 잤다,
  기계의 몸은 수천 개의 부품들로  이뤄진 성감대를 갖고 있
었다,
 

  기계가 나를 핥아주었다, 나도 기계를 핥아먹었다,  쇳가루
가 혀에 묻어서 참지 못하고 뱉어냈다,
  기계가 나에게  야만스럽게 사정을 한다고,  볼트와 너트를
조여달라고 했다
 

  공장 후문에 모인 소녀들,
  붉은 떡볶이를 자주 사먹는 것은 뜨거운 눈물이 흐를까  싶
어서이다,
  아니다, 새로 들어온 기계와 사귀면서부터이다,

 

 


알쏭달쏭 소녀백과사전 / 이기인
- 연탄

 


아침 콩나물국이 끓자 나는 뒤섞인 젓가락 짝을 맞추고


어머니는 밤새 불덩이와 같은 연탄을 들고 나와 부엌칼로 불덩이와 불덩이를 잘랐다
기적처럼 떨어져 나온 그 연탄을 집어다 집 앞에 탑처럼 쌓아 올렸다


키가 좀더 컸으면,
비뚤어진 아버지의 문패를 바로 잡았을 것이고
고드름을 따다가 개에게 고양이에게 사탕이다! 거짓말도 제법 했을 것이다


나는 쥐가 긁어놓은 비누를 보다가, 간밤의 얼굴을 씻었다
―오늘은 아주 두껍고 소중한 책을 사야해요,


연탄광 속에서
표지가 검은 성경책을 연탄집게로 들고 나오시는 어머니
성경책에 불이 붙었다하면, 부엌칼로 다음 페이지를 떼었지요,

 

 

 

십년 만의 답장 / 이기인   

 


그대가 떠준,
털스웨터를 가슴까지 끌러서 아이의 장갑을 만들었습니다
이제야 당신의 마음이 손에 잡힙니다
아이와 함께 한짝씩 그 마음을 나눕니다
그 어린아이와 액자 속에서 한참 놀다 나른한 오후의 햇살을 보다가
아이가 휘저은 나이를 먹어서,
나는 한입 먹고 놔둔 사과처럼 붉어집니다


초인종 소리를 듣고
노을을 집안에 잘못 들여놓기도 합니다


세월이 흘러,
내 검은 구두에 주름살 생기고 그
구두 속으로 거꾸로 매달린 꽃잎이 메말라 떨어지고
요 앞, 담배가게까지 슬리퍼를 끌고 갔다 돌아오는 길
이웃의 꽃담장을 봅니다.
(십년 전 당신은 왜 저 꽃들처럼 수줍어 피었습니까)


묵묵히 집으로 오는길에
십년동안 빈 우체통에 고갤 처박습니다


저쪽 계란장수가 너무 크게 떠들어서 저쪽 삶을 다시 바라봅니다
그쪽도 잘 있죠

 

출처 : 시와 글벗
글쓴이 : yanggo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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