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시

고영민 시 보기(11편)

시치 2011. 7. 20. 16:20

아내의 등 外 /고영민


아내의 등을 민다

그녀의 뒷모습, 한 페이지를

때수건으로 민다

기울게 쌓아올린 척추 마디

피사의 사탑을 생각하며

나는 아내의 등을 민다

손이 움직일 때마다

팔이 닿지 않는 그 가려운 탑신

아내의 등 사각지대엔

빨간 앵초꽃이 피어난다

세월의 한켠

묵념처럼 뒤돌아 앉은 삶

언제쯤 나는 말을 걸어야 하나

언제쯤 나는 말을 놓아야 하나

빈 명찰 같은 사람아

첫선을 보듯 앉아 있는 내 중년의 얼굴이

그녀의 등

볼록거울에 비친다

 

 

 

질그릇 아내

 

      

 

 

밥하던 아내가

포개진 밥그릇이 빠지지 않아

나에게 들고 왔다

한 그릇에 조금 작은 그릇이 꼭 끼어 있다

 

그릇이 그릇을 품고 있다

내 안에 있는 당신의 아픔

당최, 힘주어 당겨도 꼼짝하지 않는다

마음이 저리 꼭 맞았나보다

뜨거운 물에 그릇을 담그고

위 그릇에 찬물을 붓는다

금세 빠진다

 

홀로 몸 달아

내가 너무 뜨거웠나보다

아니, 부어버린 내 마음

당신에게 찬물이었나 보다

이부자리 저만치 등 돌리고 자는

엎어진 밥그릇

아내를 건너다본다

내 품, 빈 그릇

오늘 선반 위에 동그마니 놓여 있다

 

 

숨의 기원

 

 

1.
 이불 밖으로 나온 딸 아이의 다리를 슬며시 이불 속으로 넣어줍니다 아이는 슬며시 눈을 떠 나를

한번 쳐다보고는 다시 잠이 듭니다

 

저렇게 보는 것은 보는 것이 아닙니다
기억할 수 없습니다
잠결입니다

 

잠은 다시 딸아이의 눈을 감기고 가슴을 부풀려 숨을 고르고 세월을 만듭니다 숨소리는 영혼이

나갔다가 갈 곳이 없어 다시 제 집을 찾아오는 아득한 소리입니다 날숨은 어제 같고 들숨은 오늘

같습니다

 

2
 팔을 뻗어 딸아이가 제 어미의 옷 섶에 손을 찔러 넣습니다 아내가 잠결에 슬몃 눈을 뜨고는 벽에

기댄채 무릎을 안고 있는 나에게 왜, 안자고 있어 라고 물어보고는 다시 잠이 듭니다

 

저렇게 묻는 것도 묻는 것이 아닙니다
기억할 수 없습니다
잠결입니다

 

우리가 손을 내밀어 무언가를 가만히 그러쥘 때 얼마나 많은 시간들이 웅크리고 있을까요 무언가를

가만히 쥐고 싶어 부러 빈손을 한번 움켜쥐는 밤입니다 나는 등으로 전해오는 냉기와 이불 밖으로

잠깐 빠져 나왔던 딸아이의 한쪽 다리와 작은 손에 쥐어진 아내의 따뜻한 유방을 생각합니다

 

3
 딸아이도, 아내도 숨이 깊어집니다 일순 겹치기도 하고 어긋나기도 합니다 아이의 숨은 짧고 아내

의 숨은 더 멀리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발품입니다

 

이제 앞강으로 물을 거슬러 오르는 물고기들이 차갑게 알을 슬어놓고는 한 生을 전해주려 떠내려

올 시간입니다 방안은 온통 숨소리뿐입니다 나는 딸과 아내의 숨소리 사이로 내 숨소리를 유심히

들여다봅니다

 

어디를 갔다 오는 곡절입니까,
기척입니까

 

 

너와 동침을 한다

 

 

시외버스를 탄다
운주사행 표를 들고 자리를 찾으니 한 여자
내 옆자리에 다소곳이 앉아
슬며시 다리를 비킨다
창문은 계속 풍경만을 버릴 뿐
말 한마디 붙이지 않고
순간, 여자가 불상처럼 잠들어
나도 그녀의 이불 속에 입정한다
아, 너였구나
문득 내 어깨에 얹히는 머리
여자는 내 어깨 위 열반인 양 들고
삼천의 인연이었을 이 옷깃의 여자
등받이를 적당히 눕혀
외간 남자와 나란히 잠이 들었다
잠든 사이, 이불은 계속 울음을 틀어막지만
한 계집아이가 붉은 이불 속에서 기어나오고
미륵의 사내아이가 기어나오고
기어나오고,
날은 저물어 버스는 오체투지로
들녘을 넘고 고개 능선을 지나
마을마다 돌 하나를 올려놓는다
그녀와 하룻밤 천불천탑을 쌓고
와불을 일으켜 세울 즈음
누군가 어깨를 흔들어 깨운다
어쩌나, 첫닭이 운다
그러나 아, 진정 용화세계가 너였구나
헝클어진 머리와 옷매무새를 다시 추스리며
와불은 스스로 일어난다
성급히 차문 밖으로 나오니
일주문 안으로 사라지는 여자,
천천히 불상 속으로 들어가 천년을
그 자리에 누워 있다

 

 

 

 

밥그릇 


밥하던 아내가
포개진 밥그릇이 빠지지 않아
나에게 들고 왔다
한 그릇에 조금 작은 그릇이 꼭 끼어 있다

그릇이 그릇을 품고 있다
내 안에 있는 당신의 아픔
당최, 힘주어 당겨도 꼼짝하지 않는다
물기에 젖어 안으로 깊어진 마음
오늘은 저리 꼭 맞았나 보다

한 번쯤 나는 등 뒤에서 너를 안아보고 싶었네

선반 위,
씻긴 두 개의 밥그릇이
봉분처럼 나란하다  

 

 

똥구멍으로 시를 읽다 

 

겨울산을 오르다 갑자기 똥이 마려워

배낭 속 휴지를 찾으니 없다

휴지가 될만한 종이라곤

들고 온 신작시집 한권이 전부

다른 계절 같으면 잎새가 지천의 휴지이련만

그런 궁여지책도 이 계절의 산은

허락치 않는다

할 수 없이 들려 온 시집의 낱장을

무례하게도 찢는다

무릎까지 바지를 내리고 산중턱에 걸터앉아

그분의 시를 정성껏 읽는다

읽은 시를 천천히 손아귀로 구긴다

구기고, 구기고, 구긴다

이 낱장의 종이가 한 시인을 버리고,

한권 시집을 버리고, 자신이 시였음을 버리고

머물던 자신의 페이지마저 버려

온전히 한 장 휴지일 때까지

무참히 구기고, 구기고, 구긴다

펼쳐보니 나를 훑고 지나가도 아프지 않을 만큼

결이 부들부들해져 있다

한 장 종이가 내 밑을 천천히 지나간다

아, 부드럽게 읽힌다

다시 반으로 접어 읽고,

또다시 반으로 접어 읽는다

  

 

계란 한판

 

대낮, 골방에 쳐박혀 시를 쓰다가

문 밖 확성기 소리를 엿듣는다

계란 …(짧은 침묵)

계란 한 판 …(긴 침묵)

계란 한 판이, 삼처너언계란 …(침묵)…계란 한 판

이게 전부인데,

여백의 미가 장난이 아니다

계란, 한 번 치고

침묵하는 동안 듣는 이에게

쫑긋, 귀를 세우게 한다

다시 계란 한 판, 또 침묵

아주 무뚝뚝하게 계란 한 판이 삼천 원

이라 말하자마자 동시에

계란, 하고 친다

듣고 있으니 내공이 만만치 않다

귀를 잡아당긴다

저 소리, 마르고 닳도록 외치다

인이 박혀 생긴 생계의 운율

계란 한 판의 리듬

쓰던 시를 내려놓고

덜컥, 삼천 원을 들고 나선다.

 

푸른 고치

 

시골집에서 박스에 찰옥수수를 담아

소포로 보내왔다

포장이 단정하다

옥수수를 내려다보니

옥수수는 단단히 스스로를 포장하고 있다

몇 겹 포장지에 겹 싸여 있다

포장지를 벗기니

그 안, 다칠까

또, 실뭉치가 가득하다

자신이 얼마나 귀하여

옥수수는 이토록 스스로를

꼭 감싸 안았을까

나는 나를

이만큼 사랑하지 못했다

 

 

허밍, 허밍

 

해질녘 저 밭은 무엇인가

해질녘 저 흐릿한 논길은

해질녘 밭둑을 돌아 학교에서 돌아오는 거미 같은 저 애들은 무엇인가

 

긴 수숫대

매양 슬픈 뜸부기 울음

 

해질녘 통통통 경운기의 짐칸에 실려 가는

저 텅 빈 아낙들은 무엇인가

헛기침을 하며 걸어오는 저 굽은 불빛은 무엇인가

 

해질녘 주섬주섬 젖은 수저를 놓는

손(手)

수레국화 옆에서 흙 묻은 발목을 문지르는 저 고단함은

해질녘 내 이름 석 자를 적어온

이 느닷없는 통곡은 무엇인가

 

해질녘, 해질녘엔

세상 어떤 것도 대답이 없고

죽은 사람은 모두 나의 남편이고 아내이고

해질녘엔 그저 멀리 들려오는

웃는 소리, 우는 소리

 

허밍, 허밍

 

        과수원 

   

  내가 하는 일은 농약이 바닥에 가라앉지 않도록 하루 종일 약통을 저어주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중간에서 호스를 당겨주는 어머니의 도움으로 1만평 과수원의 사과나무 한 그루 한 그루 빠짐없이 농약을 쳤는데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햇빛에 앉아 막대기로 커다란 농약 통을 젓는 것이 여간 지루하고 심심한 일이 아니어서 나는 그 긴 막대기로 약통 안에 영어 스펠링도 쓰고, 씨발이라고도 쓰고, 보지라고도 쓰고, 막대기를 빠르게 휘저어 회오리를 만들기도 하고, 내가 좋아하는 양인순의 이름도 썼다가 지우기도 하고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한나절 사과나무에 약을 친 아버지가 물큰 농약냄새를 풍기며 내게 걸어와 마스크를 벗으며 하시는 말이, 너 하루 종일 약통에다 뭐라 썼는지 내 다 안다! 라며 내 머리통을 어루만지며 웃으시는데

 

  내가 저은 약통의 농약이 어머니가 당기던 길고 긴 호스를 타고 흘러 아버지가 들고 있는 분무기 노즐을 빠져나올 때 ~발씨발씨발, ~지보지보지 이렇게 나왔던 걸까, 아버지랑 어머니는 농약에 취해 회똘회똘 집으로 향하고 나는 국광처럼, 홍옥처럼, 아오리, 부사처럼 얼굴이 자꾸만 빨개졌다

 

       주말연속극

   

  팔순의 어머니 아버지 두 분만 사시는 고향집에 내려가니 그동안 그럭저럭 나오던 TV가 칙칙거리며 나오지 않는다. 늙은 어머니는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고 늙은 아버지는 대문간을 지키고 젊은 나는 세워놓은 안테나를 동서남북 돌려보다 신통치 않아 아예, 통째로 뽑아들고 감나무 옆, 뒤란 시누대밭, 장독대 뒤 곁으로 왔다갔다한다.

  내가 대문간의 늙은 아버지한테 잘 나와요? 라고 물으면 늙은 아버지는 대문 앞에 서 있다가 할멈, 잘 나와? 라고 묻고 늙은 어머니가 아까보담 더 안 나와요, 하면 늙은 아버지가 다시 말을 받아 아까보담 더 안 나온다, 하고 젊은 나한테 외친다.

  나는 또 자리를 옮겨 잘 나와요? 하고 묻고 늙은 아버지는 늙은 어머니에게 똑같이 재우쳐 묻고 늙은 어머니는 늙은 아버지에게 대답하고 늙은 아버지는 젊은 나에게 대답한다.

  젊은 나는 반나절 팥죽땀을 쏟으며 그 기다란 안테나를 들고 뒤뚱거린다. 세 사람이 연신 묻고, 묻고 대답하고, 대답한다. 늙은 아버지가 대문간을 지키고 있기가 따분한지 담배 한 개비를 피워물며 쭈그리고 앉아 대강 나오면 그냥 저냥 보제, 하던 차 굴뚝 옆에 자리를 잡아 안테나를 돌리니 방안에서 아이구야 겁나게 잘 나온다, 라는 늙은 어머니의 목소리가 늙은 아버지를 통하지 않더라도 내 귀까지 선명하다. 돌아가지 않게 단단히 비끄러맨다. 방 안에 들어와 채널을 돌려보니 7번, 9번, 11번 다 화면이 선명하다.

  저녁 늦게 서울에 올라와 마누라, 자식새끼랑 주말연속극을 본다. 늙은 아버지도 늙은 어머니도 시골집에서 주말연속극을 본다. 참, 오랜만에 늙은 아버지, 늙은 어머니, 젊은 자식놈이 안테나가 맞아 저무는 주말 저녁, 함께 연속극을 본다. 가슴 뭉클하고 선명한 주말연속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