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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도시 (외 1편)/박후기

시치 2011. 7. 19. 13:46

눈먼 자들의 도시 (외 1편)/박후기

 

 

 

   을지로4가 일식횟집에 내어걸린 과메기들, 하나같이 눈이 멀었다. 나일론 줄에 눈을 꿰인 채 줄지어 앉은 사람들, 아가미 벌려 숨을 들이켠다. 어차피 우린 피도 눈물도 없는 몸, 타인의 눈물이라도 마셔줘야 하지 않겠는가. 낄낄거리며, 술잔에 담긴 참치 눈물을 나누어 마신다. 양복 단추를 열어젖히자, 과메기들 배알도 없다. 그렇게,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그들은 스스로 눈을 찔러 눈먼 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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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먼 자들의 도시 :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 제목.

 

 

                                  —《시인세계》2011년 여름호

 

 

 

버스 종점은 어디에 있는가

 

 

 

사랑할 때,

버스 종점은 모든 애인의

집 근처에 있다

 

이를테면,

잠든 막차에서 내려

돌아가지 않을 궁리를 하며

아무리 천천히 걸어도

애인은 갑자기

파란 대문 안으로

사라져 버리고

 

상심한 사내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뒤돌아보다,

심야 택시를 타고 어둠의

경계를 지나 태양 저편

해 뜨는 셋방으로

돌아가곤 했던 것이다

 

세상 끝까지 함께 가자고,

돌아가지 않겠다는 오기만

찻간에 잔뜩 부려 놓은 채

빈주머니 뒤지며 혼자

집으로 돌아가던 그곳에

버스 종점이 있었다

 

어느덧

버스마저 세월에게 추월당하고,

사내는 더 이상

종점에 닿을 수 없다

세상 끝까지 함께 가자고,

덜컹거리는 인연의 뒷좌석에 앉아

가만 어깨를 기대어오는 사랑조차

두려운 나이가 된 까닭이다

 

사내도 그 누구도

생의 종점을 지나칠 수는 없기에,

우리는 모두 죽음 앞에서

겁 많은 귀순자가 되어

자꾸 뒤를 돌아보곤 하는 것이다

 

 

 

                             —《시와 경계》2010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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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후기(본명: 박홍희) / 1968년 경기도 평택 출생.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2003년 《작가세계》 신인상에 '내 가슴의 무늬' 외 6편의 작품을 발표하며 등단. 시집 《종이는 나무의 유전자를 갖고 있다』『내 귀는 거짓말을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