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시

이재무 시 보기(4편)

시치 2011. 6. 19. 14:32

이재무 시 보기(4편)

<1>-경쾌한 유랑/이재무-

 

 

새벽 공원 산책길에서 참새 무리를 만나다

저들은 떼 지어 다니면서 대오 짓지 않고

따로 놀며 생업에 분주하다

스타카토 놀이 속에 노동이 있다

저, 경쾌한 유랑의 족속들은

농업 부족의 일원으로 살았던

텃새 시절 기억이나 하고 있을까

가는 발목 튀는 공처럼 맨땅 뛰어다니며

금세 휘발되는 음표 통통통 마구 찍어대는

저 가볍고 날렵한 동작들은

잠 다 빠져나가지 못한 부은 몸을,

순간 들것이 되어 가볍게 들어 올린다

수다의 꽃피우며 검은 부리로 쉴 새 없이

일용할 양식 쪼아대는,

근면한 황족의 회백과 다갈색 빛깔 속에는

푸른 피가 유전하고 있을 것이다

새벽 공원 산책길에서 만난,

발랄 상쾌한 살림 어질고 환하고 눈부시다

 

<2>- 주름진 거울/이재무-

 

 

거울 속 굵게 팬 주름들 곁,

갓 태어난 잔주름들

어느새 일가를 이루었구나

 

저 굴곡과 요철은

시간의 밀물과 썰물이 만든 것

 

주름 문장을 읽는다

주름 속에는 눈 내리는 마을이 있고

눈에 거듭 밟히는

윤곽 흐릿한 얼굴이 있고

만지면 촉촉이

손에 습기가 배는 풍금 소리가 있다

 

이마에서 발원한 주름 물결

번져서 온몸을 덮으리라

  

<3>- 신발이 나를 신고/이재무-

  

 

주어인 신발이 목적어인 나를 신고

 

직장에 가고 극장에 가고 술집에 가고 애인을 만나고

은행에 가고 학교에 가고 집안 대소사에 가고 동사무소에 가고

지하철 타고 내리고 버스 타고 내리고

 

현관에서 출발하여 현관으로 돌아오는 길

종일 끌고 다니며 날마다 닳아지는 살[肉]

끙끙, 봉지처럼 볼록해진 하루

힘겹게 벗어놓고

아무렇게나 구겨져 침구도 없이 안면에 든다

  

<4>- 첫인사/이재무-

 

 

초면인 사람과 통성명 주고받은 뒤

고향이 어디십니까? 대신에

어디 사세요? 하는 인사 더 자주 받는다

이 질문의 변화는 심상한 것이 아니다

마음의 평지에 불쑥 돌 솟아오른다

여의도에 삽니다

아하, 좋은 데 사시는군요

나는 망설이고 망설인다

오해 풀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청자는 내 초라한 입성 재빠르게 훑어본다

속내 들킨 이의 발개진 얼굴,

서리 맞은 배추 잎같이 시들어가는 목소리로

아, 예, 전, 전세인데요

그러면 그는 그런다 겸연쩍다는 듯

전세라도 어딘데요? 여의도잖아요

마음의 평지에 불끈 돌 솟아오른다

 

 

<<이재무 시인>>

 

*1958년 충남 부여 출생.

*동국대학교 국어국문과 석사 수료.

*1983년 《삶의 문학》으로 등단.

*시집 『섣달 그믐』 『온다던 사람 오지 않고』 벌초』 『몸에 피는 꽃』

『시간의 그물』 『위대한 식사』 『푸른 고집』『저녁 6시』『경쾌한 유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