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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배후 (외 2편)/김연아

시치 2011. 6. 10. 23:06

시간의 배후 (외 2편)/김연아

 

 

 

당신의 눈은 전혀 다른 섬광을 가지고 있어요

어두운 물에서 떠오르는 백련의 검은 눈

별들의 착란 속에서 흔들리는 눈

 

나는 당신을 나의 이름으로 삼는 자

밤이 낳은 얼룩, 밤의 그림자랍니다

잉크를 빨아들이는 압지처럼

속삭임으로 전해지는 말을 보존하고 있어요

 

가보지 않은 먼 곳의 소문에 귀 기울이는 사람들,

미래의 시인들이 이상한 나라의 문법을 구사하는 동안

나는 '여기'의 한계에서 몽상하는 법을 배우죠

 

당신은 가장 충만한 말 속에 존재하는 사람

입맞춤만큼이나 가까이 있지만

벙어리가 꾸는 꿈처럼 말로 옮길 수 없습니다

당신은 모든 말의 배후에 있기 때문입니다

 

처녀의 젖가슴 위로 잠들러 오는 일각수처럼

당신의 아름다움은 사랑으로부터 오고

그 수줍음은 하도 깊어서

찾아내려고 하면 할수록 찾을 수 없습니다

당신은 어둠의 배후에 있는 어둠입니다

 

고래의 뱃속에 든 요나처럼

한 줄기의 빛도 나에게 닿지 않지만

먼 곳에서 온 말이 내 몸을 뚫고 들어옵니다

 

나에게 태초란 무엇일까요?

내 몸은 당신의 집, 당신이 들어온 이후로

당신 밖의 것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릅니다

나는 비틀거리는 말(言)들을 끌고

밤의 국경을 넘습니다

 

내 안에 사물들의 시간이 내려옵니다

사물들은 자신의 이름으로 말하기 시작했어요

노래로 서로를 부르는 동물들처럼

어느 날 당신과 운명적으로 만나게 되겠지만,

 

나는 누구에게도 읽히지 않은 무명의 책

당신의 호흡을 따라 노래하는 책

바람이 범람하고,

제비꽃 눌렸던 자국이 갈피에 남아있습니다

 

 

 

                           —《다층》 2010년 겨울호

 

 

천사가 지나간다

 

                                                                         세틴바우어 새의 정원에는

                                                                                            시의 행처럼

                                                        숲에서 가져온 물건들이 배열되어 있다

 

 

 

그의 날개 색은 바꿀 수 없어도 구애를 위한

그 정원의 전시물은 끝없이 바뀐다

 

저는 블루베리 열매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표백된 조개껍질

딱정벌레의 무지개빛 날개를 가지고 있습니다

나와 결혼해주세요

 

구애하는 새틴바우어 새처럼 나는 낱말을 배열한다

아무도 본 적이 없는

천사의 날개에서 떨어진 눈(目) 같은 것은 제외하고.

 

나는 사월이 여신처럼 올라오는 언덕에 서서

지나간 사랑의 마지막 감촉 같은 것을 되새겼다

개울가 버드나무 아래에서의 한낮

입술에 닿는 따뜻한 비,

입속에서 자꾸 맴도는 금빛 단어들

 

오늘, 내 혀는 투명한 실로 꿰매져 있고

오늘, 내 눈물에선 짠맛이나

오늘, 내가 물푸레나무가 되어 너의 옆에 앉는다면

너는 헤엄치는 새 같아질 거야

 

입안에 태양을 머금고 그는 세상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끝없는 응시로부터 나오는 영감 같은 것

내가 느낌으로 충만한 하얀 종이와 마주할 때

먼 곳에서 온 낱말들이 나에게 닿을 때

 

난초 잎이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들었을 뿐

그가 오거나 멀어져 가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를 이름 없이 알아본다

그는 묵언으로 메시지를 전달하고

그 소리는 흔들리고 머뭇거리는 환영 같아

새들이 휘저어 놓은 공기 속에 빛들이 떠다니는 소리가 들려

 

모든 색깔의 스펙트럼을 가진 하얀 유령처럼

그는 하늘의 문체를 흉내 내어 꽃들을 만들어내고

사물들의 이름을 바꾼다

누군가 슬쩍 끼어들어 써놓은 문장 같은 것

내가 쓰고자 했으나 쓰지 못했던 문장들

 

유리창을 스치는 굴뚝새 그림자처럼

말과 침묵 사이, 천사가 지나가는가

내 사랑이 서 있을 법한 자리에

작은 낱말이 하나 서 있다

오랜 망설임 끝에 다시 받아들여지는 연인처럼

 

 

 

                                    —《시와 지역》2010년 겨울호

 

 

마임의 시간

 

 

 

한밤중 강 속에서 머리 셋이 달린 거대한 뱀이 지나갔다

별이 꽂힌 몸을 뒤척이며

 

당신은 지금 한 남자를 보고 있다

저기 케이블이 끊긴 전화 부스 안,

무릎에 얼굴을 묻고

밤 속으로 자신을 방전하는

 

그는 그림자를 벽에 걸고 살아온 사람

마왕의 어릿광대,

최고의 날을 웃음에 바쳤다

이 도시의 사람들은 극장에서 염색되고

세상을 하나의 농담으로 만들어버린다

 

오늘밤 그는 편집증 환자

사람의 발자국 소리에 울음을 뚝 그치는 귀뚜라미처럼

아무것에도 왜곡되지 않기를 고집한다

 

그러나 하늘로 올라가는 저 옥탑의 웃음소리

그는 단번에 그 머리통을 내리쳤지

웃음이 그를 바라보기도 전에

아이들의 눈이 비명이 되기도 전에

 

         그 머리는 불과 흙으로 흘러넘치고

         죽음을 모르는 마왕은 그 안에서 비틀거렸지

 

한 손은 얼음 같고, 한 손은 불 탈 때

어느 것이 당신 게 아니라고 생각하는가?

어떤 전제가 당신을 속이고

어떤 언어가 당신을 끌고 가는지 알고 있는가?

 

그의 혀는 이미 마취되어 타르냄새를 풍긴다

머리 깎는 사람처럼 앉아 있는 그를

비에 젖은 말보로 담뱃갑이 지켜보고 있다

 

         당신은 과일냄새 나는 젖가슴과

         비극적 환희를 사랑했다

         잠든 아가의 분홍 손톱을

         당신이 키운 토마토의 맛을 사랑했다

 

흑단색 밤은 그림자 위에 닫혀 있고

불 꺼진 창마다 단단한 얼굴이 붙어 있다

웃음은 유독한 약

웃음을 살해한 자, 거기에 숨을 수 없다

 

버려진 수캐가 어둠을 물고 밤의 공터를 지나갔다

거룩한 마왕은 먹구름 뒤에 살아 있고

심호흡을 하느라 구름은 기우뚱거렸다

 

어둠 속에서 히드라좌의 별빛이 당신의 얼굴에 반사된다

자정이 울린다

 

 

 

                             —《현대문학》2010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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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아 / 경남 함양 출생. 연세대학교 심리학과 졸업. 2008년 봄《현대시학》으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