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시

손현숙 시 보기(5편)

시치 2011. 3. 17. 00:42
손현숙 시 보기(5편)

 

공갈빵 外/손현숙

  

 

  엄마 치마꼬리 붙잡고 꽃구경하던 봄날, 우리 엄마 갑자기 내 손을 놓고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걸

음을 떼지 못하는 거야 저쯤 우리 아버지, 어떤 여자랑 팔짱 착, 끼고 마주 오다가 우리하고 눈이 딱,

마주친 거지 “현숙이 아버…….” 엄마는 아버지를 급하게 불렀고, 아버지는 “뭐라카노, 아주마시!

나, 아요?” 바바리 자락 휘날리며 달아나버린 거지

 

  먹먹하게 서 있는 엄마를 바라보며 나는 갑자기 배가 살살 아프기 시작했어 할 수 없이 집으로 돌

아오는 길, 나는 배가 고픈 건지, 아픈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서러웠거든 우리가 대문 밀치고 들어서

기가 무섭게 아버지는 ”어디 갔다 인자 오노, 밥 도고!” 시침 딱 갈기고 큰소리쳤고 엄마는 웬일인지

신바람이 나서 상다리가 휘어지게 상을 차렸던 거야 우리 엄마 등신 같았어

 

  그러면서 오늘까지 우리 엄마는 아버지의 밥때를 꼭꼭 챙기면서 내내 잘 속았다, 잘 속였다, 고맙

습니다, 그 아버지랑 오누이처럼. 올해도 목련이 공갈빵처럼 저기 저렇게 한껏 부풀어 있는 거야

 

광대

   

 

  위험이 내는 길은 싱싱하다

  북한산 염초, 만경 하루에 치고

  하산하는 길, 산이 출렁 땅이 빙빙 돌고 돌아

  팔다리 제멋대로 흔들리며

  내가 산이고 땅이고 바람이다

 

  빗방울 한두 방울 묻어나는 골짝

  비구름과 한바탕 뒹굴어도 보고

  바람의 나라에선 머리칼 뿌리째 흔들렸다

  절벽길 붙들어서 벼랑 꽃하고 눈 맞았을 때

  아찔, 천 길 낭떠러지가 지척이다

 

  지금 실컷 살다 가는 거

  일하고 울고 웃고 떠들어 난장 치면서

  흑암을 꿰차며 사라지는 유성처럼

  티끌 한 점 없이 몽땅 탕진하는 거

  피를 화끈 돌려 보는 거

 

  살아 있어서 보고 듣고 만지고

  바닥 치면서 저기, 궁창에 흐르는 말

  알아듣지 못하지만 나, 여기서 당신하고 눈 맞추면서

  미끄러지면서 슬픈, 기쁜, 오늘

  한 판 잘 붙어먹었다

 

이상한 동거

  

 

 

  여기는 섬, 고독과 고독이 따로 앉아 밥 끓인다 한 사람은 문 안에서 한 사람은 문 밖에서 메뉴도 제각

각 한쪽은 매운탕이신가, 얼큰하고 비리다

 

  나는 매일 햇빛과 물과 바람을 먹고 자란 초식의 자손, 우리는 어쩌면 달과 별에서 시작된 손금이 다

른 백성, 어쩌다 이 먼 나라까지 불려 와서 새끼를 나누게 되었을까

 

  그대 나랏말은 여전하신가, 난 내 나라 말 잊은 지 오래, 우리 집 냉장고는 물고기를 좋아하는 그대의

충복, 난 그 옆에 땅을 붙여 상추며 쑥갓이며 또 이것저것 조금씩 갈아먹으며 파도 소리에 졸음을 키웠

  배는 언제 당도할는지, 난 짐을 싸야 하는데, 어쩌자고 내 것은 하나도 없다 그래도 알 수 없는 바람의

등을 타야하느니, 당신의 안부가 궁금하다

 

 맞서다

   

 

  사진은 움직이는 빛을 붙잡는 거다

  순광은 일상처럼 담담하고

  역광은 칼로 베는 듯 날카롭다

  간혹 사광을 쓰기도 하지만

  나는 비명처럼 선연한 역광을 즐긴다

 

  역광으로 사진을 찍을 때

  렌즈는 해와 정면으로 맞서야 한다

  한 장면을 골똘히 들여다보며

  카메라의 눈은 오래 열려 있어야 하는 거다

  보이는 것 말고도 햇빛 속으로 숨어버린

  저 속의 내막을 뼛속까지 읽어내야 한다

 

  본다는 것은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다는 것

  시선은 집요한 애무다

  나는 당신을 내 속에 단단히 박아 넣고 싶었다

 

  그러나 당신은 태양을 등진 채 나를 본다

  눈부셔라, 총 쏘듯 카메라의 셔터를 슛팅하자

  오! 나의 아름다운 당신,

 

  순식간 깜깜하다

 

 

  

 

 

  사진 속 그 남자의 손은 예리하다

 

 

  자코메티 조각처럼 그의 손가락은 가늘고 길다 검지와 중지 사이 담배는 아직도 우리의 들숨 날숨을

기억하는 듯 연기 사라지는 쪽으로 그의 눈길도 하염없다 칼금처럼 그어진 미간의 주름, 울음을 삼켜

버린 사막 같은 저 눈빛, 막막한 표정과 소용없이 흘러가는 시선 그 끄트머리쯤에서 나 살면 안 될까

 

 

  담배는 그의 또 다른 손가락 빨기, 배냇짓이다 자기가 자기를 감각하는 최초의 몸짓, 최후의 몸부림,

내 몸은 저 손을 기억한다 마음보다 먼저 도착해서 마음보다 먼저 나를 알아차린 저 길고 가느다란 비

수, 스칠 때마다 나를 베고 다시 살려놓았다

 

 

  그가 내 뱃속에서 몸을 한 바퀴 틀었다

 

 

  내 사진에 담겨 침묵하는 동안에도 무럭무럭 자라 내 복부를 찢는다 나는 이제 그를 도로 낳아야 한

다 내가 앞섶을 헤치고 젖을 물리기 전, 그의 촉수에 걸려 엄마가 되기 전, 태를 자르고 도망쳐야 한다

 

 

<<손현숙 시인 약력>>

 

*1959년 서울에서 출생.

*신구대학 사진과와 한국예술 신학대학 문창과 졸업.

*1999년 《현대시학》에 시 <꽃들은 죽으려고 피어난다> 외 4편으로 등단.

*시집으로 『너를 훔친다』(문학사상사, 2002)와 『손』(문학세계사, 2011)가 있음.

*'국풍' 사진공모 수상, 토지문학제 '평사리문학상'  수상.

*2002년 문예진흥기금 수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