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문학》 신인상 당선작_ 김수정 / 팽나무(외 4편)
《21세기문학》 신인상 당선작_ 김수정 / 팽나무(외 4편)
심사위원 : 오세영, 서원동
팽나무 (외 4편)
김수정
단청이 벗겨진 대웅전 모퉁이,
늙은 팽나무는 한쪽 귀만 열어 두었다.
이끼가 잔털처럼 세파를 걸러주는
울퉁불퉁 길쭉한 귓속,
이따금 호기심 많은 동자승이
겹겹이 쌓인 운지버섯 귀지를 파주면
귓불을 움찔거리며 시원타 한다.
귓구멍으로 일개미가 수시로 들락거리고
슬픔을 물어온 두견새가 한나절 울다 가면
정수리 한 귀퉁이가 콕콕 쑤시기도 하련만,
내색을 않는 팽나무 보살.
이 절과 함께 늙어온 사람들은
백팔 배 후에도 못내 버리지 못한 마음을
팽나무 귓가에 쏟아놓곤 하지.
낡고 서럽고 자그마한 이야기들은
외이도外耳道처럼 좁고 긴 뿌리를 지나
칡넝쿨 우거진 계곡 물소리로 흘러
아무도 그 사연을 알아차리는 이가 없다.
입이 무거운 도반이 다녀간 후에는
듣는 귀밖에 없는 보살님 귓속이
더욱 넓고 깊어진다.
별똥별
아버지는 해마다
첫물 수박을 부치셨다.
폭염 속 아파트에 갇혀
배송된 수박을 쩍 가르면
아버지의 그림자에 숨던
쪼끄만 아이들이
점, 점 박혀 있었지.
수박 순처럼 구불구불 낙동강 따라
비둘기호 기차가 뱉어놓은 씨앗들은
큰 도시로 몰려가고
한물간 유행가만 흥얼거리며
까맣게 말라가던 줄기.
아버지는 아직도 농사를 짓는지
제삿날 올려다 본 하늘은
온통 수박색으로 물들어
……
별똥별이 떨어진다!
올해는 밤하늘에서
특급으로 배송을 받는다.
가르마
가르마를 바꿔 탔다.
머리를 감으면
이 작은 머리통에 분할선이 무어냐고
쓰러진 벼처럼 드러눕는 머리카락.
파마 약을 몇 번이나 바르고
드라이어로 눌러 붙여도
굵은 머리칼 몇은, 기어이 돌아눕는다.
가르마 한 줄 지우는 일이
못줄 옮겨 잡는 일보다 쉽지 않다.
경원선 철길 옆, 벼들이 누렇다.
윗마을, 아랫마을을 가르며
기차가 달리고
화약 연기처럼 흩어지는 기적 소리.
날파람이 새줄을 흔들자
놀란 새들, 일제히 날아오른다.
신탄리역 끊어진 철길,
철조망이 그어놓은 가르마 위를
훨훨 날아가는 새떼…….
죽간竹簡
오늘 처음 당신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세로줄로 쓰신 열 장 빼곡히
마디마디를 넘어온 사연들이 적혀있습니다.
치열했던 봄, 여름, 가을을 읽습니다.
촘촘히 이어붙인 댓조각 군데군데
둥글게 패인 눈물 흔적,
내게는 한 번도 보여 주지 않았던 슬픔이
기우는 반달로 떠있습니다.
뒤집어보면, 닳은 지문처럼
담담하게 쓰여진 추신 한 줄,
당신은 대꽃 필 날을 기다리는 중이라 하셨습니다.
내게로 옮겨온 슬픔 하나가
단소 가락처럼 서늘해진 저녁입니다.
죽 한 그릇
오랜만에 도요물떼새가 돌아왔다.
기러기, 청둥오리, 큰고니까지 모인 늪,
저녁 안개가 뜨물처럼 흐른다.
생이가래, 자라풀 떠다니는 수면,
갈변한 잎들이 질척거린다.
바람은 여기저기 연잎 보자기를 들춰
깨알처럼 붙어있던 논고둥을 핥아먹고
우항산 너머로 사라졌다.
잉어와 각시붕어 몇 마리 깨작거리곤
여전히 홀쭉한 이마배*.
버드나무, 가는 팔로 휘휘 저어
배불리 먹고는 이른 잠에 빠졌다.
가시연꽃 시퍼런 가시까지 우물우물 씹어서
사진 찍는 객식구도 떠먹이고는
일억 사천 살의 우포,
새끼에게 제 살 모두 발라 먹인
우렁이 속처럼, 고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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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마배 : 우포牛浦의 명물인 목선. 수초에 걸리지 않으려고 뱃머리 ‘이마’를 곧추세운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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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수정 / 1969년 대구 출생. 경북대 사범대학 지리교육과 졸업.
——《21세기문학》 2011년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