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다시보기
세헤라자데 /강성은
시치
2010. 11. 21. 21:15
세헤라자데 /강성은
옛날이야기 들려줄까 악몽처럼 가볍고 공기처럼 무겁고
움켜잡으면 모래처럼 빠져나가 버리는 이야기 조용한 비명
같은 이야기 천년 동안 짠 레이스처럼 거미줄처럼 툭 끊어
져 바람에 날아가버릴 것 같은 이야기 지난밤에 본 영화같고
어제 꿈에서 본 장면 같고 어제 낮에 걸었던 바람 부는 길 같은
흔해빠진 낯선 이야기 당신 피부처럼 맑고 당신 눈동자처럼
검고 당신 입술처럼 붉고 당신처럼 한번도 본 적 없는 이야기
포르말린처럼 매혹적이고 젖처럼 비릿하고 연탄가스처럼 죽여
주는 이야기 마지막 키스처럼 짜릿하고 올이 풀린 스웨터처럼
줄줄 새는 이야기 집 나간 개처럼 비를 맞고 쫓겨난 개처럼
빗자루로 맞고 그래도 결국에는 집으로 돌아오는 개 같은 이야기
당신이 마지막으로 했던 이야기 매일 당신이 하는 이야기 내가
죽을 때까지 죽은 당신이 매일 하는 그 이야기 끝이 없는 이야기
흔들리느 구름처럼 불안하고 물고기의 피처럼 뜨겁고 애인의
수염처럼 아름답고 귀를 막아도 들리는 이야기 실험은 없고 실험
정신도 없고 실험이란 실험은 모두 거부하는 실험적인 이야기
어느 날 문득 무언가 떠올린 당신이 노트에 적어 내려가는 이야기
어젯밤에 내가 들려준 이야기인줄도 모르고 내일 밤 내가 당신
귀에 속살일 이야기인줄도 모르고.
_강성은 시집 <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