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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들의 램프-성(性)/류인서
시치
2010. 11. 21. 21:01
처녀들의 램프-성(性)/류인서
그 램프는 세상의 동쪽 끝방이라는 이상한 이름을 가졌다
세상은 그때 주변의 익숙한 사물과 함께 램프의 부드러운 빛 속에 있었다
누군가 훅, 뜨거운 입김을 불어 그것의 불꽃을 꺼뜨린다
빛들은 홀연히 램프의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사라진 모든 것들이 그 이상한 동쪽 끝방에 갇혀 있으리라 믿는 처녀들
끝없이 램프의 캄캄한 구멍 속을 훔쳐본다
얼룩수염을 가진 램프의 거인은
처녀들의 엷은 분홍 눈꺼풀을 덮고 잠들어 있다
동쪽 맨 끝방을 여는 오래된 열쇠는 거인의 헝클어진 수염 끝에 단단히 묶여 있다
호기심 많은 처녀들 램프의 작은 방을 찾아
하나둘 금지된 밤의 계단을 내려간다
라, 라, 라, 저 깊고 깊은 동쪽 끝방의 열쇠는 세상 모든 방들의 열쇠
노래 부르며 가도가도 제자리인 그 계단을 내려가는 처녀들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어느 아침
램프는 울컥, 삼켰던 모든 것들을 제 그늘 안에 쏟아놓는다
거인은 사라지고 동강난 열쇠와 녹슨 정조대, 부러진 새들의 발목
호호백발 백년 전의 천들만 햇빛 아래 소복하다
그 램프는 깨지지 않는 처녀들의 작은 성채
세상 동쪽 끝방이라는 이상한 이름을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