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떼들에게로의 망명/ 장석남
새떼들에게로의 망명/ 장석남
1
찌르라기떼가 왔다
쌀 씻어 안치는 소리처럼 우는
검은 새떼들
찌르라기떼가 몰고 온 봄 하늘은
햇빛 속인데도 저물었다
저문 하늘을 업고 제 울음 속을 떠도는
찌르라기떼 속에
환한 봉분이 하나 보인다
2
누가 찌르라기 울음 속에 누워 있단 말인가
봄 햇빛 너무 뻑뻑해
오래 생각할 수 없지만
오랜 세월이 지난 후
나는 저 새떼들이 나를 메고 어디론가 가리라,
저 햇빛 속인데도 캄캄한 세월 넘어서 자기 울음 가파른 어느 기슭엔가로
데리고 가는 것을 안다
찌르라기떼 가고 마음엔 늘
누군가 쌀을 안친다
아무도 없는데
아궁이 앞이 환하다
- 장석남 『새떼들에게로의 망명』(문학과지성사)에서
[시 읽기]
나는 오랫동안 이 시를 좋아해 왔다. 왜 좋은지 오랫동안 생각해 왔지만 그 이유는 분명치 않다. 이 시를 읽으면 고향이 생각난다. 고향 마을 위로 까맣게 새가 날아가는 풍경이 보인다. 그 새들은 분명 남쪽에서 와서 북쪽으로 가리라. 아니 북쪽에서 와서 남쪽으로 가리라. 어느 쪽으로 가도 상관이 없지만, 찌르라기 떼의 울음이 쌀 씻어 안치는 소리처럼 들렸다는 말이 실감 난다. 찌르라기 떼 속에 환한 봉분이 보이고, 아궁이가 환하다는 말이 절실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이 시의 장점은 시간의 흐름과 거리감을 잘 활용하였다는데 있다. 옛날을 이야기 하는데 옛날의 이야기로 들리지 않고, 먼 거리의 사물을 묘사하는데 가까이 옆에 있는 것처럼 느낀다. 굉장히 어려운 말을 쉽게 하는 사람과 비슷하다. 오래 생각하는 동안 나는 조금씩 그에게 끌린다. 모르는 사이에 그의 어법을 흉내 내고 있다. 조근조근 속삭이는 것 같은데 울림이 큰 목소리. 정말 부럽다. 이것은 그의 다른 시에서도 드러나는데 예를 들어, 최근에 펴낸 『젖은 눈』이라는 시집에서 「봉숭아를 심고」라는 시를 보면, ‘조그만 샛강이 하나 흘러왔다고 하면 될까/ 바람들이 슬하의 식구들을 데리고/ 내 속눈썹을 스친다고 하면 될까’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것은 봉숭아 씨를 얻어다 화분에 심은 다음, 싹이 돋아나기 기다리는 장면을 형상화한 것이다. 그는 ‘봉숭아’와 ‘강물’이라는 이질적인 성질의 사물을 끌어다 결합시킨다. 이것은 흡사 찔레 가지에 장미를 접붙여 더 아름다운 장미를 얻는 원리와 비슷하다.
롤랑 바르트는 『기호의 제국』에서 이러한 표현을 선불교 혹은 하이쿠의 특징으로 설명한다. ‘무겁고 충일하며 심오하고 신비한 침묵 앞에서 또는 신과의 교감에서나 열리게 될 영혼의 공허함 앞에서 언어는 저절로 중단되’며, ‘이야기 도중이나 이야기가 끝난 후에라도 제시되는 것이 펼쳐져서는 안 된다. 제시되는 것은 불투명해서, 우리는 그것을 되씹어보는 수밖에 없다.’ 바르트의 주장을 이 시의 1연, ‘찌르라기떼가 몰고 온 봄 하늘은/ 햇빛 속인데도 저물었다’와 같은 구절에 대입해 보면, 설명 자체가 어렵다는 말이다. 설명하면 오히려 사족이 되기 때문에 그 울림이 전해질 때까지 ‘침묵’으로 기다려야한다는 것이다. 2연의 ‘ 저 햇빛 속인데도 캄캄한 세월 넘어서 자기 울음 가파른 어느 기슭엔가로/ 데리고 가는 것을 안다’는 구절에 이르면 그 말에 고개가 끄덕여지는데, 이것은 ‘갑작스런 중지이자 우리 안에서 약호의 지배를 지우는 여백이며 우리 인간을 이루는 내부의 낭송을 깨트리는 것이다. 이러한 무언의 상태가 곧 해탈이다’는 롤랑 바르트의 설명이 정말 맞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짧은 구절 안에 인생의 비밀을 함축함으로써 ‘기표(시니피앙-발화)’와 ‘기의(시니피에-의미)’가 조화를 이루지 못한 상태. 그러므로 의미의 측정이 불가능해진다는 말을 조금은 알 것 같다.
모든 훌륭한 시가 그렇듯이, 이 시는 문장 자체의 표현대로 읽어서는 안 된다. 행간에 숨어있는 시간과 공간의 흐름을 인식하여야 한다. 즉, 여백의 맛을 음미해야만 진정한 시의 아름다움에 이를 수 있다. 다만 그것이 지나친 비약에 이르고, 여러 시에 상투적으로 등장할 때는 비슷한 음식을 먹는 것처럼 질리게 되는 단점은 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