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찬호 시 보기(8편)
송찬호 시 보기(8편)
만년필外/송찬호
이것으로 무엇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 만년필 끝 이렇게 작고 짧은 삽날을 나는 여지껏 본 적이 없다
한때, 이것으로 허공에 광두정을 박고 술 취한 넥타이나 구름을 걸어 두었다 이것으로 경매에 나오는
죽은 말 대가리 눈 화장을 해주는 미용사 일도 하였다
또 한때, 이것으로 근엄한 장군의 수염을 그리거나 부유한 앵무새의 혓바닥 노릇을 한 적도 있다 그리고
지금은 이것으로 공원묘지의 일을 얻어 비명을 읽어주거나 가끔씩 때늦은 후회의 글을 쓰기도 한다
그리하여 볕 좋은 어느 가을날 오후 나는 눈썹 까만 해바라기 씨를 까먹으면서, 해바라기의 그 황금 원반에
새겨진 파카니 크리스탈이니 하는 빛나는 만년필 시대의 이름들은 추억해 보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오래된 만년필을 만지작 거리며 지난날 습작의 삶을 돌이켜본다
-- 만년필은 백지의 벽에 머리를 짓찧는다
만년필은 캄캄한 배기 속으로 들어가 오랜 불면의 밤을 밝힌다
-- 이런 수사는 모두 고통스런 지난 일들이다 !
하지만 나는 책상 서랍을 여닫을 때마다 혼자 뒹굴어 다니는 이 잊혀진 필기구를 보면서 가끔은 이런 상념에
젖기도 하는 것이다. 거품 부글거리는 이 잉크의 늪에 한 마리 푸른 악어가 산다
옛날 옛적 우리 고향 마을에 처음 전기가 들어올 무렵,
마당가 분꽃들은 노랑 다홍 빨강 색색의 전기가 들어온다고 좋아하였다
울타리 오이 넝쿨은 5촉짜리 노란 오이꽃이나 많이 피웠으면 좋겠다고 했다
닭장 밑 두꺼비는 찌르르르 푸른 전류가 흐르는 여치나 넙죽넙죽 받아먹었으면 종겠다고 했다
그리고 가난한 우리 식구들, 늦은 저녁 날벌레 달려드는 전구 아래 둘러앉아 양푼 가득 삶은 감자라도
배불리 먹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해 여름 드디어 장독대 옆 백일홍에도 전기가 들어왔다
이제 꽃이 바람에 꺽이거나 시들거나 하는 걱정은 겨우 덜게 되었다
궂은 날에도 꽃대궁에 스위치를 달아 백일홍을 껐다 켰다 할 수 있게 되었다
꽃밭에서
탁란의 계절이 돌아와 먼 산 뻐꾸기 종일 울어대다
채송화 까만 발톱 깍아주고 맨드라미 부스럼 살펴보다
누워 있는 아내의 입은 더욱 가물다 혀가 나비처럼 갈라져 있다
오후 한나절 게으름을 끌고 밭으로 나갔으나
우각(牛角)의 쟁기에 발만 다치고 돌아오다
진작부터 곤궁이 찿아온다 했으나 마중 나가진 못하겠다
개와 고양이 지나다니는 무너진 담장도 여태 손보지 않고
찬란한 저 꽃밭에 아직 생활의 문도 세우지 못했으니
비는 언제 오나
얘야, 빨리 걷어야겠다
바지랑대 끝 뻐구기 소리 다 말랐다
고양이
여기 경매에 내놓으려 하는 오래된 꽃병이 있어요
꺽은 꽃가지에서 비린내가 나지 않으면 이제 그런건 거들떠보지도 않네요
그러니 누가 저 꽃병목에 방울을 달겠어요 ?
쉬잇, 지금은 고양이 철학 시간이에요 앞발을
가지런히 모으고 앉아 모서리 구멍을 응시하고 있네요
아마 지금은 사라져버린 사냥 시대를 생각하고 있겠지요
우리는 모두 어둠과 추위로부터 쫓겨온 무리랍니다
한때는 방안을 뒹굴던 털실 몽상가와도 잘도 놀았답니다
현기증 나는 속도의 바퀴와 아찔한 연애도 해봤구요
요즘은 부쩍 네발 달린 걱에 믿음이 가는가 봐요
네발 달린 의자에 사뿐히 뛰어 올라 털실이 떠나간
털실 바구니에 들어가 때때로 달콤한 오수를 즐기지요
앗,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방 안 모서리, 손거울,
집 열쇠, 어항의 물고기가 사라지고 없어요
다그쳐 물어도 종알종알 털만 핥을 뿐 모른다 도리질만 하네요
쫑긋 귀 동그란 눈동자 ......, 그토록 짧은 혀로 그것들 모두 어디다 숨겼을까요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입안의 비린내를 헹궈내고
달이 솟아오르는 창가
그의 옆에 앉는다
이미 궁기는 감추어 두었건만
손을 핥고
연신 등을 부벼대는
이 마음의 비린내를 어쩐다 ?
나는 처마끝 달의 찬장을 열고
맑게 씻은
접시 하나 꺼낸다
오늘 저녁엔 내어줄 게
아무것도 없구나
여기 이 희고 둥근 것이나 핥아보렴
살구꽃
살구꽃이 잠깐 피었다 졌다
살구꽃 무늬 양산을 활짝 폈다가
사지는 않고
그냥 가격만 물어보고
슬그머니 접어 내려놓듯이
정말 우리는 살구꽃이 잠깐이라는 걸 안다
봄의 절정인 어느 날
활짝 핀 살구꽃이 벌들과
혼인 비행을 떠나버리면,
남은 살구나무는 꽃이 없어도
그게 누구네 살구나무라는 걸 눈을 감고도 훤히 알듯이
재봉틀 소리 나는 곳이 살구나무 수선집이고
종일 망치 소리 나는 곳이 살구나무 철공소라는 걸
멀리서도 알고 있듯이
살구나무와 연애 한번 하지 않아도
살구나무가 입은 속옷이
연분홍 빤스라는 걸
속으로만 우리가 알고 있듯이
겨울
이것은 겨울과의 계약서예요
죽은 정원을 하나 샀죠
그러고는 서둘러 실내로 뛰어 들어왔어요
겨울은 자라지 않는 이야기의 계절이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가끔씩 지금이 겨울임을
망각하고 이렇게 묻곤 하지요
우리 집 풍자(諷刺)는 왜 키가 크지 않는 거죠 ?
겨울은 언제나 참으로 길지요
웃고 노래하고 떠들다 지쳤는지 아이들은
이제 눈트는 씨앗의 입구에 몰려가 있어요
창밖 정원은 여전히 잠들어 있어요
나는 잠시 망치질을 멈추고 깊은 상념에 잠기지요
꽃 피고 새 우는 상자,
이것이 손잡이를 어느쪽에 붙일까 생각해야겠기에
패랭이꽃
방죽 너머 길가에 패랭이꽃 여자가 피어 있다
여자 나이는 마흔쯤 됐겠다 꽃잎 속눈썹은 삐뚤,
꽃 모가지는 빼뚤,
그런 그 여자의 삐뚤빼뚤한 길을 따라 염소들은 오늘도 학교에 가는데,
보나마나 오늘 듣고 쓰기 시간 염소들 글씨도 삐뚤 빼뚤
그 주위의 풍경도 더는 참지 못하고 공장 굴뚝 연기도
삐닥, 앞을 휑하니 지나간 택시의 먼지구름도 삐딱,
부스스 여자는 몸을 일으킨다 지금은 학교에서 아이들이 돌아올 시간,
길 가는 누군가 패랭이꽃을 물으면 여자는 자기의 아랫도리를 보여준다
성긴 잎과 줄기, 초록 목발로 서 있는 패랭이 패랭이 패랭이 ......
그 여자의 몸에 다보록 패랭이꽃이 모여 사는 곳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