直指

[스크랩] 무비스님의 直指〈89〉■ 백장회해 선사③ 때는 본래 옷이 아니다

시치 2010. 8. 26. 00:48

<89>백장회해 선사③ 때는 본래 옷이 아니다

“수행, 순수한 삶으로 감동 주는 일”

일체 소리.사물은 때와 같으니

집착하거나 머무르지 말아야

 

百丈 示衆云 學似浣垢衣 衣是本有 垢是外來 聞說一切有無聲色 如似垢 都莫將心湊泊

 

백장 선사가 대중들에게 말씀하였다.

“공부란 마치 때가 묻은 옷을 세탁하는 것과 같다. 옷은 본래 있는 것이고 때는 밖에서 묻은 것이다. 일체의 소리와 사물이 있다고 말함을 들은 것이 마치 때와 같으니 모든 것에 마음을 가져 집착하거나 머물지 말라.”

 

해설 : 불교에서는 법을 설하는 경우에도 때에 따라서 그 격식과 내용의 차원을 달리하게 되어있다. 법상에 높이 올라 최상승법을 거량하게 되면 그것을 상당(上堂)법문이라 한다. 따라서 법문의 내용도 논리적으로 자세하게 설명을 하거나 강설을 하듯이 하지 않고 불법의 여러 차원 중에서 가장 높은 법을 설해야 한다. 대중들이 알아듣든지 알아듣지 못하든지 그것은 청중의 몫이다. 법사는 청중의 수준에 연연하지 않고 최상승법을 거량한다. 그러므로 일생동안 법상에 오르지 않은 큰스님도 많이 있다. 그것은 자신이 최상승법을 깨닫지 못했다는 의미에서다.

그러나 여기에서 소개한 시중(示衆)법문은 그렇지 않다. 법상에 오르지 않고 테이블을 차려놓고 강의하듯이 하는 형식이다. 법문의 내용도 다소 자유롭기 때문에 교리적으로 풀어가면서 청중의 수준에 맞춰서 알아듣도록 친절하게 설명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옛 법도를 잘 알고 법도에 맞춰서 법을 설한 분으로서는 근세에는 국민 선사 성철(性徹)스님뿐이다. 어떤 스님은 아예 법상에 올라가지 않은 분도 계시지만, 대개의 경우는 높은 법상에 올라가서도 ‘전설의 고향’과 같은 이야기를 늘어놓는 분들도 적지 않다. 격식은 상당법문이지만 그 내용은 지대방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법상에 올라가는 법사는 모름지기 그 격식과 그 격식의 차원에 맞는 법을 설할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직지>에 인용한 백장 선사의 시중법문은 수행하는 것을 옷을 세탁하는 것에 비유하였다. 참으로 누구나 알아듣기 좋은 내용이다. 옷은 처음 입었을 때는 깨끗하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할수록 차츰 차츰 때가 묻는다. 갓 태어난 어린아이들은 천진한 마음뿐이다. 성장하면서 보고 듣고 하는 과정에서 세상의 때가 묻는다. 그러므로 수행이란 세상사의 그 어떤 것을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말아야 한다. 혹 부득이하여 보고 듣고 하더라도 그것에 집착하거나 물이 들지 않도록 주의를 개을리 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곧 공부며 수행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래서 불교에는 동진(童眞)이라는 말이 많이 있으며 동진출가(童眞出家)를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또한 도인의 행동 중에서도 유아행(幼兒行)이 제일행이라는 말이 있다. 그만치 때가 묻지 않고 순수하기 때문이다.

불교수행이란 이와 같이 때가 묻지 않고 순수한 본심을 잘 유지하거나 그 순수한 마음상태로 복귀하여 사람들에게 그 순수한 삶으로 감동을 주는 일이다. 그렇지 못하면 아직은 관념불교요 이론불교일 뿐이다. 세상을 살면서 어찌 바깥 경계를 보고 듣지 않을 수 있으랴만 보고 들으면서 살더라도 그 바깥 경계에 미혹하거나 이끌려서 자신의 주체를 잃어버리고 살면 그것은 불교적 삶이 아니다. 아니면 어떤 대상이던지 모든 존재 모든 대상은 실체가 없는 거짓 존재라는 것을 꿰뚫어 보아 아예 구름에 달 가듯이 느끼고 알더라도 걸림 없이 자유로운 해탈의 삶을 살아야 하리라. 그것이 <직지>에서 말한 “일체의 소리와 사물은 마치 때와 같으니 모든 것에 마음을 가져 집착하거나 머물지 말라”라는 가르침이다.

 

동국역경원장

 

첨부파일 〈88〉백장회해 선사3.wma

 

출처 : 염화실
글쓴이 : 文殊法供養會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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