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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외눈박이 거인의 나라 (외 2편) / 전기철

시치 2010. 5. 15. 01:10

외눈박이 거인의 나라 (외 2편)

 

  전기철

 

 

   생각이 죄가 되는 시대

   나는 어둠과 말다툼을 한다

 

   약속이 많은 밤

   사형집행 당한 사색들이

   영혼의 병에 걸린 허수아비처럼 중얼거릴 때

   나는 은밀한 슬픔을 안고 있다가

   폐위된 왕인 양

   비밀을 털리고 만다.

   왜 진통제를 주지 않는 거야! 내 사색의 황색 점멸등이 중얼거리고 있단 말이야. 약속을 잃은 개의 처참한 얼굴을 뜯어먹지 말아야 해. 도망가면 용의자야.

 

   강물과 공기까지도 부자들에게 팔린 도시에서

   무기라고는 소리치지 못하는 두 눈밖에 없어

   소독기 가득한 거리에서

   황색 점멸등에 쫓겨

   한강에서 자살한 돌멩이들을 건져 올린다.

   슬픈 돌멩이들!

   왜 아직 진통제를 주지 않는 거야! 아무도 고행을 하지 않으려는 도시에서 나무들만이 고행을 하고 있어. 혁명을 불러오는 슬픔까지도 부자들에게 모두 팔아 버렸거든. 그래서 사람들의 눈이 텅 빈 거야.

 

   부자들은 날마다 서울을 디자인하는데

   달러와 위안 사이에서

   점심을 굶고 다니는

   가난한 사람들의 이름 위에 자라도록

   풀밭을 제작해 주면

   세상을 열 수 있는 비밀번호를 찾을 수 있을까.

 

   상처 입은 바람의 운명 교향곡을 들으며

   나는 어둠과 말다툼을 한다.

   폐병 환자처럼

   생각이 너무 많았나 보다.

   왜 진통제를 주지 않는 거야. 아! 내 머리는 불행의 창고야. 하나님이 6일 만에 세상을 만들었으니 온통 뒤죽박죽이 된 거지. 너무 서두른 거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 가난한 사람들은 기억력이 좋으니 초원을 떠올릴 수 있을까.

 

 

                                      —《현대시학》2010년 5월호

 

 

싸움소

 

 

 

   오바마 1년 혹은 이명박 2년 12월 29일 눈이 오다 그치고 바람만 세차게 불다

   서울은 신음소리를 냈다. 흉터가 몸 안을 떠돌아 맥주로 머리를 헹궜다. 침묵을 너무 많이 마신 탓인지 피가 속삭였다. 나는 정문 수위의 표정을 하고 인사동으로 갔다. 인사동 사거리에는 한국전쟁 때 죽은 소녀가 아직도 청동 책을 읽고 있었다.

 

   아버지는 아편쟁이였다.

   전쟁으로 자신의 형을 잃은 아버지는 아편쟁이였다.

   아버지는 주삿바늘로 전쟁을 하고 있었고

   나는 아버지의 약 아이였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전쟁을 끝내야 한다면서 내 오줌을 받아 아버지에게 먹였다.

   휴전 협정이 훨씬 지났는데도

   아버지의 전쟁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밖으로 나가면

   개들은 나를 보며 침을 흘렸고

   먼 곳에서 거세된 싸움소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오바마 2년 혹은 이명박 3년 1월 2일 눈이 뿌렸다

   파키스탄에서 폭탄 테러가 있었다. 지구상에서 전쟁은 결코 끝나지 않았다. 용산의 전쟁은 한쪽에서는 끝났다고 하고 또 다른 쪽에서는 끝나지 않았다고 한다. 보쉬의 돌이 머리에 너무 깊이 박혔나 보다. 머릿속에 목소리가 너무 많이 들어와 있다. 나는 아침부터 루터의 잉크병을 던지며 법석을 떨었다. 눈은 먼 산에서 시대에 대한 성명서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서울에서는 가격표들이 둥둥 떠다녔다. 나는 청동 소녀의 슬픈 책 속을 더듬는다. 소녀의 책은 너무 시끄럽다.

 

   나는 아버지의 전쟁에서 도망 다녔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전쟁을 끝내기 위해

   내 아침을 망쳤다.

   호시탐탐 노리는 개들의 눈초리를 느끼며

   나는 싸움소의 울음을 들었다.

   동네에서 갓난아이들은 쉽게 죽었고

   그 집 위에서 달이 싹틀 때

   마을은 환각제를 뿌려놓은 듯 몽롱했다.

   나는 아버지의 약 아이였다.

 

   오바마 2년 혹은 이명박 3년 1월 4일 폭설이다

   거리는 자동차들의 무덤이다. 서울은 모욕을 당했다. 내 안의 괘종시계가 심장을 두드린다. 웅크린 가난에는 귀가 없다. 미국이 벌이는 전쟁으로 아프간에서는 나무들이 레퀴엠을 연주한다고 한다. 인사동에서 살인자의 인형을 샀다. 나는 소녀의 슬픈 청동 책 속에 살인자의 인형을 넣어준다. 너무 많은 손들이 들어와 있어 책이 끙끙 앓는다. 나는 맥주로 머리를 헹궜다.

 

   나는 약 아이였다.

   함부로 아무거나 먹어서도 안 되고 아무 데서나 오줌을 눌 수도 없는

   약 아이였다.

   아버지의 끝나지 않는 전쟁 속에서 더 이상 자라지 못하고

   입을 다시는 개들을 피해

   씨앗 달에 이파리가 돋을 때

   싸움소를 꿈꾸는 약 아이였다.

 

 

                                         —《실천문학》2010년 봄호

 

 

악어의 수다

 

 

 

나는 밀고자, 육교에서 청색 얼굴을 떨어뜨린다.

처음에는 방과 길, 그리고 담장 아래에서 훔친 물건들을 떨어뜨렸지만

곧 시들해져서 살아 있는 고양이를 떨어뜨렸다.

청색 얼굴은 늘 고양이 울음소리를 낸다. 그때마다 육교는 출렁인다.

차들이 치사량으로 달리는 육교 아래

먼 대륙

 

밀고자는 어지럼증에 시달리다 못해 달나라로 가 버리기라도 하려는 듯 육교에 올라선다.

육교는 몸부림친다.

옆집 누나의 방으로 기어든 아버지의 그림자를 지켜본 후로

아버지가 누나에게 뱉어낸 무늬들

일기장에도 적을 수 없을 정도로 소름끼치도록 비밀스런 무늬들을

육교에서 떨어뜨린다.

육교는 칭얼거린다.

저 낯선 대륙을 향해 육교는 충분히 수다스럽다.

청색 얼굴은 먼 나라로 떠나간다.

 

아버지는 모든 밤의 밀고자들을 따돌리려 헛기침을 떨어뜨리며

마당 위에 내려와 있는 대륙을 몇 바퀴 돌다가 어머니의 방으로 들어가지만

아버지가 떨어뜨려 놓은 기침이 내 가슴에서 반짝이는 걸 볼 때

다른 대륙으로 떨어지는 청색 얼굴의 잔인한 밀고자의 본능을 본다.

 

누나는 먼 나라로 시집을 갔는지 다시는 우리 마을에 나타나지 않았고

아버지는 어머니를 아주 사랑하는 척 했다.

밀고자가 있는 마을에서는 날마다

청색 얼굴이 먼 대륙으로 떠나가고 있었다.

 

 

                                                 —시집 『로깡땡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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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철 / 1954년 전남 장흥 출생. 전남대와 서울대 대학원에서 석, 박사 과정 수료.  1988년 《심상》으로 등단. 시집 『나비의 침묵』『풍경의 위독』『아인슈타인의 달팽이』『로깡땡의 일기』, 평론집 『민족문학과 비평정신』, 번역서 『시가 있는 금강경』. 현재 숭의여대 문예창작과 교수.

출처 : 푸른 시의 방
글쓴이 : 강인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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