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광 시 보기(8편)
졸음.外/이영광
정관수술 했던 자릴 풀러 가는 중년처럼
때려 부쉈던 걸 복구하러 가는 날이 있으니
프라이드치킨 한 마리 탁주 한 되 사 들고
이 산이 아닌갑다, 부러 쭈뼛대기도 하다가
한잔 올리고, 나머진 마시고, 무덤 허리에 누워
지구상에서 나와 가장 닮았던 사람,
당신이 어렵고 가여웠어요.
요즘 저는 살 것도 죽을 것도 같고요
돌담은 허물어지고 덩굴들은 헝클어져
집들이 남은 온기를 서로 빨아먹는 고향
남의 섹스를 구경하듯
저 무성한 근친상간의 잠자리 범하진 못할 테지만요
제 힘으로 무너지고 제 의지로 버티고 있는 건 더 이상
병도 약도 눈물도 아니어서
떨어져 정자나무 곁에 앉아 옛날 생각에 깜박,
그냥 한 사십년 쯤 졸고 있는 거예요
여기 오기 전엔 그래도 갈 곳이 있었지만요
사랑의 미안
울음은 어디에서 오는가, 불이 들어가서 태우는 몸
네 사랑이 너를 탈출하지 못하는 첨단의 눈시울이
돌연 젖는다, 나는 벽처럼 어두워져
아, 불은 저렇게 우는구나, 생각한다
사랑 앞에서 죄인을 면할 길이 있으랴만
얼굴을 감싸쥔 몸은 기실 순결하고 드높은 영혼의 성채
울어야 할 때 울고 타야 할 때 타는 떳떳한 파산
그 불 속으로 나는 걸어들어갈 수 없다
사랑이 아니므로, 나는 함께 벌 받을 자격이 없다
원인이기는 하되 해결을 모르는 불구로서
그 진흙 몸의 充血 껴안지 못했던 것
네 울음을 없었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라면 나는
소용돌이치는 불길에 몸 적실 의향이 있지만
그것은 모독이리라, 모독이 아니라 해도, 이 어지러움으론
그 무엇도 鎭火하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나는
사랑보다 더 깊고 무서운 짐승이 올라오기 전에
피신할 것이다 아니, 피신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제자리에 가만히 멈춰 있을 것이다
숲
나무들은 굳세게 껴안았는데도 사이가 떴다 뿌리가 바위를 움켜 조이듯 가지들이 허공에 불꽃을 튕기기 때문이다 허공이 가지들의 氣合보다 더 단단하기 때문이다 껴안는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무른 것으로 강한 것을 전심전력 파고든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다면 나무들의 손아귀가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졌을 리가 없다 껴안는다는 것은 또 이런 것이다 작은 것이 크고 쓸쓸한 어둠을 정신없이 어루만진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이글거리는 포옹 사이로 한 사나이를 고요히 지나치게 한다는 뜻이다 필경은 한 사나이와 나무와 허공을, 딱따구리와 저녁바람과 솔방울들은 온통 지나가게 한다는 뜻이다 구멍 숭숭 난 숲은 숲字로 섰다 숲의 단단한 骨多孔症을 보라 껴안는다는 것은 이렇게 전부를 통과시켜 주고도 고요히, 나타난다는 뜻이다
현대시학 (2006년 3월호)
순대
순대 전문점 가스불 위에서 김 뿜는 순대덩이를
뼈 잃은, 짐승의 생식기 같기도 하고
어린 시절, 뽐뿌로 바람을 넣으면
탱탱하게 부풀어오르던
빵꾸 때운 자전거 튜브 같기도 하다
저 속으로 꿀꿀이죽이 쏟아져 들어가
용적을 늘리고 간과 불알을 키워도
결국 텅 비어 쭈글쭈글한 주름 주머니
아니겠는가 아래를 묶었던 허기가
풀리면 와르르 새버리는 구멍
저 안은 공(空)인가 색(色)인가
금욕처럼 조용한 오후 세시
순대집 아줌마, 고무 다라이에 가득한 내장을
고무장갑으로 주무르고
순대 주세요
저는 허기로 밑을 꽉 조인 구멍이예요,
물론 조금 있으면 또 헤벌어지겠지만요
나는 순대를 소금에 찍어 입에 넣는다
빵꾸난 길다란 순대 속으로
빙폭 3
이월의 하느님이
협곡에 기대인 폭포를
천천히,
쓰러뜨린다
허허한 공중의 칼에 베인
지상의 허허한 빈 몸
나는 그 분이
빙폭의 투명을 두 손에 적시며
말없이
사라지는 걸 본다
무언가를 통과시키기 위해
번뜩이며 뼈를 드러내는 개울들
눈발에 허옇게 깎인 바위절벽, 그리고
금욕처럼 단단한 저 고요.
협곡은 이미 협곡을 빠져나가고 없다
여기 없는 것은
이 세상에 없는 거다
다만 뼈에 붙은 마음을 반드시 꺼내 가려는 듯
삭풍의 억센 손아귀가 몸을
들었다 놓았다
들었다 놓았다, 한다
물 위를 걷다
물 위를 걷는다
지은 죄를,
지은 적도 없는 죄를
덜덜덜 자백하는 한가운데
혹한이 찾아오면 몸 바꾸는 그대
단단히 단단히 단단히
날 건네주는,
얼음 위를 알몸으로 점령한
그대
야윈 가슴을 디디자
채찍질처럼
자욱이 금이 간다
쩌르릉,
울음소리 올라온다
아픔에는 어김없이
가시 무지개 뻗어가고,
세상의 망극한 마음도
제 무게를 떨며
그 위를 또 맨발로 디디고 가야 할 때가 있다
비누에 대하여
비누칠을 하다 보면
함부로 움켜쥐고 으스러뜨릴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비누는 조그맣고 부드러워
한 손에 잡히지만
아귀힘을 빠져나가면서
부서지지 않으면서
더러워진 나의 몸을 씻어준다
샤워를 하면서 생각한다
힘을 주면 더욱 미끄러워져
나를 벗어나는 그대
나는 그대를 움켜쥐려 했고
그대는 조심조심 나를 벗어났지
그대 잃은 슬픔 깨닫지 못하도록
부드럽게 어루만져주었지
끝내 으스러지지 않고
천천히 닳아 없어지는 비누처럼, 강인하게
한번도 나의 소유가 된 적 없는데
내 곁에 늘 있는 그대
나를 깊이 사랑해주는
미끌미끌한 그대
오래된 그늘
늙은 느티의 다섯 가지는 죽고
세 가지는 살았다
푸른 잎 푸른 가지에 나고
검은 가지는 검은 잎을 뱉어낸다
바람이 산천을 넘어 동구로 불어올 때
늙은 느티의 산 가지는 뜨거운 손 내밀고
죽은 가지, 죽은 줄 까맣게 잊은
식은 손을 흔든다
네가 단풍처럼 기차에 실려 떠나는 동안 연착하듯
짧아진 가을이 올해는 조금 더디게 지나는 것일 뿐이리라
첫눈이 최선을 다해 당겨서 오는 강원도 하늘 아래
새로 난 빙판길을 골똘히 깡충거리며
점점 짙어가는 눈발 속에 불길은 서서히 냉장되는 것이리라
만병의 근원이고 만병의 약인 시간의 찬 손만이 오래 만져주고 갔음을 네가 기억해낼 때까지,
나는 한사코 선량해질 것이다
너는 한사코 평온해져야 한다
이영광 시인
1967년 경북 의성에서 태어나고려대 영문과 및 동대학원 국문과를 졸업.
1998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시 <빙폭>외 9편이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
시집 『직선 위에서 떨다』『그늘과 사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