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시

류근 시 보기(5편)

시치 2010. 4. 16. 00:07

나무들은 살아남기 위해 잎사귀를 버린다 外./류 근

 

 

나무들은 살아남기 위해 잎사귀를 버린다

친구여 나는 시가 오지 않는 강의실에서

당대의 승차권을 기다리다 세월 버리고

더러는 술집과 실패한 사랑 사이에서

몸도 미래도 조금은 버렸다 비 내리는 밤

당나귀처럼 돌아와 엎드린 슬픔 뒤에는

버림받은 한 시대의 종교가 보이고

안 보이는 어둠 밖의 세월은 여전히 안 보인다

왼쪽 눈이 본 것을 오른쪽 눈으로 범해 버리는

붕어들처럼 안 보이는 세월이

보이지 않을 때마다 나는 무서운 은둔에 좀먹고

고통을 고통이라 발음하게 될까 봐

고통스럽다 그러나 친구여 경건한 고통은 어느

노여운 채찍 아래서든 굳은 희망을 낳는 법

우리 너무 빠르게 그런 복음들을 잊고 살았다

이미 흘러가 버린 간이역에서

휴지와 생리대를 버리는 여인들처럼

거짓 사랑과 성급한 갈망으로 한 시절 병들었다

그러나 보라, 우리가 버림받는 곳은 우리들의

욕망에서일 뿐 진실로 사랑하는 자는

고통으로 능히 한 생애의 기쁨을 삼는다는 것을

이발소 주인은 저녁마다

이 빠진 빗을 버리는 일로 새날을 준비하고

우리 캄캄한 벌판에서 하인의 언어로

거짓 증거와 발 빠른 변절을 꿈꾸고 있을 때 친구여

가을 나무들은 살아남기 위해 잎사귀를 버린다

살아있는 나무만이 잎사귀를 버린다

 

 

너무 아픈 사랑

 

 

 

동백장 모텔에서 나와 뼈다귀 해장국집에서

소주잔에 낀 기름때 경건히 닦고 있는 내게

여자가 결심한 듯 말했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

라는 말 알아요? 그 유행가 가사

이제 믿기로 했어요.

 

믿는 자에게 기쁨이 있고 천국이 있을 테지만

여자여, 너무 아픈 사랑도 세상에는 없고

사랑이 아닌 사랑도 세상에는 없는 것

다만 사랑이 제 힘으로 사랑을 살아내는 것이어서

사랑에 어찌 앞뒤로 집을 지을 세간이 있겠느냐

 

택시비 받아 집에 오면서

결별의 은유로 유행가 가사나 단속 스티커처럼 붙여오면서

차창에 기대 나는 느릿느릿 혼자 중얼거렸다

그 유행가 가사,

먼 전생에 내가 쓴 유서였다는 걸 너는 모른다

 

 

위독한 사랑의 찬가

 

 

 

아내는 사랑의 찬가를 듣고 나는 빈방에서

사랑 때문에 더 이상 사랑을 믿지 않게 된 한 여자의

짧았던 생애를 생각한다 그녀는 세상에 구원은 없다,라고 쓴

유서를 남긴 채 검은 커튼 아래서 죽었다 나는 술집에서

낮술에 취해 그녀의 부음을 들었다 아무런 죄도 없이

술잔에 머리를 묻은 채 울었고 그날 함박눈이었는지

새 떼들이었는지 광장에 가득 내리던 무엇인가에 살의를 느꼈었다

삶에서 빛을 꿈꾸었던 사람들에게 겨울은 위독하다

술 마시다 단 한 번 입술을 빌려주었던 대학 친구도

겨울에 죽었다 그녀는 프랑스 유학과 가난한 애인 사이에서 떠돌다

결국 오래 잠드는 쪽을 선택했다 하지만 오랜 잠이

그녀에게 어떤 빛을 데려다주었는지 대답해주지는 않았다

아내가 사랑의 찬가를 듣는 한낮이 나는 무덤 같고

삶에서 아무런 빛을 꿈꾼 적 없는데도 위독해진다

사랑에 찬가를 붙일 수 있는 사람은 깊이 사랑한 사람이 아닐 것

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내의 남편이 되면서 내 사랑은

쉽게 불륜이 되었지만 모든 사랑이 불륜이 되는 삶만큼

구원 없는 세상이 또 있을까 싶어 나는 무서워진다 검은 커튼

아래서 짧은 유서를 쓰던 그녀 역시 무섭지 않았을까

여긴 내가 사랑하기에 어울리지 않는 곳,이라고 썼던

친구 역시 무서웠을 것이다 무서워서

결국 뛰어내릴 수밖에 없는 삶을 건너가기 위해

그녀들은 얼마나 깊어진 절망으로 빛을 기다린 것일까

아내는 사랑의 찬가를 듣고 나는 빈방에서

겨울에 죽은 여자들의 생애를 생각한다 사랑 때문에

사랑을 버리는 일은 그녀들에게 생애의 모든 빛을 버리는 것이었고

모든 사랑이 불륜이 되어버린 나에게 겨울은 문득 위독한 빛으로

검은 커튼을 드리운다

 

 

상처적 체질

 

 

 

나는 빈 들녘에 피어오르는 저녁연기

갈 길 가로막는 노을 따위에

흔히 다친다

내가 기억하는 노래

나를 불러 세우던 몇 번의 가을

내가 쓰러져 새벽까지 울던

한 세월 가파른 사랑 때문에 거듭 다치고

나를 버리고 간 강물들과

자라서는 한번 빠져 다시는 떠오르지 않던

서편 바다의 별빛들 때문에 깊이 다친다

상처는 내가 바라보는 세월

 

안팎에서 수많은 봄날을 이룩하지만 봄날,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꽃들이 세상에 왔다 가듯

내게도 부를 수 없는 상처의

이름은 늘 있다

저물고 저무는 하늘 근처에

보람 없이 왔다 가는 저녁놀처럼

내가 간직한 상처의 열망, 상처의 거듭된

폐허,

그런 것들에 내 일찍이

이름을 붙여주진 못하였다

 

그러나 나는 또 이름 없이

다친다

상처는 나의 체질

어떤 달콤한 절망으로도

나를 아주 쓰러뜨리지는 못하였으므로

 

내 저무는 상처의 꽃밭 위에 거듭 내리는

오, 저 찬란한 채찍

 

 

 달나라

 

 

보채다 돌아누워

결국 혼자 수음하는 여자 곁에서

달을 바라봤다

달나라

국경도 전쟁도 없이

달 하나의 이름으로 빛나는

저 유구한 통일국가

속살만 남아서

시인도 술꾼도 소녀도 여우도

관음의 실눈을 뜨게 하는

위대한 포르노그래피

 

여자와 나 사이에

달빛이 분단의 그림자를 포갠다

모두 환하다

                                      —시집 『상처적 체질』

 

류근 / 1966년 경북 문경에서 태어나 충북 청주에서 자랐으며,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와 같은 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1992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으나 이후 공식적인 작품 발표는 하지 않았다. 시집 『상처적 체질』(2010.문학과지성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