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상반기 시에 신인상 당선작
2010년 상반기 시에 신인상 당선작
- 녹슨 방 외 2편 / 김혜경
- 그날의 기록 외 2편 / 변영희
- 아메바의 춤 외 2편 / 김기화
녹슨 방 / 김헤경
드럼통 속 이글대는 장작불이
오늘도 허탕이란 소리 귓전을 때린다
칸칸이 궁핍을 들인 골목길
벗어날 수 있을 거라 외쳐보지만
아무리 새벽을 밟아도
좀처럼 나아가지지 않는 발걸음이
다시 또 산(山)만한 그림자 이끌고
돌아와 녹슨 방에 메아리 되어 눕는다·
채워지지 않을 공복으로
후미진 골목 휘우듬히 들어서면
관 같은 영점 칠 평, 어둠으로 빼곡하다
나지막한 천장을 타는 거미 한 마리
곰팡이 꽃 만개한 꽃자리에서
생의 그물을 깁고 있다
잠기지 않는 수도꼭지에서 쉴 새 없이
똠방 똠방 똠방
지금 누구에게 타전 중이다
그 무작정의 기다림 뒤로하고
삶의 덧문을 통과한 소식들만
불쑥,
들어설지 모를 죽음과의 거리를
불온하게 좁혀온다
불통·2 / 김헤경
이곳에선 단숨에 숨통을
끊을 듯 끊어놓지 않는 게 법칙이라네
횟집 수족관의 뜰채가 무시로 들락거릴 때마다
똥구멍까지 치받는 죽음을
근사하게 유예시켜
혼신의 힘으로 진저리치도록
그 환한 형장을 빠져나오며
두 눈 부릅뜬 채 듣는
심해의 느린 뒤척임 소리
마비된 통점을 후벼파네
혼미해지는 의식
추슬러 헤엄쳐 나간들
닿을 수 없는 열망의 거처여
이따금
삼척 정라항 짙푸른 물결에
느긋한 시선을 푹 담그었다 꺼내며,
흐뭇한 임종을 포식하네
밥상머리에 둘러앉은 귀머거리들
오후 두 시 / 김헤경
정류장에 닿은 버스가 황급히 옆구리를 벌려
아이와 아낙을 꺼내놓고는
허리춤 추켜올릴 새도 없이 자리를 뜬다
아이는 세상의 근심 다 쓸어 담아 울상이고
아낙은 그 근심 죄다 쓸어내 주려는 듯
서둘러 아이를 들쳐 안고 길섶의
산수유 노란 꽃그늘 속으로 든다
한켠에 팽개쳐진 짐 가방이 뿌루퉁하다
아이의 부끄러움 감추기 위해
뒤돌아 앉은 아낙의 등짝, 거리낌 없이 훤하다
그 부끄러움 추스를 새도 없이
주섬주섬 짐 가방 챙겨 든 모녀는 사라지고
궁색한 해우를 마친 촉촉한 자리에
수선스레 봄 햇살 무더기로 몰려와
춘곤에 겨운 목숨들 죄 깨워놓고야 마는,
김혜경 시인
충북 보은 출생. 한남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 <큰시>동인.
<당선소감>
문학! 그 황홀한 멀미
문학이란, 특히 시란 제 삶 속에서 황홀한 멀미를 일으키는 묘약과도 같습니다. 당선 소식에 내심 기쁘고 스스로가 대견하단 생각을 하며 한껏 들떴던 마음도 잠시. 장거리 경주의 출전권을 받고 출발점에 서서 신호탄소리를 기다리는 선수가 된 듯, 이제 슬슬 겁도 좀 나고 그렇습니다. 시를 쓰는 일은 자기와의 끊임없는 싸움이며, 현실에 안주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끊임없이 벼랑 끝으로 내몰아 가야하는 처지이기에, 그리고 자신의 가장 밑바닥 치부까지 적나라하게 드러낼 용기도 필요한 일임을 조금 알기에 말입니다. 절대 자만하지 않겠습니다. 사람들의 가슴에 큰 울림을 주는 시, 진솔한 시를 쓰기 위해 혼신을 다하겠습니다. 그리하여 꼭 나중까지 살아남는 ‘참시인’이 되겠습니다.
문학의 첫 스승, 초등학교 6학년 문예부 담당이셨던 조완수 선생님! 찾아뵙고 술 한 잔 올리고 싶습니다. 늦깎이 대학원생인 저에게 세심한 배려와 훌륭한 가르침을 주신 한남대 신익호 교수님! 늘 용기를 북돋워 주신 김완하 시인을 비롯한 대전의 <큰시> 동인들! 살이 되고 뼈가 되는 그간의 조언과 격려가 저를 이만큼 키워준 것 같습니다. 변함없는 애정으로 함께해 주어서 고마운 마음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제게 늘 응원을 아끼지 않으시는 제주의 시어머님! 존경합니다. 부모님과 오빠, 언니, 동생들, 다들 고맙고 사랑합니다. 또한 보석 같은 섬진이와 어진이! 총명하고 건강하게 잘 자라주어 고맙구나. 그토록 바라던 ‘시인’의 남편이 되었지요. 성원해주고 묵묵히 기다려준 당신! 가슴 뜨겁게 사랑합니다. 물심양면으로 제게 힘을 실어주신 많은 분들께도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끝으로 부족함 많은 제 시를 어여삐 여기시어 저에게 ‘시인’이란 아름다운 이름표를 달아주신 심사위원님들과 『시에』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그날의 기록 / 변영희
긴 하체가 매달려 있다
발목이 야무지게 물린 두 발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흰 수건과 붉은 수건
곁에서 땀을 닦아주고 있다
대문은 분명 굳게 닫혀 있다
나직한 담장도 완고하게 입 다물고 있다
눈꼬리가 올라간 첼리스트의 연주가 불러들인 바람
살아있는, 혹은 죽어 있는 모든 사물들
춤추게 한다
살갗이 가려운 감나무
바람과 몸을 부비며 얼룩진 각질을 털어낸다
눈이 휘둥그레진 바이올렛
심하게 흔들리지만 목이 부러지진 않을 것이다
낮게 엎드려 눈만 감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테지
참 다행인 것은
그날 어디에도 눈을 흡뜬 얼굴은 매달리지 않았다는 거
수수께끼를 남겨 두고 별의 운행이 시작되었다
조금씩 증발한 물기의 기록
별들의 비탈을 청색으로 물들인다
명명에 대한 때늦은 통찰 / 변영희
1.
쥐바위에 올랐다 쥐똥나무가 자라고 있다
쥐똥 같은 열매 너머 검게 여문 바다
배경으로 함께 익어간다
파리한 웃음을 남기고 허공을 타는 거미들
밧줄은 단단했고 또한 말랑했다
2.
말똥바위에 올라가 옛사람을 만났지
말똥계곡을 지나 바닷가 절벽 위에 오른 그는 말을 타고 있었어
절벽을 때리는 매운 파도를 말은 견딜 수 없었을 테지
놈의 내부에 있는 모든 것을 배설하게 했던 것은 공포였을까
말똥을 밟아봐 말똥에 박혀 후들거리는 다리를 당겨 당겨봐
3.
말과 쥐가 무리지어 달리는 바다 위
컥컥 토해낸 나의 언어들
자음과 모음으로 나뉘어 떠도는 시푸른 이름
과거와 현재를 달려 이르게 될 미래
덧붙여, 덧붙여 진화하는 장난감로봇
지겨운 소설 / 변영희
지하철을 타고 공간 이동하던 어느 날이야
줄줄이 머리를 아래로 꺾고
침 흘리는 표정으로
문자와 사이버의 세계에 걸쳐 있더군
한 사람만이 눈을 깜박이며 허공을 더듬고 있었어
앞에 서 있는 남과 여는 반짝이는 별이었을까
몸을 촘촘히 기대고
맞잡은 손 한없이 꼼지락거리는
처음에는 여자가 너무 몸을 기울이고 있어서
술에 취했나 착각했지 뭐야
말해주고 싶었어
너무 기대지 마
버거워하며 밀어낼 수 있어
뜨거운 발열체가 내장된 사랑이란
고장의 위험도 빠르게 나타나지
흐흐흐
미리 말해줄 필요는 없는 거라고
젊은이는 생의 스펙터클을 만끽해야 한다고
낮은 속삭임이 들려오더군
마주 보고 앉는 지하철에서는
졸리지 않아도 눈을 감아야 해
회색 청년들 밑줄 좍 그어가며 책을 보(읽)더군
그들은 소설 같은 생의 모퉁이를 돌고 있었을까
그런데 말이야
지하철 좌석에 앉을 때
다리는 가지런히 붙이고 앉았으면 해
뾰족한 구두코를 날리고 싶은 충동
알아?
변영희 시인
전남 장성 출생. 동국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졸업
<당선소감>
뚜벅뚜벅 시의 걸음으로 나간다
언제부터였을까? 느릿느릿, 기억을 더듬어 본다.
아주 어렸던 코흘리개 시절이 떠오르고 나의 생이, 세상이, 고통으로 꽉 찬 풍선처럼 느껴졌던 청춘의 날들이 떠오르고 그리고 어느 봄날 씨앗처럼 던져졌던 스승님의 한 말씀이 떠오른다.
자신의 꿈에 대하여 생각하고 대답을 요구하는 순간 제일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시인이었다는 사실도 떠오른다.
그렇다면 그동안 나는 어디에 있었다는 것인가? 지구별의 주변부를 가쁘게 돌고 또 돌며 드러내지 못하는 독백의 말들을 품고 살았던 시간들. 이제 그 말에서 놓여나고 풍선은 멀리, 높이 날려 보내고 스승님의 말씀을 품었던 가슴속에서 비로소 싹을 틔운 수줍은 이파리를 내보이는 순간을 맞이했노라 믿어도 되는 것인가? 가슴속이 먹먹하고 알 수 없는 두려움과 부끄러움으로 가득하다.
새로운 시작을 가능하게 해준 『시에』와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순환하는 몇 번의 계절을 함께 하며 가르침을 주셨던 스승님, 송수권 선생님과 곽재구 선생님께 감사의 말씀 올립니다.
비틀거리는 걸음을 바로 잡도록 힘을 실어준 두 분의 김 시인님께 고맙다는 말 전합니다.
사랑하는 친구이자 영원한 나의 옆지기 상근, 오랜 친구 선영, 많은 시간을 함께 했던 ‘모난돌’님들에게 감사의 말 전합니다.
두려움은 내일의 일이라고 밀쳐둔다.
뚜벅뚜벅 나의 발걸음으로 익숙하지 않은 길을 새로이 찾아 나설 것이다.
아메바의 춤 / 김기화
여우의 눈물로 태어난 탓인지 그녀는
줄곧 꼬물거리며 배밀이에 빠져 있다
독하고 치열한 돌기(突起)를 반복하다가
가끔씩 흔적없이 소멸되기도 하지만
육신으로 바닥을 기는 하등의 몸부림이었다
깃털을 세운 파도가 하얗게 와 닿은
뱃고동 기슭엔 바다의 나이가 물금져 있다
바람과 파도가 만난 시간의 갈피에
그녀가 푸르게 갈긴 육필원고가 출렁거렸다
해물해물 그녀만의 섬을 질퍽거리는 오후
횡간으로 누운 수평선이 교미를 시작했다
둥둥 수많은 무생물과 생물의 불시착으로
포구마다 뱃머리마다 산란된 필적
차마 새길 수 없어 해감된 수면의 침묵을 보라
뗏밥처럼 붙어 있는 직립형 아메바들은
거대한 바다의 물길에 하찮은 비린내 풍겼던가
언제든 뒤엎을 수 있는 해면에 입질을 해대는
저공의 갈매기 한 마리가 날개를 헤적인다
밀물과 썰물의 육감적인 생을 사는 그들의 방식
물보라 속을 떠도는 바람의 깃을 세워본다
현미경 속에서 만난 알몸 춤사위는
끝나지 않은 그녀의 출입구였으리라
꾸물렁 여우의 눈을 가진 바다를 다녀왔다
조망권을 드립니다 / 김기화
창공을 날던 새 한 마리 조망권을 사려는 듯 기웃거려요 분양 안내판 위에 올라앉아 콕콕 조감도를 찍어요 두리번두리번 뾰족한 부리가 없는 그녀는 조각 된 낯선 그림 앞에서 밋밋한 평면이에요 그 평면을 딛고 수직으로 오른 고층 소용돌이가 프리미엄을 달고 하늘을 날아요 고급 소재로 시공된 모델하우스를 둘러보던 그녀는 도시귀족이 되어 계약서를 작성할까요? 꼼꼼 실내 건축가의 화려한 이력이 눈조리개를 펼치네요 최첨단 서랍식 환풍기 아래 오글보글 모형찌개가 끓어요 대리석 식탁 위의 열대과일이 탐스러워 아삭아삭 군침을 돋우네요 아트홀 품격으로 인테리어한 가구는 옵션이에요 일조량을 들여와 공간을 연출한 그가 넌출넌출 액자 속을 걸어 나와 말을 트네요 조망조망 하얀 혀를 놀리며 조명 아래서 세련된 디자인을 해요 베란다 확장공사는 시공사의 미끼라나요 점점 몰려든 인파들이 통유리 안에서 조망권을 저울질해요 물지느러미를 달고 전망을 흔드는 밀물과 썰물, 바다의 모양이 바뀌고 있는 걸까요? 하늘과 산과 구름과 햇살은 모두 예약된 프리미엄이에요 창창 수평선이 보이는 신도시개발지역, 파도가 하얗게 음소거된 해면도 육지를 향해 자맥질을 하네요, 꿈틀
사서함 106호 / 김기화
누군가 내 배꼽에 태엽을 감아줘
겨드랑이 가려워도 날개는 돋지 않아
붉은 녹물 흐르는 철문을 열어줘
그저 비상하고 싶을 뿐이야, 나는
저벅저벅 아득한 군화소리 들려오면
내 몸은 온통 직모로 각이 서지
날 차라리 감전시켜 달라고
더듬이를 세워 열쇠 구멍을 문지르지만
누군가 봉해 버린 입은, 사서함 106호
점점 굳어 가는 내 배꼽을 좀 봐
아무리 비벼도 정전기는 일어나지 않고
이미 식어 추운 동절기 같아
아무나 열 수 없는 블랙박스가 내 이름이야
철커덩 위험수위를 벗어나
내 몸의 내장까지 독식하려는
군사서함이라는 함구령에 불침번을 섰어
절벽으로 떠 있는 샛별 앞에서
더듬떠듬 미명의 동공을 꺼냈어
스프링이 달린 내 눈은
어둠 속에서 또다른 어둠을 폭식한 채
눈 먼 별과 동침을 했지
축축한 바람이 가라앉는 시간
사서함 106호, 그 건너 편 아파트에서
내 몸에 꼭 맞는 사서함을 짠 듯
직사각형 관 하나가 곤돌라를 타고 내려왔어
김기화 시인
충북 청원 출생
<당선소감>
산소 같은 시를 쓰고
『시에』의 한 가족이 된 것을 축하한다는 당선 소식은 약간의 떨림이었다.
순간 유년의 하얀 기억 한 토막이 생각났다. “이 다음에 자라서 꼭 여류시인이 되거라” 라고 말씀해 주셨던 6학년 때 글짓기반 선생님의 얼굴이 떠오른 것이다.
‘여류’라는 뜻을 알지 못한 채 왠지 멋있어 보여 처음으로 꿈이라는 단어를 곱씹어 보았던 아련한 그 기억, 그때부터 책방을 기웃거리며 가슴앓이를 했던 성장의 꽃물은 가슴 한 구석에 스스로 주홍글씨가 되어 따라다녔다.
시를 쓰거나 쓰지 않거나 늘 배고픈 시간이 많았던 이유를 성인이 되어서야 깨닫게 되었다. 시를 쓰고 있다는 말을 쉽게 꺼내지 못한 채 세상과의 아귀다툼 속에서 용케도 잘 버텨왔다는 작은 기쁨을 이 지면에 드러내고 싶다. 빠르고 각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숲에 들어가 숨고르기를 할 수 있는 산소 같은 시를 쓰고 싶다.
졸작에 한 표를 주셔서 세상 한 켠을 시 한 줄로 밝혀 보겠다는 새로운 꿈을 열어 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어디서나 ‘우리 집사람 시 쓰는 사람이야’라고 소문을 내며 은근한 담금질로 외조를 해 준 남편, 당선 소식을 듣고 바로 ‘김시인’이라고 불러 준 남편에게 진심으로 고마울 뿐이다.
글 쓰는 엄마를 자랑으로 알며 각자의 위치에서 응원을 아끼지 않은 은정아, 종원아 고맙다. 그리고 소식을 듣고 좋아해 주실 부모님 당신의 딸이어서 고맙습니다. 끝까지 함께 하자고 목소리를 보태 주고, 흔들릴 때마다 사랑의 매를 주신 문우들에게 정말 고맙다는 말을 전한다.
[심사평]
자신의 색깔을 보이라
이번 『시에』신인상에 투고된 150여 분의 1500여 편의 시를 읽으면서 시가 죽었다는 말은 한낱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만큼 투고작이 풍성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뼈를 깎는 듯한 가열한 열정의 흔적들과 조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가지 현대시가 산문성으로 치우쳐 있다는 것은 우려할 만한 일이라 선자들은 동의했다. 시대 자체가 엄연한 산문의 시대라는 사실은 부인 할 수 없지만, 장광설이나 요설이 아닌 산문시 자체의 밀도 있는 구조적인 조형력과 운율, 시적인 상상력과 언어 감수성 회득에 실패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예심을 거쳐 본심에 회부된 투고자는 총 10분이었다. 선자들은 무엇보다도 박기임, 김현희, 변가영, 김기화, 송정현, 변영희, 김혜경, 김인수, 나종훈, 홍선영 등의 시편들을 깊이 있게 정독했다. 그들은 각기 시적인 대상을 나름의 감각과 사유로 형상화하는 능력을 갖추고는 있었으나 몇몇을 제외하고는 새롭다는 면에서 일정부분 한계를 안고 있기도 했다. 특히 젊은 투고자들의 경우 절제력 있는 언어 구사력 보다는 대개는 요란한 말장난이나 넋두리를 늘어놓기 일쑤였다. 여타의 장르와는 달리 시는 생략을 통한 행간의 여백을 극대화하거나 이미지를 변용하여 확장해 나갈 줄 아는 언어 운용력이 불가피한 장르다. 따라서 굳이 장황한 언표가 필요했다면 거기에는 분명 합당한 동인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선자들은 일차적으로 선별된 박기임, 김현희, 변가영,의 시를 주목해서 읽었다. 이들의 시편들은 일상적인 사물이나 현장에서 포착한 정서를 아무런 무리 없이 구상화하는 이미지 현상력이 돋보였지만, 대체적으로 단순한 상상력으로 인해 도식적으로 떨어져 버리는 난전도 간과하기 어려웠다. 시적인 대상을 부조하는 능력에 비해 그 대당에서 새로운 발견의 눈이나 탄력적인 언어 운용 능력이 요구된다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마지막 경합에서 선외로 밀려난 만큼 좀더 참신한 언어와 깊이 있는 사유의 접점을 찾는 수련에 공력을 기울인다면 분명 시단에서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최종적으로 당선권에서 거론된 변영희, 김혜경, 김기화의 시편들은 각기 일장일단과 선자들 간의 이견이 있어 취사선택의 진통을 겪었다. 변영희의 시편이 활달하면서도 웅숭깊은 언어 운용을 통해 아이러니한 삶의 이면을 감지하는 눈길이 예사롭지 않았다면, 김혜경의 시는 아주 비극적 세계 인식에서 건져 올린 언어가 곡진한 페이소스로 다가왔다. 김기화의 시편들 역시 은유적 알레고리라 명명할 수 있는 해석적 결구가 돋보였다. 그러나 이들의 시편에서 이미지를 응집하여 확산해 내는 입체적인 사유의 진폭이 과제라고 선자들은 생각했다. 이들의 무르익은 시적 발상이 삶에 대한 새로운 통찰로까지 확대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덜어내기 어려웠다는 사실이다.
이와 같은 난상토론을 거치며 조율한 결과 그들의 시가 여타의 신인상 수준을 넘어서는 만큼 세 분을 모두 시단에 내보내기로 최종적 합의에 도달했다. 세 분 모두가 머지않아 선자들의 기우를 떨쳐낼 만한 시인으로서의 자질과 덕목을 고루 갖추었다고 판단한 까닭이다. 마지막으로 선자는 시인이라는 천생의 미덕과 열정을 겸비하고 있는 이 도전적인 신예들의 출현을 각별히 주목하고 싶다. 하나의 시인으로 태어나기 위해서 그들은 얼마나 무섭도록 외로운 불면의 밤을 지샜을 것인가.
그러나 그보다도 하나의 시인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또 얼마나 더 참혹한 고독의 시간을 견뎌야 하는 일인가를 축하의 말 대신 빙점으로 남기며 조용히 건투를 빈다.
심시 : 공광규 양문규 강희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