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시

이병률 시 보기(6편)

시치 2010. 3. 17. 19:41

 

 

바람의 사생활.外/ 이병률


가을은 차고 물도 차다
둥글고 가혹한 방 여기저기를 떠돌던 내 그림자가
어기적어기적 나뭇잎을 뜯어먹고 한숨을 내쉬었던 순간

그 순간 사내라는 말도 생겼을까
저 먼 옛날 오래전 오늘

사내라는 말이 솟구친 자리에 서럽고 끝이 무딘
고드름은 매달렸을까

슬픔으로 빚은 품이며 바람 같다 활 같다
그러지 않고는 이리 숨이 찰 수 있나
먼 기차소리라고 하기도 그렇고
비의 냄새라고 하기엔 더 그렇고
계집이란 말은 안팎이 잡히는데
그 무엇이 대신해줄 것 같지 않은
사내라는 말은 서럽고도 차가워
도망가려 버둥거리는 정처를 붙드는 순간
내 손에 뜨거운 피가 밸 것 같다

처음엔 햇빛이 생겼으나 눈빛이 생겼을 것이고
가슴이 생겼으나 심정이 생겨났을 것이다
한 사내가 두 사내가 되고
열 사내를 스물, 백, 천의 사내로 번지게 하고 불살랐던
바람의 습관들

되돌아보면 그 바람을 받아먹고
내 나무에 가지에 피를 돌게 하여
무심히 당신 앞을 수천 년을 흘렀던 것이다
그 바람이 아직 아직 찬란히 끝나지 않은 것이다

 

찬란 

 

겨우내 아무 일 없던 화분에서 잎이 나니 찬란하다

흙이 감정을 참지 못하니 찬란하다

 

감자에서 난 싹을 화분에 옮겨 심으며

손끝에서 종이 넘기는 소리를 듣는 것도

오래도록 내 뼈에 방들이 우는 소리 재우는 일도 찬란이다

 

살고자 하는 일이 찬란이었으므로

의자에 먼지 앉는 일은 더 찬란이리

찬란하지 않으면 모두 뒤처지고

광장에서 멀어지리

 

지난밤 남쪽의 바다를 생각하던 중에

등을 켜려다 전구가 나갔고

검푸른 어둠이 굽이쳤으나

생각만으로 겨울을 불렀으니 찬란이다

 

실로 이기고 지는 깐깐한 생명들이 뿌리까지 피곤한 것도

햇빛의 가랑이 사이로 북회귀선과 남회귀선이 만나는 것도

무시무시한 찬란이다

 

찬란이 아니면 다 그만이다

죽음 앞에서 그의 목숨은

찬란의 끝에서 걸쇠를 건져 올려 마음에 걸 것이니

지금껏으로도 많이 살았다 싶은 것은 찬란을 배웠기 때문

그러고도 겨우 일 년을 조금 넘게 살았다는 기분이 드는 것도

다 찬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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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 되면 생에 대한 긍정과 찬탄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하겠다. 존재 자체가 가히 “무시무시한 찬란”이다. 시인은 “찬란이 아니면 다 그만이다/ 죽음 앞에서 그의 목숨은/ 찬란의 끝에서 걸쇠를 건져 올려 마음에 걸 것이”라고 노래한다. 그러니까 찬란이란, 목숨의 마지막에 건져 올리는 생의 걸쇠인 셈이다. 다만 그것을 걸 마음이란 게 있는 한 말이다. 그러므로 삶이여, 부디 끝까지 마음이란 걸 놓치지 말지어다. “지금껏으로로도 많이 살았다 싶”다가도, “그러고도 겨우 일 년을 조금 넘게 살았다는 기분이 드는 것”이 마음이다. 다 찬란이다.

 

 

온다는 말 없이 간다는 말 없이

 

늦은 밤 술집에서 나오는데 주인 할머니

꽃다발을 놓고 간다며

마늘 찧던 손으로

꽃다발을 끌어안고 나오신다

 

꽃다발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할머니에게

 

이 꽃다발은 할머니한테 어울리네요

 

할머니는 한사코 가져가라고 나를 부르고

나는 애써 돌아보지 않는데

 

또 오기는 하라는 말에

온다는 말 없이 간다는 말 없이

꽃 향은 두고

술 향은 데리고 간다

 

좁은 골목은

식물의 줄기 속 같아서

골목 끝에 할머니를 서 있게 한다

 

다른 데 가지 말고

집에 가라는 할머니의 말

 

신(神)에게 가겠다고 까부는 밤은

술을 몇 잔 부어주고서야

이토록 환하고 착하게 온다

 

뒷모습


왜 추운데 서서 돌아가지 않는가
돌아갈 수 없어서가 아니라
끝에서 사람으로 사람에서 쌀로 쌀에서 고요로 사랑으로 돌아가려는 것이다

돌아오는 길은 어둡고 구덩이가 많아
그 차가운 존재들을 뛰어넘고 넘어서만 돌아가려 하는 것인가
추워지려는 것이다

지난봄 자고 일어난 자리에 가득 진 목련꽃잎들을 생각한 생각들이
눈길에 찍힌 작은 목숨들의 발자국이
발자국에서 빗방울로 빗방울에서 우주의 침묵으로
한통속으로 엉겨들어, 조그맣게 얼룩이라도 되어
이 천지간의 물결들을 최선들을 비벼대서
숨결이라도 일으키고 싶은 것이다

아, 돌아온다는 당신과 떠난 당신은 같은 온도인가
그사이 온통 가득한 허공을 밟고 뒤편의 뒷맛을 밟더라도
하나를 두고 하나를 되돌릴 수 없는 것이다

한곳을 가리키며 떨리는 나침반처럼
눈부시게 눈부시게 떨리는 뒷모습에게
그러니 벌거벗고 서있는 뒷모습에게
왜 그리 한없이 서 있냐고 물울 수는 없는 것이다 

 

아무것도 그 무엇으로도

 

눈은 내가 사람들에게 함부로 했던 시절 위로 내리는지 모른다

어느 겨울밤처럼 눈도 막막했는지 모른다

어디엔가 눈을 받아두기 위해 바닥을 까부수거나
내 몸 끝 어딘가를 오므려야 하는지도 모르고

피를 돌게 하는 것은 오로지 흰 풍경뿐이어서
그토록 창가에 매달렸는지도 모른다

애써 뒷모습을 보이느라 사랑이 희기만 한 눈들,
참을 수 없이 막막한 것들이 잔인해지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비명으로 세상을 저리 밀어버리는 것도 모르는 저 눈발

손가락을 끊어서 끊어서 으스러뜨려서 내가 알거나 본
모든 배후를 비비고 또 비벼서 아무것도 아니며 그 무엇이 되겠다는 듯
쌓이는 저 눈 풍경 고백 같다, 고백 같다

 

가슴을 쓸다

 

빚을 갚지 않은 인연이 있어

나무에 대고 비는 일이 많아졌다

빚을 빚으로 손에 쥐어주지 않아

오래도록 마음 녹지 않는 사람 있어

돌에다 빌다 물에도 빌고 뿌리에도 빈다

흔들리는 긴 머리의 뒷모습을 보이는 사람에게도 빌고

초겨울 밭에 다 익어 떨어졌겠지 싶은

열매에게도 고개 수그린다

빌어 갚아지는 것이 빚이 아님에도 빌고

빌고 쌓아야 하는 것이 공덕이 아님에도 빈다

스스로 조아리지 않더라도

멀리 날던 새가 몸을 낚아 비탈에 끌어다 벌주기도 하고

하다못해 식탁 옆에 덜어져 밟힌 쌀알에도 놀라

양손을 모으다 통곡하게 한다

빚으로 야위어 세월의 중심에 눈길 주지 못하는 이

이자도 갚지 않아 길에 나돌아댕기지 못하

마음만으로 미쳤다 소용돌이치는 값이 있다

저녁 그림자는 달에 닿은 지 오래건만

진종일 물가를 다 돌고도 모아지지 아니하는 생빚이 있다

 

이병률

1967년 충북 제천 출생,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 "좋은 사람들" "그날엔" 당선

<사함> 동인으로 활동

시집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한다]

여행산문집 [끌림]

제 11회 현대시학 작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