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시

거미 시 보기(13편)

시치 2010. 3. 2. 17:01
 

늙은 거미/박제영

 

늙은 거미를 본 적이 있나 당신, 늙은 거문개똥거미가 마른 항문으로 거미줄을 뽑아내는 것을 본 적이 있나 당신, 늙은 암컷 거문개똥거미가 제 마지막 거미줄 위에 맺힌 이슬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나 당신, 죽은 할머니가 그러셨지. 아가, 거미는 제 뱃속의 내장을 뽑아서 거미줄을 만드는 거란다. 그 거미줄로 새끼들 집도 짓고 새끼들 먹이도 잡는 거란다. 그렇게 새끼들 다 키우면 내장이란 내장은 다 빠져나가고 거죽만 남는 것이지. 새끼들 다 떠나보낸 늙은 거미가 마지막 남은 한 올 내장을 꺼내 거미줄을 치고 있다면 아가, 그건 늙은 거미가 제 수의를 짓고 있는 거란다. 그건 늙은 거미가 제 자신을 위해 만드는 처음이자 마지막 거미줄이란다. 거미는 그렇게 살다 가는 거야. 할머니가 검은 똥을 쌌던 그해 여름, 할머니는 늙은 거미처럼 제 거미줄을 치고 있었지. 늙은 거미를 본 적이 있나 당신.

 

 

거미줄/정호승

 

산 입에 거미줄을 쳐도
거미줄이 가장 아름다울 때는
거미줄에 걸린 아침 이슬이
햇살에 맑게 빛날 때다
송이송이 소나기가 매달려 있을 때다

산 입에 거미줄을 쳐도
거미줄이 가장 아름다울 때는
진실은 알지만 기다리고 있을 때다
진실에도 기다림이 필요하다고
진실은 기다림을 필요로 한다고
조용히 조용히 말하고 있을 때다

 

 

 거미/류시화

 

거미의 계절이 왔다 오월과
유월 사이 해와
그늘의 다툼이 시작되고
거미가 사방에 집을 짓는다

이상하다 거미줄을 통해 내
삶을 바라보는 것은
한 때 내가 바라던 것들은 거미줄처럼 얽혀있고
그 중심점에 거미만이 고독하게 매달려 있다

돌 위에 거미의 그림자가 흔들린다 나는
한낮에 거미 곁을 지나간다
나에게도 거미와 같은 어린 시절이 있었다
거미, 네가 헤쳐나갈 수 많은 시간들에 대해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거미에게 나는 아무 말 하지 않는다
다만 오월과 유월 사이 내
안의 거미를 지켜볼 뿐
모든 것으로부터 달아난다 해도
나 자신으로부터는 달아 날 수 없는 것

나는 해를 배경으로 거미를 바라본다
내가 삶에서 깨달은 것은 무엇이고
또 깨닫지 못한 것은 무엇인가
거미는 언제나 내 곁에 있었다
내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때에도
거미는 해를 등진 채 분주히 집을 짓고 있었다


 

   거미 /김록
 
  이  거미만이 지금  벌어지고 있는 현실을  실현하고  있
  다.  거미가  그렇다고 알  수 있겠는가. 거미가 될  수 있는

  게 있다면 거미는  어느새  지랄스럽다. 그 맥락에서, 거미

  는 일부러 보이게 했다. 못생겨 보이게, 평화란  이런 것이

  아닐까. 그것이 마침내 찾아와서가 아니라 그것이  간절할

  때 알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많은 마음 중  어떻게 아름다

  운 마음만 붙든 마음이  평화가  될 수  있는가. 그것은  그

  두려움에 대해 어떤 욕망을 가지고 차라리 고의로  저질러

  지는 게 더 낫다. 현실을 공격하는 심리는  간명하다. 현실

  보고  싶어서  잠들  수가  없다. 그로써 현실이  실현된 것

  은 아니다. 고통이 고통이 될 수 있다면! 하지만  현실성이

  강해지면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다. 이것은  거미가 예상

  한 일이기도 했다. 현실이  죽는 것은 죽는 순간이 살아 있

  기 때문이다. 거미가 실현하고 있는 것은 애달픈 것이다.

 

 

 거미/장석원

 

불빛 속에서 거미가 흔들린다
나를 노려보다가 떨어져서는
검은 털이 돋은 철사 다리를 움직여
발 쪽으로 기어간다 주저하지 않는다

거미는 내 몸의 길을 실수 없이 찾아낸다
거미는 움직이는 반점
거미는 흘러내리는 검은 핏방울
어둠이 결집된 냉기가 파고든다
그것이 나의 욕망이었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혓바닥처럼
목덜미를 핥고 명치를 스쳐
恥骨을 향하는 그림자
내가 만든 어둠의 파편
과거에서 전송된 거미

나는 두려워하며 가빠지며
잘려나간 그림자와 몸 아래에서
사라진 거미를, 거미를
삼켜버린 어두운 入口를 찾는다
그가 다시 과거로 스며들었다

나는 과거로 돌아가 과거가 기거하는
집 한 채가 되었다
입에서 거미줄이 흘러나온다
썩지 않는 사랑에 나를 가둔다

 

 

 붉은 태양이 거미를 문다* /박서영
 
  일몰 무렵이던가
  아이를 지우고 집으로 가던 길
  태양이 내 손을 잡고 어디론가 갔다
  그 후론 내 몸에 온통 물린 자국들이다
  칸나를 보면 그때가 생각난다
  칸나 잎사귀 사이에 투명한 거미집
  불룩한 배에 노란 줄무늬의
  거미가 천천히 허공으로 빨려 들어간다
  저, 불룩한 배를 터뜨리고 싶다
  붉은 태양이 거미를 물고 사라진다
  거미는 무거운 배를 끌어안고 천천히
  태양의 산부인과로 들어간다
  집게로 끄집어낸 태아들이
  여름대낮 칸나로 피어난다
  관 뚜껑이 열리듯 꽃이 피면
  내 몸은 쫙쫙 찢어진 꽃잎이 된다
 

 *붉은 태양이 거미를 문다 - 호안 미로의 그림 제목 

 

 

 거미의 습성 /이동호

 

 

어둠이 주춧돌로 들어가서
폐가의 무너진 담벼락을 일으켜 세울 무렵.
거미는 암키와의 자궁 속에서 기어 나와
낡은 건물의 무너지거나
금간 곳으로 침입하는
허공을 먹어치운다.
건물 곳곳 달빛을 그어놓으면
뜻하지 않는 먹이가 날아와 걸려들지만
주로 걸려드는 것은 곤충이다.
거미는 곤충들의 날개 속에 숨어있는
허공만을 갉아먹는다.
 
거미는 폐가나 수풀 속에서 주로 살지만
인간 속에 공생하기도 한다.
건물 곳곳 함정을 파놓으면
뜻하지 않은 먹이가 날아와서
걸려들지만,
역시 잡식성이 아니다.
걸려드는 먹이가 주로 모기들이다.
모기가 사람들의 몸 속에서 빨아들인
핏속 공허감을 거미는
먹어 치운다.

 

 

거미/박순옥

 

비 게인 오후
나무들 젖은 향기에
깊은숨을 마시며
맑고 청명한 가을날을 걷다가
물 맺힌 거미줄의 터널을 지난다

투명한 새끼들이
줄을 걸어
길을 막고
입술에 눈에
나를 옭아매다
끊어진다

보푸라기로 일어나는 햇살

나를 묶으라고
한참을 서 있었다


 

거미줄/이문재

 

거미로 하여금 저 거미줄을 만들게 하는
힘은 그리움이다

거미로 하여금 거미줄을 몸 밖
바람의 갈피 속으로 내밀게 하는 힘은 이미
기다림을 넘어선 미움이다 하지만
그 증오는 잘 정리되어 있는 것이어서
고요하고 아름답기까지 하다

팽팽하지 않은 기다림은 벌써
그 기다림에 진 것, 져버리고 만 것

터질 듯한 적막이다
나는 너를 잘 알고 있다

 

 

 거미/박완호

 

나뭇가지에서 나뭇가지로 걸린
질서 잡힌 자유 위에 눕고 싶다

어느 한 순간
예민한 감각으로부터 벗어나
오랫동안 비탈을 굴러온 돌멩이처럼
단단한 몸 차가운 체온으로
그대 떠난 뒤라도 결코 아파하지 않는

몇 잔의 술로 깨우지 못하는
아픈 생활의 파편들이 와 부딪히고
일어나면 냉수부터 찾는 목마름이
두 다리를 묶어놓는
빈 어둠의 땅을 지나
살아 있음으로,
깃발처럼 흔들려
둔감한 신경으로 굳어가는
꽁꽁 묶인 팔다리를 일으켜 세우며
아름다운 해방 위해

뜨거운 피 흘리고 싶다

거미/이면우


오솔길 가운데 낯선 거미줄
아침 이슬 반짝하니 거기 있음을 알겠다
허리 굽혀 갔다, 되짚어 오니 고추잠자리
망에 걸려 파닥이는 걸 보았다
작은 삶 하나, 거미줄로 숲 전체를 흔들고 있다
함께 흔들리며 거미는 자신의 때를 엿보고 있다
순간 땀 식은 등 아프도록 시리다.

그래, 내가 열아홉이라면 저 투명한 날개를
망에서 떠어내 바람 속으로 되돌릴 수 있겠지
적어도 스물아홉,서른아홉이라면 짐짓
몸 전체로 망을 밀고 가도 좋을 게다
그러나 나는 지금 마흔아홉
홀로 망을 짜던 거미의 마음을 엿볼 나이
지금 흔들리는 건 가을 거미의 외로움을 안다
캄캄한 배속, 들끓는 열망을 바로 지금, 부신 햇살 속에
저토록 살아꿈틀대는 걸로 바꿔놓고자
밤을 지새운 거미, 필사의 그물짜기를 나는 안다
이제 곧 겨울이 잇대 올것이다

이윽고 파닥거림 뜸해지고
그쯤에서 거미는 궁리를 마쳤던가
슬슬 잠자리 가까이 다가가기 시작했다
나는 허리 굽혀, 거미줄 아래 오속길 따라
채 해결 안된 사람의 일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수라(修羅)/백석

거미새끼 하나 방바닥에 나린 것을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문밖으로 쓸어버린다
차디찬 밤이다

언제인가 새끼거미 쓸려나간 곳에 큰거미가 왔다
나는 가슴이 짜릿한다
나는 또 큰거미를 쓸어 문밖으로 버리며
찬 밖이라도 새끼 있는 데로 가라고 하며 서러워한다

이렇게 해서 아린 가슴이 싹기도 전이다
어데서 좁쌀알만한 알에서 가제 깨인 듯한 발이 채 서지도
못한 무척 작은 새끼거미가 이번엔 큰거미 없어진 곳으로 와서 아물거린다
나는 가슴이 메이는 듯하다
내 손에 오르기라도 하라고 나는 손을 내어미나 분명히 울고불고 할
이 작은 것은 나를 무서우이 달아나버리며 나를 서럽게 한다
나는 이 작은 것을 고히 보드러운 종이에 받어 또 문밖으로 
버리며 이것의 엄마와 누나나 형이 가까이 이것의 걱정을 하며 있다가 
쉬이 만나기나 했으면 좋으련만 하고 슬퍼한다 

 

백석 시 修羅 이후

거미의 생에 가 보았는가/고형렬

 

천신만고 끝에 우리 네 식구는 문지방을 넘었다
아버지를 잃은 우리는 어떤 방에 들어갔다
아뜩했다 흐린 백열등 하나 천정 가운데 달랑 걸려 있어

 

밖에서 들어오는 바람에 간혹 줄이 흔들렸다

 

우리는 등을 쳐다보면서 삿자리를 건너가고 있었다
건너편에 뜯어진 벽지의 황토가 보였다 우리는 그리로
건너가고 윙 추억 같은 풍음이 들려왔다
귓속의 머리카락 같은 대롱에서 바람이 슬픈 소리를 냈다

 

모든 것은 이렇게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인간들에게 어떤 시절이 지나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방에 늙은 학생같이 생긴 한 남자가
검은 책을 보고 있었다 우리는 그 남자의 바로
책 표지 밑을 지나가고 있었다

 

머리를 뒤로 넘긴 것 같은 조금 수척한 남자가 멈칫했다
앞에 가던 형아가 보였던 모양이다 남자는
형아를 쓸어서 밖으로 버리고 다시 책을 보기 시작했다
모친은 그 앞을 가로질러 나아갔다 아들이
사라진 지점에서 어미는 두리번거리고 서 있었다

 

그때 남자가 모친을 쓸어 받아 문을 열고 한데로 버렸다
먼지처럼 날아갔다 남자는
뒤따라가는 아우에게 얇은 종이를 갖다 대는 참이었다
마치 입에 물라는 듯이
아우는 종이 위로 올라섰다 순간 남자는
문을 열고 아우를 밖으로 내다 버렸다

 

나는 뒤에서 앙 하고 소리치며 울었다 그 울음이
들릴 리가 만무했지만
그때 남자가 무언가 골똘한 생각에 빠진 것 같았다

 

혈육들은 그 후 어떻게 됐는지 알 길이 없다
바람 소리만 그날 밤새도록 어디론가 불어 갔다 어둠 속
삿자리 밑에서 나는 그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알 수 없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슬프다는 생각조차 없었다

 

이것이 우리 가족의 긴 미래사였다
남자는 단지 거미를 죽이지 않고 내다 버렸지만
그날 밤 나는 찢어진 벽지 속 황토 흙 속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