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시

김기택 시 보기(7편)

시치 2010. 2. 22. 01:15

손톱.外/김기택

  

 

  방금 전에 분명히 깍은 것 같은데

  손톱이 길게 자라 있다.

  그동안 잘라냈던 자리를 다 밀어내고

  그 자리를 꽉 채우고 있다.

  초침 지나간 자리처럼 빈틈이 없다.

  손톱이 있던 자리에 수많은 눈금이 새겨져 있다.

  잘라낸 손톱길이만큼 딸아이가 자라 있다.

  딸아이가 보는 동안에도

  손톱은 딸아이 키만큼 또 자라 있다.

  아무 빨리 달려도

  손톱 자라는 속도를 쫓아갈 수 없다.

  손톱 자라는 속도를 맞추느라

  나는 또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탄다.

  신호등마다 정류장마다 서는 답답한 속도에 화를 내며

  택시로 갈아탄다.

  손톱 자라는 속도를 먹여 살리느라

  출근하고 침 튀기며 말하고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것 같은 사람들에게

  친절한 웃음을 다하여 전화를 한다.

  이 정도면 헐떡거리며 달려왔다고 생각했는데

  달력을 넘기자마자

  또 한껏 자라 있는 손톰이 보인다.

  전에 깍아낸 길이보다 더 길게 자라 있다.

  한 번도 안 깍은 것처럼 자라 있다.

  할퀼 것도 없는데 긴 날을 세우고 있다.

  잠깐 전화 받고 나서 보면 그 자리에 또 있다.

  거울 안에서도 자라 있고

  양말을 벗을 때마다 발가락에도 자라 있고

  아침에 눈 뜨면 해처럼 둥글게 솟아 있다.

  세수하다 손톱을 보고 내 입은 또 쩍 벌어진다.

  아이쿠, 또 늦었네.

  시간이 벌써 이럴게 되었다니!

 

물방울 얼룩

 

바싹 마른 물방울 먼지가 유리창에 가득

붙어 있다 여전히 둥근 표면장력이 떼 지어 붙어 있다

먼지조차도 중력을 어쩔 수 없다는 듯

주르르 흘러내리고 있다

먼지 속에 남아 있는 액체의 무늬가 무게를 잡아당기고 있다

흘러내리면서 유리 절벽을 꽉

붙들고 있다 손톱자국처럼 유리창을 잡으며 미끄러지고 있다

손톱으로 유리판을 다

움켜쥐려고 딱딱하고 미끄러운 표면을 긁고 있다

손톱 긁는 소리를 끌어내리는 난폭한 중력

영원히 녹지 않는 얼음처럼 차가워

유리에는 할퀸 자국이 나지 않는다

먼지들은 미끄럽게 빛나는 표면에 뿌리처럼

박혀 있다 유리를 빨아들이는 이끼처럼 자라고 있다

유리 속에 갇힌 햇빛이 환하게 켜지자

먼지들도 물방울 기억을 되찾아 반짝거린다

뼈만 남은 물방울들

햇빛 화장火葬이 끝나 푸석푸석한 물방울들

다 말라버렸는데도 여전히 먼지 속에 남아있는 물방울들

 

                                                            ㅡ시집『현대문학상 수상시집』, 현대문학(2010)

가려움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관을

도로 꺼내려고

소복 입은 여자가 달려든다

 

막 닫히고 있는 불구덩이 철문 앞에서

바로 울음이 나오지 않자

한껏 입 벌린 허공이 가슴을 치며 펄쩍펄쩍 뛴다

 

몸뚱어리보다 큰 울음덩이가

터져나오려다 말고 좁은 목구멍에 콱 걸려

울음소리의 목을 조이자

 

목멘 사람의 팔다리처럼

온몸이 허공을 세차게 긁어대고 있다 가려움

 

긁어도 긁어도 긁히지 않는

겨드랑이 없는

손톱에서 피가 나지 않는 가려움

 

 

아이는 아직도 눈을 깜빡거리고 있다

파리가 새까맣게 앉은 밥덩이 구경한 지도 수십 일
몇 모금 물밖에는 먹은 것이 없는데도
아이는 아직도 자라고 있다.
침과 코, 오줌과 똥을 만들기 위해
생명은 살과 피를 짜내고 골수를 캐내고 있다.
손톱과 머리카락이 쉬지 않고 왕성하게 자라도록
눈알을 , 혀를 뇌수를 마지막가지 빨아들이고 있다.

생명이 뼈만 남기고 온몸을 다 파먹은 대가로
아이는 여전히 살아 있다.
썩은 고기인 줄 알고 파리떼가 몰려오지만
아이는 다만 커다란 눈을 깜빡거리고 있다.
파리 떼가 배 위에서 규칙적으로 부풀었다 가라앉도록
큰 숨을 몰아쉬고 있다.

 

가시

 

 가시가 되다 말았을까 잎이 되다 말았을까

날카로운 한 점 끝에 침을 모은 채

가시는 더 자라지 않는구나

 

걸어다닐 줄도 말할 줄도 모르고

남을 해치는 일이라곤 도저히 모르는

저 푸르고 순한 꽃나무 속에

어떻게 저런 공격성이 숨어 있었을끼

수액 속에도 불안이 있었던 것일까

꽃과 열매를 노리는 힘에 대한 공포가 있었던 것일까

꽃을 꺾으러 오는 놈은 누구라도

이 사나운 살을 꽂아 피를 내리라

그런 일념의 분노가 있었던 것일까

 

한 뿌리에서 올라온 똑같은 수액이건만

어느 것은 꽃이 되고

어느 것은 가시가 되었구나

 

  빗방울 길 산책 

비 온 뒤
빗방울 무늬가 무수히 찍혀 있는 산길을
느릿느릿 올라갔다
물빗자루가 한나절 깨끗이 쓸어놓은 길
발자국으로
비질한 자리가 흐트러질세라
조심조심 디뎌 걸었다
그래도 발바닥 밑에서는
빗방울 무늬들 부서지는 소리가
나직하게 새어나왔다
빗물을 양껏 저장한 나무들이
기둥마다 찰랑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비 그친 뒤
더 푸르러지고 무성해진 잎사귀들 속에서
젖은 새 울음소리가
새로 돋아나고 있었다
아직 아무도 밟지 않은 빗방울 길
돌아보니
눈길처럼 발자국이 따라오고 있었다

 

 

마음아 네가 쉴 곳은 내 안에 없다

 

누웠다 일어났다 먹다

신문을 보다 티브이를 보다 자다

하는 일밖에 할 일이 없을 때

몸은 하나의 정교한 물시계 같다

미세한 방광의 눈금으로 한 방울 두 방울

몸이 버린 물들이 고이는 것이 느껴진다

눈금이 모두 채워지면 방광에 종이 울린다

그때는 아무리 게으른 몸뚱이라도 정확하게 몸을 일으켜

오줌을 누어야 한다

물시계가 죽지 않도록 물을 잘 쏟아야 한다

 

아침 점심 저녁으로 꼬박꼬박 먹고 마시는데

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몸무게는 그대로다

그 동안 먹은 밥 마신 물 모두 어디로 갔나

대부분 배설물 분비물로 빠져 나갔겠지만

머리카락이 되어 깍이고

손톱 발톱이 되어 깍이고 때가 되어 밀려나가고

기운을 써서 소모시켜 버렸겠지만

더러는 말이 되어 입에서 새어나가지 않았을까

생각이 되어 부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하다가

끝내 기억만 남겨두고 다 잊어버리지 않았을까

슬픔이나 절망 분노 기쁨 같은 마음이 되었다가

표정이나 행동으로 울음으로 노래로 바뀌지 않았을까

 

방광의 눈금이 차올라 또 오줌을 누니

변기에서 모락모락 김이 솟아오른다

증기는 대기로 스며들어 다시는 보이지 않는다

오줌과 물과 온기와 냄새가 되어 나왔을 때

거기 마음도 함께 섞여나오지 않았을까

화내고 한숨 쉬고 소리치던 마음도

으르렁거리던 마음도

누가 있는 줄도 모르고 중얼거리던 마음도

함께 흘러나와 변기와 대기 속으로 흩어지지 않았을까

아무리 편하게 몸을 누이고 있어도

마음은 쉬지 않고 뒤채고 끙끙거린다

맑은 잠속까지 꿈이 되어 들어와 흙탕물을 일으킨다

어쩌다 이 갑갑한 몸에 들어와 살게 되었을까

가만히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안쓰러워진다

마음도 털처럼 몸에 뿌리박고 산다는 것

내장이 소화시킨 것을 먹고 자라야 한다는 것

먹지 않으면 몸뚱어리처럼 굶어죽는다는 것

어려서는 아름답고 크고 자유로웠지만

어른이 되면 더러워지고 딱딱해져서

평생을 앓다가 죽는다는 것

그런 마음을 보면 불쌍한 몸보다도 더 불쌍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