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영 시 보기(9편)
수족관 속 미아보호소.外/정진영
수족관 속 물고기가 버둥거린다 입 밖으로 새나오는 공기방울들 말이 되지 못하고 터져버린다
집이 어디였더라, 물속 집 주소는 지워진지 오래 멍하니 멈춰선 아이의 물색 눈동자 속에서 지느러미가 흔들린다 아이는 물이끼가 달라붙은 통유리를 두드린다 물의 벽을 두드린다 물고기 뻐끔거리는 입모양을 따라하며 수족관을 엿본다 물결 커튼이 잠깐 흔들렸던가 불분명한 발음들이 수족관 유리를 타고 흘러내린다 아이는 물속으로 들어가려 안간힘을 쓴다 수족관을 열기 위해 애를 쓴다 아이가 중얼거릴 때마다 공기방울들이 끝도 없이 튀어나온다 아이의 시야를 가리는 몇몇 기억들마저 흔적도 없이 지워져버린다
서서히 줄어드는 아이의 말소리,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물고기집 주소가 보이지 않는다.
달이 숫자 모양으로 떠오르는 시간, 경리과 K과장은 버스 차창에 비친 자신의 몰골을 무심히 본다 어둠 속에 고여 있던 눈알이 희미하게 유리 위로 튀어나온다 눈동자 속으로 빌딩 창문들이 금전 출납부 잔고란 넘겨지듯 휙휙 지나간다 종일 자신이 들여다보던 아라비아 숫자들이 꿈틀거린다 123456789 눈알 속으로 파고들려는 듯 일제히 각을 뒤튼다 완전한 수로 끝나지 못해 버석거리는 숫자들, 그의 후줄근한 오늘 뒤에 철썩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점점 더 눈알 안쪽이 부풀어 오른다 터질 것 같아, 아아 눈꺼풀을 질끈 내려감는다 그의 어지러운 하루가 으깨진다 고였던 숫자들이 쏟아진다 텅 비워지는 눈동자 속, 드디어 숫자 10이 그의 안구 속으로 굴러들어가 환히 박힌다. 대공원 매표소 앞 좌판 위 허리 구부정한 노인이 풍선 속에 바람을 불어 넣는다 공기 주입기를 풍선 주둥이에 대고 펌프질을 할 때마다 노인의 두꺼운 손바닥 안에선 햇살 덩어리가 하나 둘 마술처럼 튀어 나온다 뜨겁지 않은 햇볕 열매들 좌판 위로 이리저리 굴러 나와 과일 무더기처럼 쌓인다 꼭 제 우주만큼 부풀어 오른 열매를 하나씩 받아 쥐고 공원을 향해 달려갈 아이들 까르 까르르 날아오를 소리 번쩍 들어 올려 줄 색색의 둥근 산소 주머니 노인의 늙은 손 지문을 품고 말랑말랑 익어간다
한 사내가 눈 위에 연장 가방을 내려놓는다 끝도 없이 갈라지는 두 갈래길, 더 이상 메고 갈 수가 없다 축 늘어진 가방은 어깨 줄을 사지처럼 늘어뜨리고 길바닥에 그대로 누워버린다 한 뼘 벌어진 옆구리로 가루 눈발들 몰려든다 사내는 입구를 손아귀에 쥐고 다 쏟아진 상처 꿰매어 주듯 지퍼를 조심조심 여며준다 한 생 끌고 다녀 말 못하는 새끼보다 더 애처로운, 한낱 가방이었을 뿐인 가방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린다 남은 온기라도 마음껏 가져가라, 단 한 번도 온기를 바라지 않았으니,
꼭 제 테두리만큼 눈을 녹이며
아주 특별했던 연장가방이 눈 속에 묻힙니다 보르헤스 쌍갈래길 정원 안에 소리 없이 묻힙니다.
요조*, 당신을 만나는 밤에는 어김없이 검은 물이 밀려듭니다. 겹겹이 넘실대는 물결이 침대 스프링에 스며들어 당신이 담담히 뛰어내렸을 그 다마 강, 깊고 어두운 수원지 바닥으로 나를 푹 꺼지게 합니다. 나는 기꺼이 무거운 눈꺼풀을 내리고 강물 아래 누운 당신에게로 흘러갑니다. 보이지 않는 물속을 더듬으면 당신이 흘려놓은 말들이 발가락 사이로 스며듭니다. 연민 때문에 가라앉은 당신의 취한 모래알들입니다. 밤새 건져 내어도 줄어들지 않을 후회와 애착들의 지리멸렬한 알갱이들은 그렇게 내게로 와 달라붙습니다. 발이 없는 당신의 모래알들은 당신이 자라온 계급과는 전혀 다른 계급에서 자란 강하고 굳센 물풀들에게 달라붙습니다. 당신은 물 회오리 속에서 밤이 다 가도록 내게 속삭입니다. 나는 솜에도 상처 받아요 그러니 상처 주지 말아요, 검은 물은 원래부터 그런 거라고 입을 벙긋거려도 소리는 닿지 않고 이내 당신의 물 동그라미 밖으로 내 말은 미끄러지고 맙니다. 그 가깝고도 먼 눈동자에 닿기 위해 나, 당신을 만나는 밤에는 당신의 검은 물을 벌써 몸속에 가득 채우고서 당신의 중심을 향해 단번에 뛰어 내립니다. 후회도 없이, 당신을 꼭 빼닮은 물먹은 솜이 되어 점점 어둠 속으로 가라앉습니다.
*요조 -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 ‘인간실격’에서의 주인공
크리스마스카드를 열자 딸깍, 불빛 켜지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눈 오는 밤, 가지런히 두 손 모으고 공손하게 귀를 대고 들었다 너의 말소리, 구멍 숭숭 뚫린 스피커를 타고 빛 가루 털어내며 당도한 너는 어린 목소리를 내는 늙은 성우처럼 취한 말들을 웅얼거린다 애니메이션처럼 살고 싶었는데, 담요를 끌어당겨 몸을 움츠릴수록 점점 더 늘어지는 고드름 말들 스피커 전선을 타고 흘러넘쳐 매 달린 은종마저 얼어 뚝뚝 부러질 것 같구나
잠깐인 것이 어디 흰 눈뿐이랴 한 생은 너무 빨리 지나가고 문득 카드 불빛 속으로 뛰어든 눈송이처럼 어두운 방안에서도 빛을 밝히며 잠시, 아주 잠시 반짝이는 것 일뿐 자폐치료를 받는 아이가 나무 아래에 앉아 있다 시간이 멈춰있다 나뭇잎이 흔들린다 아이는 지금 월계수나무 꼭대기로 올라가는 중이다
허공을 향해 투명한 팔다리를 뻗는다 햇볕을 잡아당긴다 아이의 손톱에 걸려 털실 풀어지듯 쏟아져 들어오는 금빛 실타래 나뭇잎 사이로 햇빛이 엉킨다
아이는 미동도 없이 돌돌 말린 햇빛 실 사이로 고양이처럼 몸을 데굴데굴 굴린다 빛을 제 몸에 칭칭 감는다 애기 머리통만한 털실 고치가 된다
따뜻한 태반 부드러운 햇빛 양수 아이는 고치 속에 엎드려 자신의 숨소리에 귀를 세운다 가르릉 가르릉 흔들리는 월계수나무,
한 아이가 병원 나무 아래 고요히 앉아 있다 어느 스님이 조주에게 물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조주가 말했다 “없다!” 의사가 들어와 묻는다 이제 기억이 나시는지요? (그는 방금 깨어났다) 그가 더듬거리며 입을 벌렸을 때 갑자기 그의 입 속에서 개 짖는 소리가 튀어 나온다 뱃속 깊은 곳에서 동그랗게 말린 소리가 입 밖으로 튕겨져 나온다 (슬로우 모션으로) 엉켜 단단해진 소리가 응급실 벽을 향해 날아간다 한 번은 밖을 향해 한 번은 안을 향해 네트처럼 펼쳐진 침상 칸막이를 스치며 소리가 굴러 떨어진다 놀란 의료진들이 그의 입을 틀어막으려 달려든다 굴러 나온 소리들이 흔들리는 침대에 부딪쳐 튀어 오른다 (총소리 보다 더 날렵하게 물오리를 낚아채던 기억과 서울대 병원 동물 정신과에서 자폐치료를 받던 기억의 소리 공들) 그가 세차게 버둥거릴수록 점점 더 응급실 천정 쪽으로 높이 튀어 오르고 있다.
<<정진영 시인 약력>> *충북 단양에서 출생. *충북대 철학과 졸업. *2004년 《문학사상》에 〈중환자실의 까뮈〉外 2편으로 등단. *2008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기금 수혜.
이슬비 온다 사락사락, 얇은 물빛 목소리 이슬비 온다, 어린 새순들 오그렸던 귀를 연다 사락사락, 빗방울이 들어왔다 돌아나간다, 실가지가 흔들린다, 손톱만한 나뭇잎을 뚫고 스며드는 물 속삭임 사락사락, 숨구멍이 간지럽다, 소곤대는 말을 들으려 사락사락, 연두색 감지기들 부풀어오른다, 머지않아 수천 배나 큰 나뭇잎으로 펼쳐질 사락사락, 쉼 없이 귓속말을 쟁여 넣는 가지 끝 싹눈들, 곧 다가올 계절의 완성을 위해 사락사락, 대지를 뒤덮을 듯 내려앉는 뿌연 목소리, 사락사락, 이슬비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