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시

박판식 시 보기(8편)

시치 2010. 2. 15. 16:50

당신의 이름이 태어난 자리. 외/박판식


계란이나 사람이나 불안한 이름을 갖고 있는 것은 매한가지

고여 있는 액체와 흐르는 액체의 차별정도다

너는 미로 속에 있다, 라고 나도 모르게 발설해버린 순간

나는 내 구두 한 짝이 사라진 것을 눈치 챈다

4개의 물체가 짚 덤불 속에 있다

비가 새는 지붕인데 용케 쾌적하다

태어나지 않는 것들의 가벼움으로, 이상한 농담을 잘하는 동생이

있었으면, 하고 상상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공중에 떠 있는 공이 자신의 탄력을 믿듯이

알을 깨고 나온 병아리들이 곧바로 지면위로 튀어 오른다

평균율에 관한 미감, 욕조의 형태에 관한 본능

체온과 방향감각, 생존의 욕구 때문에 화가 나는 것도 당연하다

아직 태어나지 않는 것들의 무거움으로, 닫혀 있다거나 열려 있다는 식의

감각이 존재하지도 않는 공간을 상상하는 것도 좋다

오른 손과 왼손을 포갤 때 생기는 공간

지금은 과거가 완전히 지나가지 않은 시간이라고 믿어도 좋다

아래도 위도 아닌 지점, 떨어졌는데 깨지지도 않고 흉터도 없이

움푹 패어진 곳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하이델베르크로 가는 두 번째 여행


 이 밤, 오한을 느끼며 창밖 나무들의 어두운 계단을 오르는 이는 누구인가, 구름과 나무들이 서로 연락을 끊은 지는 오래인데, 누가 나무들의 끝에 올라가 구름이 되려 하는가

 

 그녀는 여기가 이층집의 다락방이라고 했지만 나는 지금 옹기 속에 있다 21세에서 29세까지는 아주 쉬웠다 긴 책을 쓸 재능도 있었고, 옷가방도 없이 여행을 떠날 수도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10년 전에 죽었고, 그녀는 가끔 꿈속에서 아버지 목소리를 흉내 낸다 ‘당신은 당신의 날개를 꺾어서 어디다 버렸나요?’ 나의 상상력은 그녀의 날개를 그려내지 못한다 나는 다만 옹기 밖으로 기어 나오지 못한 겁쟁이 새였을 뿐이다


 새 모양의 긴 고드름, 그 끝에서 물이 한 방울씩 떨어진다 삼십 세 이전을 회상하면 늘 이런 식이다 진실한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될 때까지 어쩔 수 없이 겪어야할 저주다


 삼십 세 이전에 나는 구름과 나무들의 가교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삼십 이후엔 그냥 검은 구름과 흰 구름의 친교가 되었다 죽기직전 그녀의 아버지가 실패자임을 고백했을 때 그녀는 울지 않았다 아버지의 유언은 사후에만 옹기를 열어 볼 것, 그러나 그녀는 밀봉된 옹기를 열어보지 않았고 그렇게 아버지에게 복수했다   


 나는 지금 옹기 속에 있다 그러나 건강은 꽤 좋은 편이고 동전을 수집하는 취미를 갖고 있다 내가 원하는 미래는 없지만, 내가 원하는 동전은 있다 가령 그것은 사자문양이 새겨진 1969년도 핀란드산 동전이고, 동전 수집은 내 건강에 이롭다


 그녀는 나의 동전들을 아무것도 사지 못하는 장식물일 뿐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못쓰게 된 동전들이야말로 이 세상의 물건이 아니다 늙은 사람이 다시 어린아이가 되어 죽는 방식을 나는 이 옹기 속에서 여러 번 보았다 그리고 옹기를 깨고 그녀가 나를 떠났을 때 비로소 내 간절한 기다림은 이루어졌다 불멸하지 않는 영혼의 윤회의 끝과 그 교리문답의 답은.

 

찬드라의 손


진홍빛 스카프와 카나리아를 바꾸어라

은행 출납전표와 모스크바행 열차표를 교환하라

악에 물든 빈민가 소년과 총독의 권총자살을 비교하라

여명, 무산계급의 분홍 구름과 높이가 다른 지붕과 지붕이 이어놓은

검은 선의 관계를 논하라

현세의 진리는 지금 혼선인가 통화중인가

수화기를 붙잡고 우는 여자의 음성은 잡음인가 절규인가

이번 생애에 당신은 세계의 끝을 보리라고 믿으십니까

오늘 날씨는 무덥고 당신의 담당 산부인과 의사는 권위적이군요

삼나무 숲은 빌딩의 유리창들 사이에 포위되어 있습니다

턱수염을 깎고 말 네 필이 끄는 마차를 모는

이름 부르기 까다로운 남작이 되고 싶습니다

마르크스주의는 종교입니까 과학입니까

불붙은 채 달려가는 기차, 그 끝은 바다입니까 파멸입니까

인생 계약을 파기하는 방법은 자살과 타살 두 가지뿐입니까

승려와 무장 게릴라, 베트남과 대한민국의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도서관은 불타도 방직공장은 돌아갑니다

계몽운동과 개종은 어떤 친화력을 가졌습니까

아름다운 경치로군요, 오늘은 제 꿈이 실현되는 날입니다

디오니소스와 오르페우스가 만나는 희귀한 날입니다

나는 산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태어나 어둠침침한 시력을 가졌고

당신은 언덕조차 없는 마을에서 태어나 시간의 먼 여행을 믿는 분이십니다

최후의 만찬을 꼭 당신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아이리스


주먹 속에 마름모꼴 얼음 한 조각을 꼭 쥔 여름이었다

불멸이라고 하기엔 아이리스는 너무 야윈 소녀였다 닫힌 침실, 아름다운 목소리,

아이리스는 종달새가 날아와서 자신의 창가에 앉는 것은

무엇인가 자신에게 할 말이 있기 때문이라고 믿는 소녀였다

아이리스, 어디에도 모서리가 없는 바다처럼

하지만 여름날의 변덕스런 날씨에 더러워진 갈매기처럼

무엇인가로부터 달아나려고 하는

예배당의 참회보다도 더 말이 없는 소녀

운하의 끝에선 소금의 반짝이는 결정들이

몸부림치는 나무들에게서 뺨과 눈과 턱을 조금씩 갉아먹는 여름이었다 

아이리스를 떠올리면 지금도 생각나는 어두운 담장과 오솔길

육체의 아름다움과 탄력

그런 아이리스를 잊기 위하여 어떻게 괴로워하지 않을 수 있었으리

아이리스는 참매미들이 떨어진 떡갈나무가

얼마나 더 어두워지는지 알고 있는 소녀

화로 속으로 밀어 넣은 나무들이 다시 재가 되어 쏟아져 나온 저녁

두터운 의복 같은 것에 의지해서야 겨우 나를 감추는, 무능한 겨울


A에서 B까지의 귀머거리


내가 당신이 되어 꿈을 꾸는 때가 있다

당신은 왜 이런 괴로움과 슬픔 속에 당신을 방치해 두었나

한때 우린 총알이 빠져나간 총구처럼 충분히 달구어졌었다

그러나 지금 나는 단순한 격자무늬처럼 살고 싶다

목 잘린 말벌이 잠시 살아 버둥거리듯

나는 주인 없는 두통에 시달린다

유리병 속의 수은처럼

갑자기 주저앉은 꼭두각시인형처럼

움직임을 기다리는 모든 사물들처럼

나는 나에게 유리한 꿈만을 꾸었다

그러나 왜 도끼의 운명에는 반드시 죽어야할 나무가 있는가

나는 사물이 아니라 장소이거나 시간이어야만 했다

하지만 당신에 관해서라면 언제나 내 왼손이나 오른손, 둘 중 하나는 틀렸다

내 의도와는 상관없을 때 나는 희미해지거나 아름다웠다

내 꿈의 주인은 어쩌면 오래전에 죽은 당신이다

거울을 깨뜨리고 싶은 충동만으로도 나의 얼굴에는 충분한 도끼자국이 생겨난다

 

칠월


고통으로 물집 잡힌 포도들, 여름의 나무들은 손가락을 지녔다

비록 아무것도 쥘 수 없지만

방직 공장의 처녀들은 실을 잣고

오솔길은 굽이굽이 향기를 풀어낸다

길고 검은 머리카락을 빗어내리는

믿어지지 않는 햇빛의 손

나는 태어나기 전부터 감춰두었던 조개껍데기를 내민다

아홉 가닥 연뿌리가 진흙을 빠져 나온다

솟구치는 아홉 가닥 피라고 여자가 말한다

강의 금빛 모래

흙을 토해내는 조개의 입술에 작은 여자들이 매달린다

즐거움은 손 안에 있다

일곱 번 색을 바꾼 꽃이 있다

그러나 이제 두 번밖에 남지 않았다고 누가 말할 수 있는가

 

윤회


고대 범어에서 윤회는 수레바퀴를 뜻했다

선선에서 윤화란 목숨을 빚진 사람은 반드시 다음 생에라도

목숨을 구해준 이에게 목숨을 바친다라는 뜻이었다

중국의 연나라에서는 연꽃 속에서 영원히 몸 섞는 연인이라는 뜻이었다

남자들로만 구성된 거란의 한 떠돌이 부족에게는

그녀는 죽었다 그러나 나는 그녀를 찾으러 나선다라는 뜻이었다

유마경에 나오는 향기의 나라에서는 태어나기도 전에

죽는다라는 뜻이기도 했다 어쨌든,

기원전 그리스의 한 상인이 서역을 지나간 적이 있다

그의 목적지는 윤회였다

불꽃과 얼음의 거대한 산을 넘어 먼지의 집들을 지나 그는

서역의 한 작은 오아시스로 만들어진 나라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적어도 그가 다섯 번은 태어나기도 전의 사람들이

그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여태껏 아무런 빚도 지지 않고 살아왔다 자부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다섯 번을 태어나는 동안 네 번의 죽음에 빚을 지고 있었군요

침착해라 변하지 않는 형상이란 없지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그렇게 조급하게 굴 필요는 없어

어디로 가든 결국 네가 만나는 것은 바로 너니까

 

장마 속의 백일몽


성긴 옷감과 빠진 머리카락들과 뭉쳐서 나는 잠을 잔다

비통한 안개에 둘러싸여 어둠침침한 저녁과 싸우면서

별들은 낮에도 무섭도록 환하고

빛나는 여름은 구름 위에서 쾌청한데

나는 수초를 쓰다듬는 낡은 목선의 밑창

입가에 웃음을 머금은 채 모래 속에 머리를 처박고 죽은 돌고래

나는 잠 속에서도 발가벗은 채

내 손에 닿으면 부끄러워 오므라드는 능금 하나를 꼭 쥐고 있다

실용성이라곤 조금도 없는 감정

잠의 코뜨개바늘은 감정과 육체를 꿰매어 나를 보잘것없는 몸뚱이로 만들고

파도가 빈 술병과 버려진 가정용품들과 사투를 벌이는 동안

능금은 아궁이에 지핀 붉은 불로 바뀐다

나는 짚 덤불 위에 웅크리고 누워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잠든 사나이